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기다려라, 내가 간다
끼라라랑!
고막을 찢어발길 듯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면서 눈앞에서 시퍼런 칼날이 불꽃을 터뜨리며 지나간다.
아슬아슬하게 칼날을 피한 적비연이 상체를 활처럼 젖히자 무인 하나가 그대로 이마를 찍어왔다.
“죽어랏!”
찰나, 적비연이 팽이처럼 회전하면서 무인의 검을 튕겨내고는 곧장 다리를 베었다.
촤악!
“크아악!”
순식간에 다리를 잃은 무인이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하지만 안심할 틈은 없다.
사방에서 날카로운 검기가 폭주한다.
‘성가시군!’
어금니를 뿌득 간 적비연이 내공을 끌어올리면서 천검파랑(千劍波浪) 초식을 펼쳤다.
쉭쉭쉭쉭!
따다당! 푹푹!
“크아악!”
“아악!”
팔방에서 달려들던 무인들이 저마다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진다.
몇몇 무인들은 간신히 검격을 막아내며 튕겨 나간다.
마치 천 개의 검이 사방으로 물결처럼 퍼져 나가는 모양을 그린다 하여 이름 붙은 천검파랑.
만검세가의 초식 중에서도 절정 중단을 넘어야만 사용할 수 있는 절초!
순식간에 십여 명이 천검파랑에 쓰러지자 매, 난, 죽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세 사람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은 후 곧장 적비연에게 날아들었다.
이 정도면 어느 정도 힘은 빼놓았을 터.
쉴 틈은 주지 않는다.
가장 먼저 적비연에게 다다른 사람은 매였다.
“하앗!”
그녀가 기합성을 터뜨리면서 곧장 연검을 후려쳐 왔다.
휘리리리링!
한 자루의 연검에서 검기로 이루어진 열 마리의 뱀이 파생되며 쏘아져 왔다.
따다당!
한차례 휘두른 검에서 세 번이나 금속성이 터져 나온다.
그리고 네 번째는,
휘리리링!
꽃향기를 뿜어내며 은빛 비늘을 가진 뱀이 검신을 휘어 감아온다.
이대로는 손등이 찍히고 만다!
적비연이 얼른 검을 놓고서는 몸을 비틀며 발을 내질렀다.
적비연의 발끝에서 응축된 기가 폭발했다.
파앙!
“끄윽!”
복부를 얻어맞은 매가 그대로 신음을 터뜨리며 붕 날아갔다.
휙!
적비연이 얼른 몸을 날려 허공에 떠오른 검을 낚아챘다.
그러는 사이 죽이 기다란 창을 허공으로 내질러 왔다.
창기(槍氣)를 가득 머금은 창봉이 그대로 적비연의 명치를 뚫을 태세다.
허공에서는 피할 수 없는 단점이 있다.
‘치잇, 어쩔 수 없나?’
적비연이 그 상태에서 검을 내지르며 기를 격발했다.
번쩍!
일순, 빛이 터지는가 싶더니,
짜르르르릉! 꽈앙!
창봉과 검신이 부딪치면서 천둥벽력이 울렸다.
낙뢰휘검(落雷輝劍)!
벽력적가의 절초.
그 위력이 어찌나 대단한지 허공으로 창을 거머쥐고 있던 죽의 양소매가 기파를 못 이겨 터져 나갔다.
파파파!
“크읏!”
옷자락이 찢어져 양어깨까지 훤히 드러낸 죽이 순식간에 거리를 두며 물러났다.
그와 동시에 바닥에 착지한 적비연은 곧장 허리를 젖혔다.
쒸잉!
간발의 차로 비수 하나가 가슴 앞섶을 베며 지나친다.
풀럭!
경장 상의가 풀어지면서 흩날릴 때 두 번째, 세 번째 비수가 날아든다.
왼쪽 대각선으로 베고 오른쪽은 횡으로!
따다앙!
두 자루의 비수가 튕겨 나갔지만, 마지막 한 자루가 남았다.
쉬이이익!
‘치잇!’
혀를 차며 최대한 몸을 비틀었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피하지 못했다.
피츄웃!
비수가 적비연의 가슴을 길게 베면서 지나치더니 저만치 나무 기둥에 처박힌다.
촤아악!
적비연의 오른발이 반원을 그리면서 멈춰 섰다.
먼지가 풀썩 일어나면서 안개처럼 흩어졌다.
“훅, 훅, 훅……!”
거칠게 내쉬는 숨.
하나 쉴 틈은 없다.
비쩍 마른 난이 비수를 녹색 혀로 핥으면서 수신호를 내리자 사십여 명의 무인들이 일제히 날아오른다.
주르륵.
길게 베어진 가슴팍에서 선혈이 흘렀다.
상처가 깊진 않다.
하지만 독이 묻은 비수였다.
난의 혀가 녹색인 이유도 독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이다.
미리 피독주를 복용했다.
심영장에 갔을 때만 해도 이럴 줄 알고 산 건 아니지만.
생각보다 빨리 써먹어서 아깝기도 하지만.
‘결국 이럴 때 쓰라고 산 거니까!’
적비연이 이를 꽉 다물고는 양쪽으로 주먹을 내질렀다.
파파앙!
그가 순간적으로 기를 격발하자 손목에 착용한 십전도비에서 스무 개의 비수가 사방으로 발사됐다.
슈슈슈슈슈슈슉……!
푸푸푸푸푹……!
타타타타탕……! 따당!
스무 개 중 대략 절반은 적을 베었고, 나머지 절반 정도는 튕겨 나갔다.
하지만 그 튕겨 나가는 비수에 맞아 쓰러지는 자들도 있었다.
곧이어 적비연이 몸을 돌개바람처럼 회전하며 검을 사방으로 내질렀다.
이 역시 벽력적가의 절초인 선풍뇌검!
짜르르르릉 꽈자앙!
빛살처럼 뿜어져 나가는 검격과 함께 사방으로 벽력이 내리치면서 뇌전이 흘러간다.
따다다당!
“크악!”
피를 뿜으며 쓰러지는 자들, 검을 막았지만 감전이라도 된 듯 경련을 일으키는 자들, 비틀거리며 간신히 멈춘 자들로 아수라장이다.
밀물처럼 정신없이 들이닥치던 무인들도 이번 공격으로 당황했는지 주춤거렸다.
쾅!
국이 창대로 바닥을 찍더니 씹어 먹을 듯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본가의 검술에 벽력적가의 독문무공까지. 아주 물 만난 고기가 따로 없구나. 그러고도 네놈이 배신자가 아니라고?”
이젠 빼도 박도 못하게 생겼다.
죽일 듯이 달려들기에 본능적으로 본가의 절초를 사용해 버렸으니.
하긴, 어차피 이놈들은 아예 처음부터 배신자라는 못을 박고 있었다.
어떻게 눈치챈 걸까?
역시 무한에서 만대균이 눈치를 챈 것일까?
아니, 어쩌면 그전에 이미 하기룡이 눈치를 챈 것인지도 모른다.
하천웅과 비무를 치른 후 하기룡이 의심하는 눈빛을 보이지 않았던가?
환라육천골과 인피면구 덕분에 편해진 건 사실이지만, 이래저래 좀 더 조심했어야 했다.
지금은 공력도 많이 소진해 버린 상황.
뭐, 어쨌거나 지금으로서는 엎질러진 물.
이왕 이렇게 된 거라면…….
“벽력적가 적비연 가주님 만세!”
“……!”
느닷없는 외침에 매, 난, 죽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찰나,
튀자!
적비연이 최대한의 경공술을 펼치며 달리기 시작했다.
“놓치지 마라!”
“배신자! 서라!”
그래도 호신위로 지냈기 때문인지 경공 하나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문제라면 공력이 거의 바닥나고 있다는 점.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일각이 채 지나지도 않아서 저만치 깎아지른 듯 치솟은 암벽이 나타났다.
촤아아악!
적비연이 급하게 멈춰 서자 뿌연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착! 차차착!
뒤를 쫓은 매, 난, 죽이 속속 도착했고, 다른 십여 명의 수하들도 주변에 내려섰다.
난이 녹색 혀로 비수를 핥으며 키들거렸다.
“딱하게도.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어서 어쩌지?”
심호흡을 한 적비연이 피식 웃었다.
“넌 왜 날을 핥고 지랄이냐?”
“뭐……?”
“사파 새끼도 아니고. 정파 놈이면 정파답게 행동해야지.”
뭐, 사파 무공도 쓰는 내가 할 소리는 아니지만.
일단은 적을 자극하기 위한 격장지계(激將之計)라고나 할까?
하지만 별로 소용은 없었나 보다.
“시답잖은 소리를 하는 걸 보니 무섭긴 무서운가 보구나.”
“그럴 리가. 난 도망친 게 아니라 일부러 이곳에 온 거거든.”
이건 사실이다.
등 뒤에 적을 두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이곳으로 달려왔다.
어차피 공력이 바닥난 상황에서 더 달아나기도 어려울 테니.
난이 한쪽 눈을 치떴다.
“호오, 그 몸으로 우리를 상대할 수 있단 건가?”
“뭐, 지금까지도 잘 싸워서 꽤 많이 줄여놨잖아. 나름 대비책도 있고.”
말을 마친 적비연이 소매에서 공보단을 꺼내 입에 털어 넣었다.
즉시 단전이 뜨끈해지면서 공력이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이거 효과가 꽤 좋네.’
한데 난이 히죽 웃으며 뜻밖의 말을 꺼냈다.
“네놈 말대로 많이 줄여놨을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전부는 아니지.”
“음……?”
다음 순간 숲에서 시커먼 그림자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무려 백여 명.
그리고 철검당주 만대균까지.
만대균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짐작은 했지만 집적 확인하니 놀랍군. 운귀, 지금껏 실력까지 감추고 있었던 건가?”
“역시 당신이었나?”
“이 공자님을 호위하느라 바빴을 텐데 언제 벽력적가의 무공까지 섭렵한 거지?”
“뭐 상상에 맡기지.”
그러자 숲 한쪽에서 다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상상을 해봤지만 좀처럼 상상이 안 돼서 말일세.”
차분한 어조로 말한 사람은 하기룡이었다.
물론 그 뒤로도 수십 명에 달하는 수하들이 있었다.
젠장, 이러면 좀 곤란한데?
* * *
“헉, 헉, 헉……!”
하천웅이 연신 어깨를 들먹였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으면서도 끝내 쓰러지지 않았다.
그를 바라보는 국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서렸다.
‘앞뒤 분간 못하는 망아지인 줄만 알았더니. 그래도 범 새끼라는 건가?’
그의 시선이 바닥에 널브러진 스무 명의 수하들에게 향했다.
‘아무리 가검(假劍)을 썼다지만……’
이렇게 속수무책 당할 줄은 몰랐다.
가검을 쓴 이유는 그래도 이 공자를 상대로 진검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맥을 못 추릴 줄이야.
게다가 하천웅은 싸움 도중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지 않았던가?
그래도 하천웅은 여기까지다.
자신을 넘어설 순 없을 테니.
휘오오오오.
국이 한기를 풀풀 휘날리면서 하천웅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공자님, 그만하시지요. 이미 기력을 많이 소진하셨습니다.”
“헉…… 헉…… 웃기…… 지…… 마라. 내가…… 네놈을…… 못 이길 것…… 같으냐!”
파앗!
순간 하천웅이 질풍처럼 달려들었다.
‘어리석은……!’
국이 얼른 검을 휘둘러 하천웅의 일검을 막아냈다.
쩌엉!
“크읏!”
지독한 한기와 함께 팔 전체가 떨려오자 하천웅이 미간을 팍 찡그렸다.
그가 그대로 회전하면서 검을 횡으로 후렸다.
따앙!
국이 검을 거꾸로 돌려세우며 다시 막아냈다.
휘청!
하천웅이 중심을 잃은 찰나, 국이 발을 뻗어냈다.
펑!
“크으읏!”
타다닷, 촤아앗!
뒤로 물러나던 하천웅이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내상을 조금 입은 탓인지 입김에서 하얀 김이 새어나왔다.
“이런 제기랄!”
하천웅이 욕지거리를 뱉는 순간,
불룩!
단전이 부풀어 올랐다.
제길, 또……!
위기를 감지한 하천웅이 웃음을 터뜨리며 재차 달려갔다.
“크하하하하!”
앙천광소와 함께 뻗어내는 천검합일(千劍合一)!
마치 천 개의 검을 합쳐 하나의 힘으로 쏟아낸다 하여 붙여진 초식명이다.
쩌엉!
하지만 이번에도 하천웅의 공격은 막혔다.
“하하하!”
미친놈처럼 웃어댔지만 속은 바글바글 끓어올랐다.
‘제길! 어째서! 어째서…… 이놈은……!’
따당! 땅!
끼라라라랑!
두 자루의 검이 수십, 수백 자루처럼 보일 정도로 현란한 검식이 오갔다.
하지만 마찰에 의한 불꽃이 터질 때마다 하천웅의 마음에도 열불이 터졌다.
‘제기랄! 왜! 왜 안 통하는 거냐! 왜! 시간이 없는데……!’
까앙!
마침내 국이 하천웅의 검을 튕겨내고는 주먹을 내질렀다.
차마 이 공자에게 검을 들이밀 수는 없기에.
그런데,
쉬잇, 파바박!
하천웅이 순식간에 금나술을 펼치면서 손목을 휘어 감는 게 아닌가?
국의 팔을 꺾거나 부러뜨리지는 못했지만, 확실히 붙든 하천웅이 악에 받쳐 외쳤다.
“네놈은 절대! 나를 막지 못한다!”
그 순간 뒤엉켰던 공력이 폭발했다.
꽈아앙!
그 폭발이 어찌나 거센지 신체 밖까지 강렬한 기파가 터져 나왔다.
“아악!”
“커억!”
순간 두 사람이 비명을 내지르며 반대 방향으로 튕겨 나갔다.
한 시진이 넘게 치열한 격투가 벌어졌던 연무실에 마침내 적막이 내려앉았다.
잠시 후, 하천웅이 비척거리며 일어났다.
옷이 터져 나가고,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하천웅이 비틀거리며 걸었다.
“네놈들은…… 날 막지…… 못한다……!”
끼이이익……!
그가 문을 열고 걸음을 내디뎠다.
기다려라, 운귀. 내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