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46화 (47/301)

46. 이번 생은 망했어

‘하천웅. 그 녀석은 어떻게 됐을까?’

하천웅의 마지막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하천웅의 진심이 와닿았던 것 같다.

아마 운귀로 살았던 기억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이리라.

적어도 마지막 목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는 적비연도 운귀의 마음이었다.

그 파락호 같은 놈도 제 호위만큼은 그리도 끔찍하게 생각할 줄 누가 알았을까?

뭐,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사정은 있는 법이니까.

모르겠다.

깊이 생각한다고 당장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하천웅이야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놈이 아니었던가?

그나저나…….

‘이 난감한 상황을 어떻게 하지?’

적비연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직은 돌아누울 힘도 없다.

어떻게든 뒤집기를 시도해 봤지만 도저히 불가능했다.

이 작은 몸이 이렇게도 무거울 줄 누가 알았겠나?

이걸로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성인의 몸을 지녔을 때는 정신이 육체를 지배할 수 있지만, 신체가 미숙한 상황에서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 머릿속으로 각인된 기억에 따라 신체 능력이 재구성되지만, 아직 성장을 이루지 못한 아기나 어린아이의 몸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하긴 이건 자연의 섭리랄까?’

약관의 무인이 엄청난 기연을 얻어 무림초고수에게 격체전공(隔體傳功)을 받으면 단숨에 초절정의 경지에도 오를 수 있다.

하지만, 갓난아기가 격체전공을 받으면?

추후 성장에는 도움이 될지라도 당장 경공술을 펼칠 수는 없다.

‘역시 그렇다면……’

이건 엄청난 문제다.

여기서 더 자랄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몇 년을?

환장하겠네.

적비연은 머리를 벅벅 긁으…… 려고 했지만 힘 조절이 되지 않는 탓에 손가락으로 눈을 푹 찌르고 말았다.

‘아악……!’

눈물이 찔끔 날 만큼 아프다.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또 유모가 달려와 호들갑을 떨 것 같아서 억지로 참았다.

아아, 답답하다! 답답해!

짜증이 나서 손을 휘둘렀더니 이번엔 제 머리를 탁 때린다.

‘아얏!’

내 한 몸을 간수한다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일 줄이야.

‘너무 마구 움직이면 안 되겠어.’

조심해야 한다.

아직 두개골이 완전히 닫히지 않아서 자칫 머리를 때렸다가 큰 부상을 입을 수도 있다.

뭐, 하긴.

아직은 팔이 짧아 정수리에 손도 제대로 닿지 않으니 상관없나?

어쨌든 정수리는 조심해야 한다.

아기들은 보통 생후 이 년은 지나야 두개골이 완전히 닫힌다.

그때까지는 두개골이 완성되지 않아 정수리 부분 즉, 대천문(大泉門)이 활짝 열린 상태다.

때문에 아기의 머리를 만질 때는 특히 조심해야 한다.

그런데…….

‘나는 이런 걸 어떻게 아는 거지?’

아, 아상 어르신의 기억 때문이구나.

하긴 신의의 기억을 가지고 있으니 이 정도 상식은 어려울 것도 없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지금 적비연은 대천문을 통해 기가 원활하게 소통되고 있었다.

열려 있는 대천문을 통해 천기를 받는다는 건 모든 무인들의 꿈같은 일.

대게는 오랜 수련으로 근육을 이완시켜 대천문을 열어 천기를 받아들이곤 한다.

그게 아니면 임독양맥을 뚫어 생사현관을 타통해서 대천문으로 천기를 받아들이기도 한다.

물론 후자의 경지까지 오르려면 엄청난 고수의 반열에 올라야 한다.

그땐 초절정의 경지에 오를 수 있겠지.

어쨌거나 그 어려운 일을 지금 적비연은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잖아?’

순간 적비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깐. 그럼 지금 대천문이 열려 있으니…… 이 천기를 받아들여 생사현관을 타통한다면……?’

왜 진작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이건 어쩌면 하늘이 내려준 기회가 아닌가?

추후 대천문은 닫히더라도 생사현관을 타통하면 어려서부터 비약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으리라.

진정한 무공 천재!

그 무공 천재가 만검세가에서 배출된다는 건 뼈아픈 일이지만, 당장은 적비연 본인의 문제가 아닌가?

‘좋아, 운기를 해보자! 이 기회로 생사현관을 타통한다면……!’

그런데…….

‘젠장! 단전이 없잖아! 단전이!’

역시 아기는 아기다.

손톱만 한 단전이라도 생겼다면 뭘 어찌 해보겠건만, 배꼽 아래로는 아무것도 느껴지는 게 없다.

이렇게 열심히 복식호흡만 하는데 왜 내단이 만들어지지 않았단 말인가?

하긴. 모든 아기들은 복식호흡을 하지.

어쨌거나 망했다.

모처럼 대천문이 활짝 열려 있는데 생사현관을 타통할 수 없다니.

그럼 이제 할 수 있는 건 무엇인가?

선천지기(先天之氣)를 늘려보는 건?

원래 선천지기란 태어날 때부터 가진 생명력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전생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진 적비연이라면 이 선천지기를 생후 이 년까지 좀 더 늘릴 수 있다.

당장 단전을 만들지 못해도 열린 대천문을 통해 천기를 흡수하고 기경팔맥을 따라 흐르는 선천지기의 흐름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 수는 있지 않겠나?

‘좋아, 시도해 보자!’

아기들은 원래 가장 자연스러운 복식호흡을 하니 토납법(吐納法)을 따로 신경 쓸 필요도 없다.

성인이 되어 토납법으로 얻어지는 정기와는 또 다른 느낌!

폭포수처럼 시원하게 쏟아지는 천기가 임독양맥과 기경팔맥을 따라 원활하게 흐른다.

그렇군. 이런 식으로 선천지기를 활용할 수 있구나.

아기의 몸이 아니었다면 절대 알 수 없었을 거다.

이 깨달음은 정말이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값진 것이다.

모든 배움의 끝은 자연 그대로라고 하지 않던가?

많은 사람들이 그 진리를 깨닫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가?

한데 적비연은 이번 기연으로 그걸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역시 가장 순수한 게 가장 강하다는 말도 일리가 있다니까.’

확실히 맑은 기운이 정수리를 통해서 쏟아져 들어온다.

‘아, 좋다. 이 편안하면서도 졸린 듯한 기분. 역시 인생의 황금기는 아기 때였어.’

그렇게 얼마나 운기를 했을까?

당장 단전에 내단이 쌓이는 건 아니지만, 전신 세맥에 퍼져 있는 선천지기가 더욱 견고해지는 느낌이다.

몸이 가볍다.

‘이래서 아기들이 발을 그렇게 오래 들어 올리고도 잘 노는 건가?’

가만 보면 아기들은 끊임없이 하체를 번쩍번쩍 들어 올리지 않나?

누워서 발을 들어 장난을 치고, 물고 빨고, 짝짝꿍도 하고…….

평범한 성인이라면 일각도 채 견디지 못하고 앓는 소리를 내지를 텐데.

아기들은 하루 종일도 한다.

복근도 없이 말이다.

이만해도 엄청난 성과다.

선천지기를 강화했으니 다른 몸으로 환생한다면 틀림없이 또 한 번 성취를 이룰 수 있으리라.

그때,

어? 뱃속에서 묘한 기운이……?

설마 벌써 단전이 만들어지려는 건가?

적비연이 눈을 감고는 단전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이건 설마……?’

꾸륵……! 꾸르르륵……!

제길! 전혀 아니잖아! 왜 하필 지금……!

적비연의 기대와 달리 아기의 몸은 정직했다.

먹었으니 싸는 건 자연의 이치.

그렇다.

수련을 통해 생리적 욕구를 견디기에는 적비연이 지금 너무 아기였다.

‘젠장…… 신성한 운기행공 중에 하필 또, 똥이라니……’

참으려고 했지만 배가 너무 아프다.

만약 여기서 똥을 싸게 되면……?

옆에서 코를 골면서 자는 저 유모가 귀신같이 눈치채고는 하반신을 벗기려 들겠지.

절대 안 된다!

그 치욕만큼은 참을 수 없다.

그래, 참는 거다.

수련을 통해서 생리적 욕구쯤은…….

뽀옹.

‘헛! 괄약근에 힘이……!’

어째서 이렇게 빨리 진행되는 거지?

‘아, 그렇구나. 아기들은 장의 길이가 짧아서 신호가 오면 진행도 빠른 거구나.’

이럴 때는 쓸데없이 아상의 지식이 절로 떠오른다.

제길……! 더 이상은……!

이제 아기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변하고 있었다.

마침내,

‘아아. 끝이다. 더 이상은 힘들어…….’

마침내 적비연은 모든 걸 내려놓았다.

순간 지금껏 견뎌왔던 인내의 무게가 기저귀로 시원하게 쏟아져 나왔다.

동시에 구린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제길…… 느껴진다. 진득한 무언가가……’

치욕스럽지만 어쩔 수 없다.

그래, 지금 자신은 아기가 아니던가?

이대로 참다간 똥독이 오를지도 모른다.

제길, 유모! 빨리 기저귀를 갈아라!

“응애애애애! 응애!”

아기가 자지러질 듯 울자 유모가 얼른 달려왔다.

“어머, 응가 싸셨네. 에구에구. 잠깐만 기다려요.”

유모가 얼른 데운 물을 준비하고는 수건과 새 기저귀를 가져왔다.

“어디 보자. 아이고, 많이도 싸셨네. 호호호. 이것 좀 봐. 아주 한 바가지야.”

유모의 말에 시녀 두 명이 다가와 들여다본다.

“어머, 정말이네요. 많이 드시더니 많이 싸셨네요.”

“이제 정말 건강해지시려나 봐요.”

적비연으로서는 정말이지 이런 치욕이 없었다.

‘아니, 봤으면 얼른 씻기고 갈아입힐 것이지! 무슨 구경났다고 우르르 몰려드는 거야? 젠장!’

하지만 말을 할 수 없는 그로서는 부지런히 울어댈 뿐이었다.

“응애응애! 응애애애애!”

“아이고, 알겠어요. 성격도 급하셔라.”

유모가 얼른 다리를 잡아 들어 올리더니 기저귀를 치워내고는 적비연을 덜렁 들어 올렸다.

유모가 따뜻한 물에 적비연의 엉덩이를 담그자 시녀가 다가와 조심스레 씻기기 시작했다.

‘아으, 뜨뜻하다.’

그런데…….

“어머, 귀엽다.”

시녀가 까르르 웃더니 그곳을 만지작거리며 꼼꼼히 씻기는 게 아닌가?

물론 중요 부위에 묻은 오물을 씻어내는 과정이었지만, 적비연으로서는 세상 참담한 굴욕이었다.

‘그, 그만! 그, 그건 네년들의 노리개가 아니란 말이다! 이런……! 하윽……! 어째서……! 느껴 버리는……!’

한참이나 문질거리며 씻겨주던 시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맛? 커졌네. 오줌……?”

아니, 아니라고. 이제 그만하라고. 제발…….

‘아아, 너무 비참해.’

“응애애애애애!”

“아이고, 아기씨 추운가 보다. 얼른 입혀 드릴게요.”

마침내 유모가 물에서 건져내더니 수건으로 뽀송뽀송하게 닦아내고는 다시 기저귀를 채웠다.

비로소 안식을 되찾은 적비연이 내심 각오를 다졌다.

‘내 반드시 이 몸에서 벗어나리라. 그런데 어떻게 벗어나지?’

누가 나 좀 안 죽여주나?

* * *

분명히 죽었을 거다.

우벽산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기룡의 말이 사실이라면, 적비연은 죽은 게 틀림없으리라.

운귀가 벽력적가에서 심어둔 간자였다니.

상상도 못했다.

어쩐지 일이 계속 틀어진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이제 모든 게 착착 맞아들어간다.

그렇다면 역시 적비연 가주는 죽었을 가능성이 크다.

‘좋아, 확인해 보는 거다. 하지만 조심해야겠지. 서두를 건 없다.’

심호흡을 한 우벽산이 방문을 두드렸다.

“가주님, 계십니까?”

문이 열리더니 묵검이 나타났다.

‘역시! 가주는 대답이 없어!’

묵검이 우벽산을 내려다보면서 무뚝뚝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오?”

“가주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소.”

“내게 말하시오. 전해 드리겠소.”

‘역시, 역시…….’

우벽산이 내심 조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민감한 사안이라 가주님께 직접 전하고 싶소만.”

“가주님은 현재 비동에서 수련 중이시오.”

“그럼 다음에 다시 오겠소.”

“그러시오.”

묵검이 문을 닫고 나오자 우벽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어딜 가시는 길이오?”

“가주님의 명으로 천상원에 볼일이 있소.”

“그렇구려. 조심하시오. 흉흉한 때이니.”

“총관께서도.”

묵검이 짤막하게 대꾸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우벽산이 그의 뒤를 보며 입매를 희미하게 말아 올렸다.

‘확실히 수상하다! 수상해!’

* * *

“보통 수상한 게 아닙니다! 정말 너무 이상합니다!”

단휘가 탁자를 쾅 짚으며 소리쳤다.

운귀의 머리가 만검세가 정문에 내걸렸다.

온 세상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머리가 내걸린 장대에는 붉은 글귀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배신즉천벌(背信卽天罰)!

사람들이 쉬쉬하고는 있었지만, 알 만한 사람들은 벽력적가와 만검세가의 알력다툼이라는 걸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

단휘 옆에 선 예홍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다 끝났어. 가주님이 돌아가신 거야. 내 목도 가주님 곁에 나란히 걸어줘.”

스르릉.

지체 없이 검을 뽑아 드는 예홍을 보고는 단휘가 얼른 발로 걷어찼다.

팡!

휘리릭, 탁!

튕겨 나간 연검이 원주실 벽에 박히면서 휘청거렸다.

단휘는 으레 그랬던 것처럼 예홍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정말 가주님께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닙니까?”

“진정하세요. 가주님은 무사하실 거예요.”

은하란의 대답에 단휘가 따져 물었다.

“그렇다면 왜 지금껏 아무 소식이 없는 겁니까?”

“그건 저도 알 수 없어요. 하지만 이대로 끝이 아닌 건 분명해요. 그리고…… 예홍, 그 검 다시 넣어두세요.”

어느새 벽에서 검을 뽑아 목에 들이대던 예홍이 멈칫하고는 검집에 갈무리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가주님은 무사하실 겁니다.”

그때 문을 열고 묵검이 들어왔다.

세 사람이 동시에 그를 돌아보았다.

은하란이 가장 먼저 물었다.

“가주님의 본체는 어떤가요?”

“다행히 이상 없습니다.”

세 사람이 동시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적비연이 진짜로 죽은 건 아니란 뜻이다.

묵검이 말을 이었다.

“우 총관이 슬슬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어서 가주님을 찾아야 하는데……! 도대체 어디에 계신 건지……!”

단휘가 어금니를 뿌득 갈았다.

* * *

그 시각 적비연은…….

‘아으, 시원해. 좋다, 좋아.’

엄마에게 배가 문질러지며 안마를 받고 있었다.

‘뭐, 이번 생도 딱히 나쁘지만은 않은데? 모처럼 느긋하게 계획을 세워볼까?’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적비연은 알지 못했다.

이번 생을 생각보다 훨씬 일찍 마감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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