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기다려라, 내가 간다
“운귀야.”
“예, 주군.”
“평화롭구나.”
“다행입니다.”
적비연이 무뚝뚝하게 대꾸하고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천웅이 장사의 본가로 돌아온 지 사흘째.
그의 말대로 만검세가는 무척 평화로웠다.
보란 듯이 임무에 실패하고 귀환했지만, 하천웅을 나무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주 하불범은 하천웅을 부르지도 않았고, 임무 실패에 대한 어떠한 추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천웅의 마음까지 평화로운 건 아니었다.
그야말로 가시방석.
하천웅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이건 다행이 아니야! 이럴 리가 없다고. 내가 일을 다 망쳐놨는데 아버지가 이렇게 그냥 넘어가실 리가 없어!”
그걸 왜 나한테 따져, 인간아.
적비연이 속내를 숨긴 채 대꾸했다.
“진 총관님 일로 걱정이 많으신 건 아닐까요?”
그럴싸한 이유였다.
얼마 전 총관 진서국의 후처가 늦둥이를 낳았는데, 아기가 허약해서 탈이 많았다.
하지만 하천웅은 자기 아버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어. 아버지가 남의 자식까지 신경 쓰실 분은 아니지. 점점 불안한걸. 왜 아버지가 날 안 부르시는 걸까? 설마 아예 포기하신 건가?”
그야 당연한 것 아닌가?
네가 내 자식이었으면 진작 호적을 팠을 거다.
하지만 입에서는 다른 대답이 나왔다.
“자식을 포기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 그럴까? 그렇다면 왜 이렇게 조용한 거지?”
“직접 찾아뵙는 것은 어떻습니까?”
아닌 게 아니라 적비연도 이렇게 허송세월을 보내는 것이 답답하긴 했다.
하불범이 무슨 생각으로 하천웅을 내버려 두는지도 궁금했다.
이번 일에 대한 수습을 소가주에게 위임했다는 말도 들려오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기룡이 찾아오는 것도 아니고.’
정말이지 한가하고 평화로운 나날만 이어지고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차라리 불러서 호되게 야단치고 근신 처분이나 내렸으면 좋겠건만.
그럼 호신위 역할을 하는 적비연에게도 일정 기간 무급 휴가가 주어질 가능성도 있으니.
‘그렇게만 되면 은 원주에게 맡겼던 비서도 한 번 읽어볼 시간이 되겠는데.’
하지만 하천웅은 아버지를 직접 찾아갈 만한 배짱이 없었다.
“그건 안 돼. 어쩌면 시간이 약일지도 모르지. 이대로 아버지가 이번 일을 묻고 넘어가신다면 그것대로 다행이지.”
그럴 리가 있겠냐? 널 묻으면 모를까?
그때 밖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자님, 계십니까?”
“누구냐?”
“소가주님을 모시는 ‘죽(竹)’입니다.”
“죽?”
하천웅이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적비연을 돌아보았다.
적비연도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죽’은 하기룡의 직속 수하였는데, 사군자(四君子)라고 부르는 네 명의 별동대 중 한 명이었다.
하천웅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들어와라.”
문이 열리고 시커먼 복색을 갖춘 죽이 뚜벅뚜벅 걸어와 포권했다.
“죽, 공자님을 뵙습니다.”
“무슨 일이냐?”
“소가주님께서 공자님과 운귀를 찾습니다.”
“형님이?”
“이번 무한에서 있었던 일로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십니다.”
하천웅이 미간을 구겼다.
‘칫, 이제 와서 책임 추궁인가?’
소문은 들었다.
아버지가 이번 사건의 뒷수습을 형님에게 떠넘겼다는 것을.
하지만 막상 하기룡이 자신을 오라 가라 하는 상황이 닥치자 영 내키지 않았다.
“형님은 어디에 계시느냐?”
“어렸을 적 종종 수련하던 그 숲에서 기다리겠노라 하셨습니다.”
하천웅은 그곳이 어딘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오래전 하기룡은 잠깐이나마 하천웅에게 무공을 전수해 준 적이 있었다.
그때 정말 개같이 굴렸더랬지.
다시 그때를 떠올리니 이가 갈린다.
사실 말이 좋아 무공 전수지, 누가 보면 일방적으로 괴롭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수준이었다.
이제 와서 자신을 그런 곳으로 부른 것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해서 상하관계를 분명히 하겠다는 속셈이 아니겠나?
정말 마음에 안 든다.
“지금은 바쁘다. 나중에 처소로 찾아가겠다고 전해라.”
하지만 죽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대나무가 그 자리에 박힌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천웅이 이맛살을 팍 구겼다.
“내 말이 안 들리느냐?”
“이미 소가주님께서는 그 숲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가시지요.”
“이 새끼가…….”
하천웅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죽은 여전히 꼿꼿하게 선 채로 하천웅의 두 눈을 응시했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상황.
적비연이 슬며시 나섰다.
“주군, 우선 소가주님을 뵈러 가지요.”
일단 무슨 말을 할지 나도 궁금하니까.
하천웅이 할 수 없다는 듯 혀를 차고는 씹어뱉듯 말했다.
“쳇, 앞장서라. 지금 가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죽이 희미한 미소까지 머금은 채 돌아섰다.
하천웅이 죽의 뒤통수를 노려보면서 내심 이를 갈았다.
‘형님만 믿고 까부는구나. 언젠간 내 네놈을 곤죽으로 만들어 버리마.’
그렇게 세 사람이 처소에서 나와 외원으로 나가려고 할 때였다.
시종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와 하천웅에게 말했다.
“공자님, 가주님이 부르십니다.”
“아버지가?”
“예.”
“지금은 형님이 불러서 나가는 길인데…….”
“잠깐 들렀다가 가시랍니다.”
시종의 말에 하천웅이 입매를 비틀고는 죽을 돌아보았다.
“……라고 하셨다는데?”
죽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대꾸했다.
“그럼 다녀오시지요. 저는 운귀와 먼저 소가주께 가 있겠습니다.”
“아니, 운귀도 나와 함께 간다.”
하천웅의 대꾸에 이번에는 시종이 눈치를 살피다가 넌지시 나섰다.
“아니요. 가주님은 공자님 혼자 오라고 하셨습니다.”
“나 혼자? 운귀 없이?”
하천웅이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반문하자, 시종이 연신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흐음. 진짜 뒈지게 패려고 그러시나?”
하천웅이 조금 걱정되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분명 ‘잠깐 들렀다가 가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뭔가 이상하다.
적비연도 눈을 가늘게 뜨고는 죽을 바라보았다.
죽은 시종일관 무표정했다.
생각을 전혀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뭔가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는데…….’
하지만 가주의 명이라니 거역할 수도 없는 상황.
“알았다. 그럼 운귀는 가서 형님께 내 사정을 전해라. 곧 뒤따라가마.”
“알겠습니다, 주군.”
“그럼 잠시 후에 보자.”
하천웅이 손을 들어 보이고는 시종을 따라 걸었다.
그는 죽을 따라 장원을 벗어나는 적비연을 힐끔거리고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이제 와서 부르시다니. 무슨 말씀을 하실까?’
아니,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정말 초주검이 되도록 두드려 맞을 수도 있다.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쉬던 하천웅이 문득 주변을 둘러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로 가는 것이냐? 여긴 가주전이 아닌데?”
“가주님께서는 연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연무실? 아…….”
곧 납득했다는 듯 하천웅이 입을 다물었다.
틀림없다.
연무실에서 자신을 개 패듯 두드려 패려고 그러시는 걸 테다.
우울하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가 된 기분이랄까?
하천웅이 바닥만 보며 걷다가 연무실로 막 들어섰을 때였다.
철커덕! 철커덕! 철커덕……!
사방의 문이 연이어 닫히면서 연무실이 깜깜해지는 게 아닌가?
깜짝 놀란 하천웅이 얼른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예 불도 꺼놓고 실컷 두드려 패려고 그러시나?
한데,
샤샤샥!
주변으로 무인 스무 명이 내려섰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자.
서리라도 맞은 듯 온통 하얗게 빛나는 은발의 사내.
“너는…… 국(菊)?”
하기룡을 모시는 사군자 중 ‘국’이었다.
국이 특유의 한기를 풀풀 풍기며 고개를 숙였다.
“무례를 사과드립니다.”
“이게 뭐냐? 아버지는?”
“가주님은 이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냉담한 표정으로 대꾸하는 국.
그제야 하천웅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져 갔다.
뭔가 이상하다 싶었더니…….
이게 다 형님이 꾸민 짓이란 말인가?
무엇 때문에?
하천웅이 버럭 소리쳤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이냐? 설마 형님이 운귀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모릅니다. 다만 일이 끝날 때까지 공자님을 이곳에 모셔두라는 명을 받았을 뿐입니다.”
“이익……! 감히 아버지의 허락도 없이…….”
“이미 가주님께서는 이번 사태의 수습을 소공자님께 완전히 위임하셨습니다.”
“듣기 싫다! 나는 형님을 만나러 가야겠다!”
하천웅이 휙 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순간,
샤샤샥!
무인들이 일제히 움직이더니 앞을 막아서는 것이 아닌가?
하천웅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것들이……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러는가!”
“죄송합니다, 저희는 소가주님의 명을 따를 뿐입니다.”
“네 이놈! 썩 비키지 못할까!”
차앙!
하천웅이 검을 뽑아 들자 무인들이 멈칫거리고는 국의 눈치를 살폈다.
국이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자, 무인들 역시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차차앙!
“이런 미친 것들을 보았나? 감히 내게 칼을 들이밀어?”
흥분한 하천웅과 달리 국은 시종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답했다.
“죄송합니다, 공자님. 부디 얌전히 계셔주십시오.”
“뭐라……? 네놈이 감히 나를……!”
하천웅은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아무리 형님의 수하들이라지만, 만검세가 이 공자인 자신에게 이렇게도 무례할 수 있단 말인가?
‘크읍……! 제기랄! 또 기혈이 뒤엉키고 있어!’
하천웅이 심호흡을 하고는 날뛰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자칫 또 흥분했다가는 내력이 폭발해서 낭패를 당할 수도 있는 상황.
하천웅이 차가운 눈길로 스무 명의 무인들을 훑고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지막 경고다. 비켜라. 그렇지 않으면 힘으로라도 뚫겠다.”
“죄송합니다. 얌전히 계시지 않겠다면 저희들로서도 힘으로 맞설 수밖에 없다는 점 이해해 주시길.”
차갑게 말한 국이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그가 슬쩍 기를 운용하자 검신에서부터 서리가 하얗게 내려앉았다.
하천웅이 어금니를 빠득 갈았다.
‘예전부터 형님은 운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만약 이번 일의 책임을 운귀에게 묻는다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차라리 내가 아버지를 직접 찾아뵙고 말씀을 드리는 게 나을 뻔했어!’
생각을 마친 하천웅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네놈들은 실수한 거다.”
“저희들이 부디 실수하지 않도록 도와주시……!”
파앗!
국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하천웅의 신형이 빛살처럼 날아갔다.
* * *
적비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훑어보았다.
기다란 창을 들고 있는 죽, 허벅지까지 길게 찢어진 치마를 입고 육감적인 몸매를 드러낸 매(梅), 걸어 다니는 시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초췌하고 음산해 보이는 난(蘭).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예순 명의 무인들이 날카로운 기도를 드러내고 있다.
적비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많이도 끌어모았군. 역시 이럴 속셈이었나?”
적비연을 숲까지 안내한 죽이 딱딱한 음성으로 말했다.
“네가 자초한 일이다.”
“무엇을?”
“네놈이 본가를 배신했다는 건 이미 다 알고 있다.”
적비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곧 알게 되겠지!”
타다앗!
순간 매, 난, 죽 세 사람이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적비연이 싸늘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칫, 눈치는 빨라가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