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기다려라, 내가 간다
“꺼억……!”
심장에 단검이 꽂힌 무인이 입을 쩍 벌리고 신음을 흘렸다.
츄악!
적비연이 단검을 뽑아내자, 무인이 그 자리에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노옴!”
“죽어랏!”
좌우에서 무인 두 명이 일갈을 터뜨리며 달려왔다.
그들의 눈동자에 분노가 서렸다.
죽은 자의 동료라도 되는 걸까?
알 바 없다.
당장 자신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적이다.
그렇다면 죽기 전에 먼저 죽인다.
이제 적비연은 거의 본능에 맡긴 움직임이었다.
몸을 낮게 숙이고 그대로 오른손에 든 장검을 휘둘렀다.
쉬컥!
“크아악!”
발목이 잘려 나간 무인이 그대로 넘어지려는데, 적비연이 그의 가슴을 발로 차며 반동을 이용해 좌측 무인에게 날아갔다.
쉬잇, 푹!
왼손을 떠난 단검이 그대로 좌측 무인의 목을 꿰뚫었다.
“컥!”
울컥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순간, 적비연이 그의 목에서 단검을 뽑아냈다.
츄아아아아!
피가 분수처럼 터진다.
비산하는 핏방울 사이로 분기탱천하여 달려드는 적이 셋이나 보인다.
정말이지 숨 돌릴 틈도 없이 몰아붙이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별문제도 아니다.
절정 구 단을 앞둔 자신이 아닌가?
“하아앗!”
기합성을 터뜨리며 오른손으로 난살십검(亂殺十劍)을 펼쳤다.
강동칠괴의 무공이다.
사특한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나가자, 달려들던 무인들이 흠칫거렸다.
하지만 그들은 미처 눈치 채지 못했다.
그 잠시의 틈으로 인해 목숨을 잃게 된다는 것을.
쉬이잇, 쉬이익!
한 줄기 검광이 스치자 두 명의 무인들이 저마다 목을 부여잡고 픽픽 쓰러졌다.
목이 절반이나 찢어져 나간 그들은 현장에서 즉사했다.
적비연은 나머지 한 명을 향해 몸을 날렸다.
“헙!”
깜짝 놀란 무인이 눈을 부릅뜨는 순간,
푹! 푹! 푹!
적비연이 단검으로 연이어 아랫배, 가슴, 목의 요혈을 찔렀다.
마지막 목을 찌르는 순간에는 이미 상대가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찌른 이유는 방패로 삼기 위함이다.
촤촤촤악!
적비연이 상대의 목을 찌른 채 밀어붙이자, 무인 뒤쪽에서 연이어 검격을 펼쳐오던 적들이 그대로 죽어가는 무인의 등을 베었다.
츄아아아!
무인의 등에 새겨진 검상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털썩, 쿵!
적과 아군에게 전신을 찔리고 난자당한 무인은 그렇게 뜬눈으로 숨을 거두었다.
하지만 적비연은 조금의 성취감도 느끼지 못했다.
차라리 부러울 지경이군.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아직도 수십 명의 무인들이 남아 있다.
필살의 각오로 덤벼드는 자들을 상대하려니 보통 힘든 게 아니다.
쉭쉭쉭쉭!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귓가를 스친다.
따다당!
재빨리 몸을 뒤틀며 검을 휘둘렀다.
난이 쏘아낸 세 자루의 비수가 검신에 막혀 튕겨 나갔지만 마지막 한 자루를 미처 막지 못했다.
푹!
“크읍!”
왼쪽 어깨에 깊숙이 박힌 비수 때문에 손끝마저 덜덜 떨려온다.
적비연은 단검을 놓치지 않기 위해 손에 힘을 꽉 실었다.
찰나지간,
“역시 네놈이었구나!”
노호성과 함께 만대균이 몸을 날려 왔다.
순식간에 코앞에 다다른 만대균이 장검을 직선으로 내질러 온다.
만검합일(萬劍合一) 초식.
천검합일보다도 그 위력이 두 배 이상 뛰어난 만검세가만의 독문절초!
초절정 이상의 경지에 오른 자만이 제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절초 중의 절초다.
‘제길……!’
그 기세만으로도 적비연은 만만치 않다고 판단하고는 검을 거꾸로 세우며 날에 손을 대고 두 손으로 막았다.
순간,
쩌어어어엉!
“크읏!”
검봉을 막은 적비연이 뒤로 주르륵 밀려난다.
그럼에도 만대균은 조금의 물러섬도 없이 오히려 내공을 더욱 격발한다.
꽈앙!
한 번 더 검봉에서 강기가 폭발하자, 적비연은 옷자락이 완전히 터져 나가면서 튕기듯 날아갔다.
촤촤아악!
두 발이 미끄러지면서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비수가 박힌 왼쪽 어깨가 욱신거린다.
비수에 묻은 독이 위력을 발하는 것인지 차츰 왼팔이 굳어가고 있다.
피독주를 복용했지만 장기간 싸움으로 인해 그 효력이 떨어진 탓이다.
그만큼 기력도 쇠한 상태니 당연한 현상이다.
“훅, 훅, 훅……!”
왼팔을 축 늘어뜨린 적비연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 적비연이 든 장검에 균열이 쩌억 가기 시작했다.
“이런…….”
순간 검신이 산산조각 나면서 가루처럼 폭삭 부서졌다.
적비연은 허망한 눈길로 손잡이만 보다가 휙 집어 던졌다.
만대균이 희미하게 웃었다.
“과연 대단하군. 그 공격을 막아낼 줄이야. 이제야 그날의 싸움이 조금 이해가 되는구나.”
무한에서 싸웠던 걸 두고 하는 말이리라.
분명 무한에서 그날 밤에 싸울 때도 지금과 비슷했다.
정공과 사공을 마구 섞으면서 싸우지 않았던가?
그때나 지금이나 수박 겉핥기식으로 흉내 내는 건 분명 아니다.
모든 초식 하나하나가 마치 몸에 밴 듯 자연스럽다.
만대균이 흥미롭다는 듯 적비연을 보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지?”
적비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내가 너무 뛰어나서라고 해두지.”
“곧 죽어도 세 치 혀는 함부로 놀리는구나.”
“세 치밖에 안 되는 것 좀 놀리면 어떤가?”
적비연이 한마디도 지지 않자, 만대균이 미간을 구겼다.
그때 무인들 사이에서 하기룡이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연회가 열렸던 날, 적가장에서 웅아와 대련했던 건 혹시 자네였나?”
“그건 벽력적가주였지.”
거짓말은 아니다.
내가 가주니까.
하지만 하기룡에게는 운귀로 보인다는 게 좀 문제지.
하기룡이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한 듯 눈살을 찌푸리고는 질문을 이었다.
“마지막으로 묻지.”
“더 많이 물어도 된다.”
그러면서 좀 쉬자, 나도.
하기룡이 운귀를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왜 본가를 배신했나?”
적비연이 잠깐 생각하다가 대꾸했다.
“구질구질했거든.”
“구질구질하다?”
“그래. 네놈들 가문이 더럽고 치사하고 짜증 났단 말이지.”
“죽을 때가 된 걸 아는 모양이구나. 주둥이가 가벼운 걸 보니.”
말을 마친 하기룡이 만대균에게 눈짓을 보냈다.
만대균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기수식을 취했다.
그의 전신에서 압도적인 기운이 솟아오르면서 장삼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쳇, 긴장되네.
적비연은 천천히 단검을 오른손으로 옮겨 쥐고는 심호흡을 했다.
찰나,
파앙!
응축된 기가 폭발하면서 만대균의 신형이 화살처럼 쏘아졌다.
쒸에에엑! 쩌어엉!
만대균의 장검과 적비연의 단검이 부딪치면서 금속성이 울렸다.
까차앙!
단검의 검신이 이번에도 산산조각 부서지고 말았다.
“크읏!”
과연 초절정의 경지는 달랐다.
그가 작심을 하고 일격을 가하니 온몸이 가루가 되어 부서지는 것만 같다.
지금껏 수많은 무인들과 싸우면서 기력이 소진된 탓도 있으리라.
“하앗!”
만대균이 기합성을 터뜨리며 다시 검을 휘둘렀다.
적비연도 동시에 내공을 끌어올리고는 맞섰다.
수라철괴(修羅鐵怪)!
강동칠괴의 호신무공이다.
온몸을 철처럼 단단하게 만들어주지만 공력 소모가 극심하다.
거의 모든 공력을 끌어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
꽈앙!
후아아아앙!
두 기운이 부딪치면서 폭음이 들렸다.
동시에 사방으로 기파가 돌풍처럼 번져 나갔다.
둘러싸고 있던 무인들이 그 기풍을 이기지 못해 주춤 물러나며 저마다 공력을 끌어올렸다.
만대균의 검을 단검 손잡이로 간신히 막아낸 적비연.
“쿨럭!”
순간 기침과 함께 피를 토했다.
내상을 입은 탓이다.
온몸이 후들후들 떨린다.
만대균의 두 눈동자가 떨렸다.
‘어째서 이런……!’
지금도 사공을 사용했다.
한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내공만큼은 자신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대단하지 않은가?
도대체 운귀가 어느 틈에 이 정도 수준까지 올랐단 말인가?
초절정인 자신을 이렇게까지 막아내다니!
“그간 호랑이 새끼를…… 가내에 들여놨었구나.”
만대균이 씹어뱉듯 말하자, 적비연이 히죽 웃었다.
“말했잖아? 내가 좀 잘났다고.”
“하지만 그 잘난 척도 이제 끝이다.”
“아직은 끝난 게 아니지.”
그 순간 적비연의 등 뒤에서 섬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끝이다.”
적비연이 흠칫거리고 돌아서려는 찰나,
푸욱!
“커억!”
가슴을 뚫고 검이 튀어나왔다.
그때,
“안 돼!”
벼락같은 외침에 모두가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도착한 것인지 만신창이가 된 하천웅이 숨을 헐떡이며 소리치고 있었다.
“운귀! 운귀!”
그가 달려오려고 하자,
사사삭!
다른 무인들이 그 앞을 막아섰다.
“썩 비키지 못하겠느냐! 만 당주! 이게 무슨 짓이오! 형님! 도대체 뭡니까? 감히 누구 허락으로……. 크읍!”
광분하여 소리치던 하천웅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제장! 또 공력이……!
이제 단전뿐만 아니라 임독양맥과 기경팔맥의 모든 기혈이 제멋대로 펄떡이고 있었다.
한편 적비연은 희미해져 가는 의식을 부여잡으며 씨익 웃었다.
“니미럴…… 조금은 감동이잖아.”
물론 너무 작은 목소리였기에 하천웅이 듣지는 못했다.
쑤욱, 츄아아아!
털썩!
가슴에서 피를 뿜어낸 적비연이 무릎을 꿇었다.
검을 뽑아낸 하기룡이 다시 검을 치켜들었다.
그가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는 순간,
“안 돼! 형님! 멈추십시오! 만 당주! 당장 형님을 멈추게 하시오! 당장!”
하지만 만대균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싸늘한 비소를 머금은 채 대꾸했다.
“그러게 제가 도와드릴 때 사리분별 좀 하시지 그러셨습니까?”
“뭐……? 만 당주! 당신……!”
“이미 늦었습니다.”
“이익! 만 당주, 이 개새끼야! 하기룡! 이 쳐 죽일 놈아! 차라리 날 쳐라! 운귀는 내 호위다! 운귀는……! 네놈들이 무슨 짓을…… 크읍! 젠장…… 크하하하하!”
하천웅이 광기에 찬 웃음을 터뜨리며 눈물을 흘렸다.
적비연이 쓴웃음을 지었다.
저 지경이 되어서도 웃어야 하다니.
생각보다 내가 꽤 심한 짓을 했구나.
뭐, 때려죽이고 싶은 놈이었지만 지금은 운귀 몸에 들어와서 그런지 조금 미안하다는 생각도 든다.
이 육신을 떠나기 전에 한 번쯤은 운귀의 기억으로 그를 대하고 싶다는 생각도.
“주군…….”
“운귀! 그래, 기다려라! 내가 왔다! 내가 널…… 크읍!”
“마지막까지 함께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니다! 내가, 내가 미안하다, 운귀! 이번엔…… 이번엔 내가 널 지키겠다!”
마침 하기룡의 싸늘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어온다.
“웅. 정신 차려라. 이놈은 배신자다. 배신자에게는 죽음만 있을 뿐.”
“안 돼! 하지 마아앗!”
하기룡의 칼날이 사선으로 떨어져 내렸다.
쉬이이익! 슈컥!
세상이 기운다.
마침내 운귀의 머리가 몸에서 떨어져 나와 바닥을 굴렀다.
츄아아아아!
피를 분수처럼 터뜨린 몸이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운귀……!”
하천웅이 눈을 부릅뜨고는 절규했다.
“하기룡, 이 때려죽일 놈아! 네놈을 저주한다! 하기룡! 너를 죽일 거다! 반드시 내 손으로 널……!”
하천웅이 몸을 날려오자,
“안 됩니다! 공자님!”
“고정하십시오!”
무인들이 그 앞을 에워싼다.
“비켜, 이 개새끼들아! 다 죽여 버릴 거야!”
하천웅이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불룩, 불룩, 불룩……!
전신이 울룩불룩 부풀어 오르는 게 아닌가?
다른 사람의 눈에도 몸에 생긴 이상이 보일 정도였다.
“음?”
하기룡이 눈살을 구기고는 하천웅을 보았다.
뭔가 심상찮은 것을 느낀 그가 외쳤다.
“모두 피해라!”
하지만 이미 늦은 상황.
꽈아아아앙!
체내에서 마구 뒤엉킨 기혈이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하천웅을 에워싼 무인들이 저마다 비명을 내지르며 날아갔다.
“크아악!”
“으아악!”
물론 하천웅도 온전하진 못했다.
허공으로 튕기듯 솟아오른 그가 이내 털썩 바닥에 쓰러졌다.
“운귀……!”
저만치 운귀의 머리가 보였다.
하천웅의 눈가가 피눈물로 서서히 젖어갔다.
늦어서……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