41. 심영장(深影場)
등이 구부정한 노파는 한쪽 눈이 허옇게 뒤집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시력을 잃은 모양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이마에 잔뜩 주름을 새긴 노파의 말에 적비연이 입매를 비틀었다.
“거 구경이나 좀 하자니까.”
“누가 뭐라더냐? 그보다 아까부터 문고리를 쥐고 뭐 하는고?”
“문고리라니 무슨…… 응?”
적비연이 움찔거리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맙소사. 어느 틈에.
세상을 뒤덮을 것만 같던 어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자신은 문고리를 쥔 채 낑낑거리고 있는 게 아닌가?
노파의 눈매가 재미있다는 듯 휘었다.
“한 식경(약 30분)이 다 되어가도록 그러고 있더구나.”
“뭐, 뭐요? 한 식경? 내가 한 식경 동안 저 문고리를 쥐고…….”
“낑낑대고 있었지.”
노파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허! 기가 찰 노릇이다.
그럼 세상을 덮었던 어둠의 비도, 무섭게 내려치던 번개도 저 노파에게는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라는 건가?
뭐,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런 꼴사나운 모습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저 할망구, 분명히 내 모습을 보고 낄낄거렸겠군.’
내심 기분이 언짢았지만 별수 있나?
자신은 어디까지나 불청객이니 감수할 수밖에.
“아무튼 구경 좀 해도 되겠소?”
“안 된다면 나가려고?”
“그건 아니지.”
적비연이 피식 웃고는 걸음을 옮겼다.
과연 기괴만상이라는 명칭답게 요상한 물건들이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
도통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모를 것도 많았다.
물론 도검창이나 암기 같은 일반적인 무기류도 있었고, 옷이나 영단, 부적으로 보이는 것들도 있었다.
출처가 정확하지 않은 무공비서도 몇 권 보였다.
안쪽으로 깊이 들어가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드러났다.
“아래에 내려가 봐도 되겠소?”
“그러든지 말든지.”
뭐, 들어가도 된단 말이겠지?
적비연이 지하로 걸음을 옮겼다.
한편 적비연이 아래로 내려가자 노파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턱을 괴었다.
‘저 녀석…… 도대체 여길 어떻게 들어온 거지?’
처음이었다.
명단에도 없는 놈이 이곳에 들어온 것은.
그래, 그 옛날 제갈량이 들어온 적이 있었다는 기록을 빼면 말이다.
* * *
과연 지하실에도 괴이한 물건들이 많았다.
새장에 갇힌 채 화살처럼 빠르게 맴도는 새, 손끝만 닿아도 징징 울어대는 검, 알아보기도 힘든 고대어가 잔뜩 적힌 비서, 특이한 향을 뿜는 초, 방울이 달린 지팡이 등.
정말이지 기상천외한 물건들뿐이었다.
‘신기하긴 한데 딱히 돈 주고 살 만한 물건은 없네.’
뭐, 지금이야 차고 넘치는 게 돈이라지만 굳이 필요 없는 걸 살 이유는 없으니까.
괜히 기를 쓰고 들어왔나?
이래서야 애쓴 보람도 없지 않나?
적비연이 투덜거리고는 돌아서려고 할 때였다.
샤아아아.
등 뒤에서 느껴지는 요상한 기운.
‘가만. 방금……?’
그 신묘한 기운에 이끌리듯 적비연이 돌아섰다.
그의 눈길이 향한 곳에는 굉장히 낡은 비서 한 권이 아무렇게나 꽂혀 있었다.
서책에서 저런 오묘한 기운을 뿜어내다니.
사람이 아닌 사물에게서 이런 기운을 느낀 건 처음이다.
물론 보검이나 보도를 만지면 그런 기운이 느껴질 때가 있다고도 한다.
하지만 서책에서도 그런 기운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책을 꺼내드 니 다행히 고대어는 아니었다.
마선접비록(魔仙接祕錄)?
제목만 봐서는 무공서인지 잡서인지 구분도 안 된다.
그때 위층에서 노파의 목소리가 불쑥 들려왔다.
“그건 값이 좀 나가네. 이만 냥일세.”
적비연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서책을 보았다.
이게 이만 냥이라고?
이 낡은 서책 하나가?
십전도비와 공보단은 비교도 안 되는 가격이라니.
아니, 그보다 저 노파는 보지도 않고 이 서책에 관심을 가진다는 걸 어찌 안 거지?
적비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서책을 펼쳐 보았다.
글귀가 붉은색으로 잔뜩 적혀 있어서 어딘지 섬뜩해 보일 지경.
평소였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왔으리라.
하지만 이 낡은 서책 하나가 이만 냥이라고 하니 괜히 더 호기심이 생긴다.
어차피 이제 차고 넘치는 게 돈이 아닌가?
게다가 앞으로 천상원이 벌어들일 수익은 천문학적인 금액이 될 터.
‘그래, 그까짓 이만 냥인데, 뭐.’
범인이 이런 생각을 엿보기라도 했다면 기겁을 하겠지만, 적비연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는 서책을 가지고 일 층으로 올라왔다.
‘그나저나 책이 뿜어내는 기운이 너무 강해서 지니고 다니긴 어렵겠는데……’
적비연이 고민에 잠긴 채로 노파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다가 순간 우뚝 멈춰 섰다.
“당신은……?”
“어? 여기에 계셨네요?”
뜻밖에도 인사를 건네오는 여인은 천상원주 은하란이었다.
“어떻게 여길……?”
“제 단골 가게니까요.”
“여기가……?”
“네, 예로부터 신녀나 기문둔갑술을 사용하는 도인들에게는 보물상 같은 곳이죠.”
그때 지켜만 보던 노파가 불쑥 물었다.
“아는 사이였더냐?”
“네, 할머니. 제가 말씀드린 그 사람이에요.”
“역시 그런 거였군.”
노파가 이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적비연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마치 품평이라도 하는 듯한 시선에 적비연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 할멈은 왜 사람을 저렇게 보는 거야?
그때 은하란의 시선이 마선접비록에 꽂혔다.
“그런데 그 책은……?”
적비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눈길을 끌어서.”
은하란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흥미롭네요.”
노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나도 결과가 궁금하구나.”
“그렇죠? 할머니.”
은하란의 말끝에 적비연이 눈살을 구기며 물었다.
“도대체 뭐가 말이오?”
두 사람이 적비연을 돌아보며 동시에 답했다.
“그런 게 있어.”
“그런 게 있어요.”
* * *
적비연이 기루로 돌아왔을 때는 다행히 하천웅이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상태였다.
마선접비록은 신묘한 기운이 강해서 우선 은하란에게 보관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그 반응이 영 신경 쓰인단 말이지.’
“이거…… 꼭 사고 싶은 거예요?”
“왜 그러시오?”
“아니, 그냥…… 궁금해서요. 알겠어요. 제가 가지고는 있을게요.”
마지못한 듯 대답한 은하란은 마치 매우 불결한 물건을 잡듯이 엄지와 검지로 서책을 살짝 집어 들었다.
노파가 낡은 서책을 광목천으로 꽁꽁 감싼 후에야 제대로 챙겼다.
‘도대체 그 꺼림칙한 반응은 뭐지?’
하지만 적비연의 상념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잠에서 깬 하천웅이 한껏 진지한 표정이 되어서 적비연을 불렀기 때문이다.
“운귀.”
“예, 주군.”
“너는 나의 충복이다. 맞느냐?”
이놈 갑자기 왜 무게를 잡고 그래? 불안하게.
그래도 대답은 해야 하기에,
“그렇습니다.”
“어렸을 때 내가 너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지. 나를 지키기 위한 각오가 어느 정도냐고. 내가 납득할 수 있게 얘기해 달라고 했던 기억나나?”
어째 점점 불안해지는데.
“기억납니다.”
“그때 네가 뭐라고 했지?”
“주군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똥물에도 뛰어들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아, 똥은 애들 세계의 공통분모 같은…… 뭐 그런 건가?
하천웅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때 난 정말 감동받았었다. 너만은 내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 내가 어떤 길을 선택하든 너는 함께일 거라고 생각했다.”
야, 진짜 왜 그러는 거냐? 각 잡지 말고 빨리 말해라. 불안하다.
“뭔가 하실 말씀이라도…….”
“너는 아버지가 이번 일을 용서하실 거라고 생각하냐?”
그럴 리가 있겠냐?
그 간단한 임무를 엉망으로 만들었는데.
“전후사정을 잘 말씀드린다면…….”
“아니!”
깜짝이야.
느닷없이 소리를 버럭 내지른 하천웅이 적비연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는 절대 아버지가 날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너도 실은 알고 있을 거다. 이번 실수는 너무 커.”
아주 바보는 아니었구나.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무슨 결심을……?”
“잘 들어라, 운귀.”
“예.”
“이건 내 일생일대의 결심이다.”
“예.”
“튀자.”
“예. 뭐? 예?”
멍한 적비연에게 하천웅이 얼른 설명했다.
“이대로 집에 돌아가면 아버지한테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 그냥 이대로 가출하자. 차라리 가문 따위는 잊어버리고 새로 시작하자! 나는 너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래, 지금이라면 전장에서 전표를 찾을 수도 있다. 그 돈으로 어디 한적한 곳에 무관이라도 차리면 돈깨나 벌지 않겠느냐?”
하! 이, 뭐, 병…….
이거 생각보다 완전 또라이네.
튀긴 어딜 튀어?
네가 튄다고 내가 따라가겠냐?
무슨 사랑의 도피도 아니고.
적비연이 관자놀이를 꾹 누르고는 말했다.
“주군, 그래도 돌아가셔야 합니다.”
“싫어! 안 돌아가! 나는 이대로 다른 길을 가겠다! 운귀! 너도 나를 따라……!”
“본가에서 추격조를 보내면 그땐 정말 죽습니다.”
“그런 놈들은 네가 처리하면 되잖아!”
“저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천웅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마침내 그가 풀 죽은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하아…… 그럴까……? 역시 말도 안 되는 소린가?”
당연하지, 이 미친놈아.
하, 진짜 살다 살다 이런 개망나니를 다 보다니.
진짜 이 정도일 줄은 몰랐건만.
하천웅이 머리를 감싸 쥐며 중얼거렸다.
“그래, 어느 쪽이든 난 망하겠지. 그렇다면 일단 부딪쳐 보는 수밖에.”
하천웅이 울상이 되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쾅!
하불범이 내리친 주먹에 태사의 한쪽 모퉁이가 부서져 나갔다.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만대균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그 간단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해 이 지경으로 만들었단 말이오!”
“죄송합니다. 가주님. 더 잘해보려고 천상단 탈취까지 시도했으나…….”
“그게 더 문제요! 그렇게 끝나서 다행이지! 자칫 제대로 역풍을 맞을 뻔하지 않았소!”
“죄, 죄송합니다.”
만대균이 더욱 깊이 허리를 숙였다.
하불범이 험악한 표정으로 만대균을 노려보다가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도대체 이 망나니 녀석은 왜 안 돌아오는 거야?”
“아버지, 고정하시지요.”
하기룡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불범이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정말이지 막내아들 한 녀석 때문에 수명이 팍팍 줄어든다.
뭐? 천상단 삼등품을 사십오만 냥에 사?
“그런 미친……! 하……!”
거친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걸 간신히 눌러 참았다.
그야말로 만검세가를 세간의 웃음거리로 만든 게 아닌가?
하기룡이 넌지시 말했다.
“아버지, 속은 쓰리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입니다. 괜히 성화를 내시다가 건강을 해치실까 염려됩니다. 웅아가 돌아오면 제가 잘 타일러 보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른 척하시는 게 어떠신지요?”
“끄음…….”
하불범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일리 있는 말이다.
어차피 주워 담을 수도 없는 일 때문에 역정만 내다가 괜히 화병만 도질 터.
차라리 분이 풀릴 때까지 막내 녀석의 낯짝을 보지도 않는 게 나을지도.
“알겠다. 그 녀석 얼굴은 보기도 싫구나! 뒷일은 너에게 맡기마!”
“예, 아버지.”
“나는 이만 들어가마!”
하불범은 만대균을 탐탁찮은 시선으로 노려보고는 몸을 휙 돌려 나갔다.
하기룡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번에는 크게 실수하셨군요, 만 당주님.”
“면목 없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 자세히 듣고 싶군요. 천상단 탈취에 실패했던 경위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운귀가 잠깐 사라졌다고 했던 이야기도.”
하기룡이 만대균을 빤히 보았다.
만대균이 고개를 들어 하기룡과 눈을 마주쳤다.
그의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지금이 지푸라기를 잡을 마지막 기회라고.
무너진 하늘에서 솟아날 구멍이 생길 수도 있다고.
만대균이 입을 열었다.
“그렇잖아도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어 소가주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