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이번 생은 망했어.
‘크흡!’
적비연이 두 눈을 번쩍 떴다.
젠장!
뒷목부터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돋는다.
전신이 오싹하다.
‘목을 베였어! 젠장!’
역시 매번 느끼는 거지만 죽음은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는다.
목이 떨어져 나가는 순간의 충격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느낌이다.
처음 알았다.
머리가 몸에서 떨어져 나와도 한동안은 의식이 남아 있다는 것을.
하긴, 언제 죽어봤어야 알지.
머리만 바닥에 떨어진 채로 세상을 바라보았던 그 끔찍한 순간이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다.
전신에서 식은땀이 좍좍 난다.
그래…… 결국 죽은 거다.
악착같이 버텨봤지만 결국 이기지 못했다.
아직도 힘이 부족하다는 거다.
그렇게 내공을 쌓고 또 쌓아서 각종 무공을 섭렵했는데도 또 죽었다.
오래전 자신이 타고난 천재라고 자만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도대체 뭘 믿고 그렇게 설레발을 쳤을까?
‘후우.’
적비연은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이번엔 또 누구의 몸을 빌려 환생한 걸까?
지금쯤이면 기억이 쏟아져 들어와야 할 텐데…….
‘왜…… 새로운 기억이 없지?’
조금 이상한 것을 느낀 적비연이 천천히 눈을 떴다.
낯선 천장이 보인다.
여긴 어딜까?
고개를 돌려보니 뭔가가 앞을 막고 있는데 부드러운 천으로 덮여 있다.
그러고 보니 바닥은 폭신하고 사방은 부드러운 천으로 감싸여 있다.
순간 관 속인가 싶었지만 천장이 훤히 보이는 걸 보면 그건 아닌 모양이다.
일단 일어나서 주변을 살펴…….
‘음? 뭐야? 왜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거야?’
정말이지 꿈쩍을 할 수가 없다.
얼른 몸을 돌려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끄응!’
겨우 몸이 절반 정도 비틀릴 뿐 엎드리는 것조차 안 된다.
‘뭐야?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설마 식물인간의 몸으로 깨어난 건가?
그래도 지금까지 경험으로 미루어보면 자연 치유되는 게 아니었나?
검상이나 내상처럼 육체에 직접적인 상처가 난 경우에는 회복되는 데 시간이 좀 걸리지만, 고뿔 같은 질병의 경우에는 비교적 회복이 빨랐다.
그런데 이번엔 뭐지?
일단 아무라도 불러야겠다.
적비연이 입을 열고 막 소리치는 순간이었다.
“응애애애애!”
화들짝 놀란 적비연이 입을 다물고는 눈을 멀뚱멀뚱 떴다.
설마……?
다시 적비연이 소리치자,
“응애애애애애!”
자지러질 듯한 아기 울음소리가 목구멍을 따라 토해지는 게 아닌가?
이런 젠장!
진짜 아기의 몸으로 환생했단 말인가?
얼른 손을 들어 보았다.
동글동글 작고 귀여운 손이 꼼지락거리다가,
찰싹!
‘아얏!’
힘 조절이 안 되는 바람에 자기 뺨을 때리고 말았다.
적비연의 표정이 낭패로 젖어들었다.
‘젠장! 이번 환생은 망했잖아!’
하필 아기의 몸으로 들어오다니!
죽는 순간만 해도 자신을 공격했던 무인 중 한 명의 몸으로 깨어날 거라고 생각했다.
가까운 곳에 의식을 잃고 쓰러졌던 무인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혹시 그 빌어먹을 상성 때문인가……?
그럼 여기는 어디지?
도대체 난 누구 몸으로 환생한 거지?
아, 그래서 처음에 떠오른 기억들이 별로 없었구나.
아직 경험이 별로 없는 아기였기에.
그때 갑자기 그늘이 드리워지더니 커다란 얼굴이 적비연을 내려다보았다.
‘으헉, 깜짝이야!’
덩치가 제법 큰 여인이었는데 아무래도 유모인 듯했다.
거인처럼 커다란 얼굴을 가진 그녀가 눈물을 글썽이면서 소리쳤다.
“아이고!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었네! 아기씨가 깨어났어요! 마님, 어서 와보세요! 아기씨가 눈을 떴어요!”
유모가 호들갑을 떨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중 유독 청초하면서도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는데,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내 엄마…… 아니, 이 아기의 엄마군.’
아니나 다를까, 여인은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적비연을 안아 들었다.
하! 내가 여인의 손에 이렇게 가볍게 들리다니.
치욕이다.
하지만 여인은 부루퉁한 아기의 표정을 전혀 개의치 않고는 얼굴을 비벼댔다.
“아아, 내 아기. 깨어나서 정말 다행이야. 엄마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단다.”
이봐! 지금 얼굴이 너무 가깝잖아!
이 여자가 지금 외간 남자에게 무슨 짓을……!
부비부비. 부비부비.
“응애애애! 응애응애애!”
적비연의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 귀여운 울음이 되어 다시 터졌다.
아, 환장하겠네. 말을 못하니까 돌아버리겠어!
그러거나 말거나 옆에 선 유모가 눈가를 촉촉이 적시며 말했다.
“정말 다행이에요. 이대로 아기씨가 깨지 못할까 봐 걱정이었는데. 이렇게 울음소리가 우렁찬 걸 보면 앞으로 건강하게 클 것만 같아요.”
“그러게. 하늘이 도우셨나 봐.”
여인이 부드럽게 웃으며 아기가 된 적비연의 뺨에 입을 맞췄다.
헛, 이 여자가 진짜……!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 여인에게는 사랑스러운 자식이 아니겠나?
그렇다면 뭐 상관없…… 지는 않지.
적어도 지금의 나는 적비연이니까!
그때 유모가 얼른 말했다.
“어머, 어머! 아기씨 표정 좀 보세요. 뭔가 심통이 난 것 같지 않아요? 배가 고픈가?”
“아! 하긴 그렇겠네. 그동안 많이 먹질 못했을 테니까.”
“주세요, 마님. 제가 젖을 먹일게요.”
뭐? 젖을 먹여?
나한테 젖을 먹이겠다고오오?
절대 안 돼! 거부한다! 그 젖 거부한다!
“응애애애애! 으앵으앵!”
“아이쿠, 정말 배가 많이 고픈 모양이네. 옳지, 옳지. 착하다. 조금만 기다리렴. 내가 금방 배를 채워주마.”
싫다니까! 싫다고! 절대로!
“응애애애애애애!”
그러자 젊은 여인이 아기를 안으며 말했다.
“유모, 오늘은 그냥 내가 먹여볼게.”
“마님이 직접요?”
“응. 오늘은 내가 먹이고 싶어.”
“아, 그럼 제가 젖이 좀 잘 돌게 주물러 드릴까요?”
“그래주겠어?”
“그럼요.”
여인이 요람에 적비연을 눕히자, 유모가 여인의 상의를 슬쩍 벗기더니 가슴을 이리저리 주물렀다.
한편 적비연은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하, 진짜 미치겠네.
마침 유모가 반색했다.
“아, 나온다. 이제 먹이시면 될 것 같아요!”
“고마워, 유모.”
살며시 미소 지은 여인이 다시 적비연을 안아 들었다.
“자, 맘마 먹자, 우리 아기.”
거, 거부한다!
“어서, 아아 해보렴. 착하지?”
싫, 싫다니까! 내가 이 나이에…… 으읍!
“우애애애애앵!”
적비연이 필사적으로 거부하자 여인이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잘 못하나 봐.”
“에구. 왜 그러지? 제가 한 번 먹여볼까요?”
유모의 말에 적비연이 얼른 정신을 차렸다.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지금 빨고 말자.
“아! 빨고 있어. 먹고 있어!”
“어머, 그러네. 정말 다행이에요. 마님. 이제 아기씨가 건강할 일만 남았네요.”
“그러게. 정말 다행이야. 맛있니? 아가?”
여인이 적비연을 바라보며 눈가를 촉촉하게 적셨다.
맛있을 리가…….
‘……있네?’
왜 맛있지? 몸은 아기라서 그런가?
젠장, 이 지경이 되어서도 미각은 정직하구나.
“많이 먹으렴, 우리 아기. 사랑한단다.”
문득 적비연은 왠지 모를 따스함을 느꼈다.
어머니의 사랑이라.
이런 기분이었던가?
워낙 어릴 적에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왠지 어색하면서도 그리운 기분.
가슴 한쪽이 뭉클해지려는 순간,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기가 깨어났다고?”
“어머, 오셨어요?”
여인이 젖을 먹이는 채로 돌아보았다.
“오오, 정말이군! 아기가 젖을 먹고 있다니!”
마침내 목소리의 주인이 적비연 위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 순간 젖을 먹던 적비연은 사레가 걸릴 뻔했다.
뭐야! 당신이었어?
적비연 위로 커다란 얼굴을 들이민 사내는 다름 아닌 만검세가 총관 진서국이었다.
하필 진서국 아들로 환생하다니!
적비연이 낙담한 표정으로 젖을 빨지 않자, 여인이 진서국에게 핀잔을 주었다.
“당신이 방해하니 먹질 않잖아요.”
“아, 미안하오. 너무 기뻐서 그만.”
진서국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면서 뒷걸음질을 쳤다.
적비연이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제길, 이번 생은 확실히 망했어.
* * *
“웅아는 아직이냐?”
하불범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예, 아버지.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한심한…….”
하불범이 씹어뱉듯이 중얼거리고는 만대균에게 시선을 옮겼다.
“고생하셨소. 이번에는 그대의 공이 크오.”
“아닙니다. 다 소가주님 덕분입니다.”
만대균이 고개를 깊이 숙이며 대꾸했다.
이걸로 솟아오를 구멍은 뚫었다.
정말이지 하천웅과 함께 무너지는 하늘에 깔릴 뻔했건만.
천운이 따랐다.
장사에서는 운귀 때문에 임무에 실패했지만, 이곳에서는 운귀 때문에 상황이 역전됐다.
‘감히 본가를 배신하다니. 꼴좋다.’
목이 베인 운귀의 머리는 장대에 매달아 만검세가 정문에 효시해 두었다.
벽력적가에게 경고를 내리기 위한 목적이기도 했다.
하불범이 시종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의원은 뭐라고 하더냐?”
하천웅의 상태에 대해 묻는 것이다.
하기룡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기혈이 뒤엉켜 내력이 제대로 순환하지 못해 폭발한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 원인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체질이 조금 변형된 것도 원인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체질이 변형됐다?”
“누군가 고의적으로 웅아의 체질을 바꾼 흔적이 있다고 합니다.”
“감히 누가 내 아들을 건드린단 말인가!”
하불범이 노기 띤 음성으로 외치자, 하기룡이 눈을 가늘게 뜨며 답했다.
“웅아의 체질을 바꿀 수 있을 정도면 무척 가까운 곳에서 지내야 가능한 일이겠지요. 웅아가 자고 있을 때도 옆에 있을 정도로.”
“하면…….”
“예, 그 역시 운귀의 소행으로 판단됩니다. 그가 아니고서는 감히 그런 짓을 누가 할 수 있겠습니까? 누구든 웅아의 몸에 손을 대면 운귀가 가장 먼저 알 수 있을 텐데요.”
“하긴…….”
하불범이 주먹을 꽉 말아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독사 새끼를 품에서 키우고 있었을 줄이야.
하천웅이 저리 된 것도 모두 자신의 불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자 자괴감에 마음이 괴로워졌다.
“적가장의 반응은?”
“아직 이렇다 할 움직임은 없습니다.”
하긴 자신들이 심어놓은 간자를 죽였다고 따지고 올 수도 없겠지.
물론 이쪽에서 왜 간자를 심어두었냐고 따지지도 못할 일이다.
그랬다간 이쪽에서 천상단을 탈취하려고 했던 일부터 인정해야만 할 테니.
이번 일은 암묵적인 경고로 넘어가야 하리라.
“감히 웅아를 저 지경으로 만들다니……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적가 놈들……!”
하불범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었다.
그가 길게 숨을 내쉰 후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눈빛이 유난히 차갑게 빛났다.
“하늘 아래에 두 마리 용이 함께 있을 수는 없지. 적가는 이제부터 본가의 원수다. 이 장사에 적가가 남든, 본가가 남든 둘 중 하나만 살아남는다.”
“명심하겠습니다.”
하불범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바람만 불어도 쓰러질 것만 같았던 적가가 아니었던가?
분명 적가는 기울어가는 달이었다.
한데 점점 다시 차오르는 것 같은 기분은 왜인가?
하불범이 시린 눈빛으로 하기룡을 보았다.
“생각이 있느냐?”
“일전에 따로 말씀드린 것처럼 운귀가 적 가주를 대신해서 웅아와 대련을 한 게 아닌지 여전히 의심스럽습니다.”
“하면 외모는 어떻게?”
“늦은 밤이라 자세히 살피지 못했습니다만, 인피면구를 썼을 가능성도 있지요.”
“그렇다면 현재 적 가주는…….”
“어쩌면 우 총관의 말대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그보다 좋은 소식도 없겠지.”
“우 총관에게 다시 지시를 내려 살펴보라 이르겠습니다.”
“우리는 운귀를 죽였다. 그쪽에서도 간자를 색출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지 모르니 각별히 유의하도록.”
“명심하겠습니다.”
고개를 깊이 숙인 하기룡의 입매가 사악하게 치켜 올라갔다.
적 가주, 그대는 과연 살아 있는가?
* * *
그 시각, 적비연은 기저귀에 오줌을 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