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48화 (49/301)

48. 새옹지마(塞翁之馬)

“네 꿈은 무엇이냐?”

아버지의 물음에 적비연이 밤하늘을 보며 대답했다.

“중원제일고수가 되어 아버지가 못다 이룬 가문의 부흥을 이루는 것입니다.”

“한데 왜 벌써 내 곁에 와서 앉았느냐?”

“예?”

깜짝 놀란 적비연이 고개를 돌려 아버지 적금산(赤金山)을 보았다.

적금산이 탐탁찮은 표정으로 적비연을 물끄러미 보았다.

“뭐가 아쉬워서 벌써 삼도천(三途川)을 건너왔냐고 묻는 거다.”

“삼도천…… 이요?”

삼도천이면 저승 강을 말하는 게 아닌가?

그 순간 주변의 풍광이 확 바뀌었다.

분명 가주전 지붕 위에서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이제 보니 천 길 낭떠러지 위가 아닌가?

한데 놀랍게도 걸터앉은 땅이 하늘에 떠 있었다.

그리고 저만치 아래로는 하늘을 가로지르는 강물이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다.

‘맙소사! 땅도, 강도 하늘에 떠 있다니?’

그 순간 적비연은 잊고 있던 마지막 순간이 떠올랐다.

아! 아기!

그랬다.

자신은 아기의 몸으로 환생해서 뒤집기를 하다가 숨이 막혀서……!

문득 억울한 생각이 든 적비연이 아버지를 휙 돌아보며 외쳤다.

“억울합니다! 저는 그렇게 죽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건 제 의도가 아니었다고요!”

“확실한 것이냐?”

“당연하죠! 세상에 뒤집기를 하다가 숨 막혀 죽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저는 마지막까지 필사적으로 살고자 했는데 하필 몽현초 때문에……!”

“그 몽현초가 널 죽일 뻔했지만, 그 몽현초가 널 또 살린 셈이 됐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정상참작이 됐단 말이지.”

툭.

말을 마친 적금산이 적비연의 등을 가볍게 떠밀었다.

순간 적비연의 몸이 허공에 붕 떠오르는 것 같더니 이내 빠른 속도로 추락했다.

“으악! 아, 아버지! 아버지!”

“네가 오기에는 아직 이르다. 맡은 바 소임을 다하고 와도 늦지 않다.”

“아버지! 아버지……!”

* * *

“으음…… 아버지……!”

“오냐, 내가 네 아비다. 정신 좀 차려보아라.”

부드러운 목소리가 적비연의 귓가에 닿았다.

“아, 아버지. 보고 싶었습니다. 아버지를 다시 뵙고 싶었습니다.”

“그래, 그래. 그럼 어서 눈을 떠야 하지 않겠느냐?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생각이냐? 이제 정신 좀 차려보아라.”

“끄음. 아버지…….”

적비연이 눈물을 흘리면서 천천히 눈을 떴다.

뿌옇게 흐려진 시야 가득 하불범의 얼굴이 나타났다.

“으헉!”

순간 깜짝 놀란 적비연이 반사적으로 발을 내질렀다.

퍼억!

“커억!”

슈우우우욱, 콰당탕!

적비연의 발길질에 포탄처럼 튕겨 나간 하불범이 방 안의 잡기를 부수며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다.

그 모습을 본 시종들이 턱이 빠져라 입을 벌리고는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가, 가, 가…… 가주님……!”

뒤늦게 시종 두 명이 달려가며 안절부절못했다.

한편 적비연은 상체를 벌떡 일으키고는 심호흡을 했다.

“어우, 깜짝이야. 음……? 여긴……?”

순간 그의 머릿속을 쏟아져 들어오는 기억들!

적비연이 경악한 표정으로 눈살을 잔뜩 구겼다.

맙소사!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내가 하천웅 몸으로 들어와 버렸단 말인가!

하필이면 원수의 몸으로 들어와 버리다니!

아니, 그보다 그 아기는 어떻게 됐지?

‘이런!’

적비연이 얼른 침상에서 내려오자마자 문을 활짝 열고 달려 나갔다.

한편 한쪽 구석에 찌그러져 있던 하불범이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고는 허리를 폈다.

맞은 배가 욱신거렸다.

“끄응.”

“괜, 괜찮으십니까? 가, 가주님!”

“나는 괜찮다. 웅아는 어딜 간 거냐?”

“그, 그것이 저희들도 잘…….”

시종들이 황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끄음. 다들 물러가라. 좀 쉬어야겠다.”

시종들이 얼른 몸을 사리며 물러갔다.

하불범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적비연에게 맞은 복부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가 천천히 장삼을 들춰보자 탄탄하게 근육 잡힌 배에 시커먼 멍 자국이 발모양으로 선명하게 나 있었다.

‘이 녀석이 언제 이렇게…….’

잠깐 감탄을 흘리던 하불범이 이내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

* * *

방문을 등진 진서국이 뒤를 힐끔 돌아보고는 중얼거렸다.

“한 번 들어가 볼까?”

“아이고, 참으세요. 나리. 그러다 겨우 잠든 아기씨가 깨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유모가 얼른 나서며 말렸다.

진서국이 헛기침을 하며 간신히 충동을 눌러 참았다.

“하긴. 잠이 부족한 녀석이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고놈 참, 어찌 그리 잠도 자지 않고 설치는 건지.”

“그래도 정말 다행이에요. 아기씨가 건강하게 자란다고 하니까요.”

“그러게 말일세. 이왕 귀한 몽현초까지 먹였으니 좀 푹 잤으면 좋겠구먼.”

“호호, 일다경 정도만 더 참으셨다가 조심스럽게 한 번 들어가 보셔요.”

“그래야겠네.”

진서국이 연신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벌써 반 시진이 다 되어가도록 문 앞을 지키는 진서국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늦은 나이에 후처를 통해 겨우 얻은 독자였다.

그러니 얼마나 귀하고 귀하겠는가?

그때 저만치 누군가 허겁지겁 달려오는 게 보였다.

“응? 이곳에 누가……?”

눈살을 찌푸리던 진서국이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 공자님이 여기에 어떻게 오셨습니까? 그보다 몸은 괜찮으신지요?”

놀랍게도 진서국 앞에 나타난 사람은 이 공자 하천웅이었다.

운귀가 간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함께 있었던 하천웅이 위중한 상태에 빠졌다.

이에 진서국은 이 공자의 문병까지 다녀온 참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하천웅은 안색이 하얗게 질려서 도저히 깨어날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해 보이지 않는가?

하천웅의 모습을 한 적비연이 다짜고짜 방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진서국이 얼른 막아섰다.

“공자님, 무슨 일이십니까? 갑자기 찾아오셔서…….”

“길게 말할 시간이 없소! 비키시오!”

“이런, 아무래도 뭔가 착각하시는 모양인데 여기는 갓 태어난 제 아들이 잠들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그래서 위험한 거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무튼 좀 비키시오! 총관 아들을 위해서니까!”

하지만 이제 병석에서 일어난 하천웅의 말을 누가 믿겠나?

진서국은 그저 하천웅이 병석에서 일어나더니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라고만 생각했다.

“공자님, 고정하시고 제 말씀 좀 들어주십시오. 제 아들은 오늘까지 잠을 통 자지 못해…….”

“이리저리 뒤척이기만 했겠지. 잘 울지도 않고! 다 알고 있소!”

“아니, 그걸 어찌……?”

지금껏 병석에 드러누워 의식도 없던 하천웅이 그런 것까지 어찌 알았을까?

놀라운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어서 비키시오! 몽현초도 먹이셨을 테고 방을 비운 지 반 시진 정도 지났겠지? 지금이라면 늦지 않았을지도 모르오!”

“대체 그 이야기를 그새 어디서 들으신 겁니까?”

“아니, 글쎄! 그게 중요하오?”

참다못한 적비연이 버럭 소리쳤다.

하지만 사정을 알 리 없는 진서국은 완강했다.

“아무리 공자님이어도 이건 아닙니다. 수일째 잠을 설친 아기가 이제야 겨우 잠들었습니다. 한데 이렇게 들어가셔서 그 아이를 깨운다면 기껏 먹인 몽현초의 효능조차…….”

“답답한 소리만 하는군!”

결국 적비연이 진서국의 어깨를 떠밀었다.

하지만 찰나지간 진서국은 천근추(千斤錘)의 수법으로 몸을 꿈쩍 않고 버텼다.

“이러지 마십시오! 공자님, 계속 이러신다면 저도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진서국의 표정에 엄중함이 깃들었다.

아무리 하천웅이 만검세가의 이 공자라지만, 이건 자식의 안위가 걸린 문제다.

권력의 힘이 무서워 자식을 위험에 빠뜨릴쏘냐.

“이런 멍청한! 자초지종을 설명할 틈이 없대도!”

적비연이 버럭 소리치고는 내공을 끌어올려 일장을 날렸다.

그 순간에도 진서국은 내심 코웃음을 쳤다.

‘아무리 개망나니라지만 정말 너무하는군! 병석에서 깨어났으면 얌전히 몸조리나 할 것이지 왜 미친놈처럼 여길 찾아와 행패를 부린단 말인가? 그 배신자 놈을 제 몸처럼 아꼈다더니, 놈의 머리가 정문에 효시된 걸 알고 미쳐 돌아버렸나?’

생각을 마친 진서국이 조금은 여유를 가지고 쌍장을 내밀었다.

비록 머리를 주로 쓰는 총관의 자리에 있지만, 진서국은 절정 중단에 이르는 무공 고수였다.

이제 막 절정에 다다른 하천웅이 상대할 만한 실력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퍼엉!

적비연이 내지른 일장과 진서국의 쌍장이 부딪치면서 어마어마한 폭발이 일어나는 게 아닌가?

“크읍!”

진서국이 두 눈을 부릅뜨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뒤이어 그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밀리더니 그대로 안마당에 추락하며 나뒹굴었다.

“에구머니나! 나리! 괜찮으셔요?”

유모가 화들짝 놀라서 비명처럼 외쳤다.

그러는 사이 적비연은 문을 벌컥 열었다.

‘역시!’

저만치 엎어져서 꿈쩍도 하지 않는 아기가 보였다.

“이익……! 이 공자! 멈추시오!”

머리끝까지 화가 난 진서국이 벼락처럼 외치며 단숨에 몸을 날려왔다.

조금 전의 일장을 받으면서 내상을 입는 바람에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렸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순식간에 날아든 진서국이 적비연의 어깨를 탁 붙드는데,

“가서 빨리 침이나 가져오시오!”

“갑자기 무슨 침을……!”

화를 내며 대꾸하던 진서국이 깜짝 놀라서 요람을 바라보았다.

“마, 맙소사!”

아기가 엎어진 채로 축 늘어져 있는 게 아닌가?

적비연이 진서국의 손길을 휙 뿌리 치고는 얼른 달려가 아기를 돌려 눕혔다.

아기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적비연이 얼른 아기의 맥을 짚었다.

‘아직 아주 늦진 않았다!’

한편 진서국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휘청거리면서 중얼거렸다.

“어째서 잘 자고 있던 아기가…….”

“잘 자기는 개뿔. 어서 침!”

“예? 아, 침! 예!”

진서국이 허둥지둥 달려가서 방 한쪽에 둔 비상용 침통을 가져왔다.

다행히 기본적인 구침(九針)은 모두 갖춰져 있었다.

적비연은 얼른 아기의 요혈에 침을 꽂아갔다.

‘제발, 살아라! 살아라……! 안 그러면 내가 너무 미안해지잖아?’

이렇게 허망하게 죽기에는 너무 어리지 않은가?

적어도 이 아기에게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는 보여줘야 하지 않겠나?

얼마 전 칠괴의 몸에 들어갔을 때, 자신이 아상의 몸으로 옮겨간 후에도 칠괴가 잠깐 동안 살아 있던 걸 확인한 적이 있었다.

그래, 지금이라면 살릴 수 있다.

마침내 마지막 요혈까지 침을 놓은 적비연이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쳐냈다.

‘이제 마지막이다.’

적비연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아이의 임맥 정중앙인 옥당혈(玉堂穴 )에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쉬익!

한 줄기 공력을 불어넣자 아기의 임독양맥을 따라 기가 순환하기 시작했다.

‘과연. 선천지기를 강화했기 때문인가? 아직 희망이 있다!’

적비연은 다시 빠르게 몇 군데 혈을 점했다.

그러는 사이 진서국은 넋을 놓은 채 적비연이 하는 행동을 바라보기만 했다.

어째서 이 공자가 이런 일을 능숙하게 할 수 있는 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다만 분위기상 지금은 그에게 모든 걸 내맡겨야 한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아비로서의 본능이기도 했고, 지금껏 고집을 피우다가 응급처치가 늦어졌다는 자괴감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게 지옥 같은 시간이 흐르고 나서,

“후앙.”

마침내 아기가 숨을 탁 트면서 고른 숨결이 되돌아오는 게 아닌가?

“후우!”

적비연도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고는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그가 아기의 몸에 박힌 모든 침을 뽑아내며 말했다.

“이제 아기는 괜찮을 거요. 위험한 고비는 넘겼으니 무탈하게 클 거요.”

보통의 아이 같았으면 두뇌에 공급되는 산소의 양이 적어진 탓에 지능이 떨어질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선천지기를 강화한 탓에 그 정도의 위험은 피할 수 있었다.

‘이만하면 너도 나에게 받은 게 없진 않은 거다. 이걸로 우리 사이에 은원은 없다.’

한편 희미한 미소를 짓는 적비연 뒤로 진서국이 무릎을 털썩 꿇더니 포권하며 소리쳤다.

“총관 진서국, 이 공자님을 앞으로 평생 은인으로 모시며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적비연이 힐끔 돌아보고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뭐, 의도한 건 아니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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