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새옹지마(塞翁之馬)
침상에 앉아 운기를 마친 적비연이 천천히 두 눈을 떴다.
휘오오오오.
그의 전신에서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일렁이다가 이내 몸으로 흡수됐다.
적비연의 눈동자가 반짝 빛을 뿜었다.
‘이건…… 대단하군.’
놀랍다.
이거야말로 환골탈태 수준이 아닌가?
아니, 환골탈태 그 자체다.
다만 통속소설에서 보던 그런 신화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흔히 저잣거리에서 구해볼 수 있는 통속소설을 보면 환골탈태할 때 하루 만에 이가 빠졌다가 다시 난다든지, 밤새 대머리가 되었다가 새벽녘에 새 머리카락으로 장발이 된다든지, 뱀처럼 허물을 벗는다든지 등의 변화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실제로 적비연의 몸은 그대로였다.
다만 좀 더 모발에 힘이 생기고, 치아가 튼튼해지고, 근육이 단단해지긴 했다.
거기에 내실은 확실히 챙겼다.
무려 생사현관이 타통된 것이다!
어이없게도 기가 뒤얽혀 폭발이 일어났을 때 하천웅의 전신 세맥을 완전히 뚫어버린 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아상으로 지낼 때 하천웅의 체질을 바꿔놓았던 보침이 이런 효과를 낼 줄이야.
그저 골려먹기 위해서 손을 써둔 것인데 진짜로 보침이 됐다.
물론 보통이라면 그 폭기를 견디지 못해 즉사하거나 간신히 살아남더라도 식물인간이 됐을 터다.
하지만 적비연이 하천웅의 몸으로 깨어나면서 그 위험은 피해간 셈이다.
오히려 그 모든 혜택을 적비연이 받게 됐다.
‘이것도…… 의도한 건 아니지만, 나쁘진 않네.’
정말이지 몸이 날아갈 듯 가볍다.
만약 자신이 하천웅의 몸으로 깨어나지 않았다면, 하천웅은 과연 의식을 회복했을까?
아마 기적적으로 깨어난다고 해도 미치광이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리라.
‘하아. 그나저나 하필 하천웅이라니.’
몸의 상태는 지금까지 그 누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다.
임독양맥이 뚫린 것만으로도 엄청난 성과인데, 선천지기까지 강화됐다.
아기로 지낸 기억 때문에 선천지기가 재구성된 것이다.
게다가 이제부터는 생사현관이 타통되었으니 선천지기를 더욱 강화할 수도 있다.
어디 그뿐이랴.
그동안의 기억들로 인해 신체 능력이 재구성되면서 내공은 급격히 늘었고, 무공 경지도 무려 초절정을 넘어섰다.
만인이 꿈에도 바라는 경지.
초절정!
정말이지 나무랄 데 없이 좋은 상황.
다만…….
‘왜 하필 원수의 몸이냐, 이 말이지.’
정말이지 그동안 하천웅이 자신의 가문에 했던 행동을 되새겨 보면 죽도록 두드려 패고 싶다.
‘그렇다고 내가 나를 때릴 수도 없잖아?’
확 자살해 버릴까?
이렇게 자살 충동을 느끼는 것도 처음이다.
아서라.
의도를 가지고 자살을 하게 되면 이번엔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
더 이상 환생할 수 없게 되면 모든 게 끝난다.
저승에서 아버지를 뵐 낯도 없다.
그래, 일단 참자.
그러고 보면 하천웅도 불쌍한 녀석이긴 하다.
하천웅의 몸으로 들어오면서 어린 시절의 기억까지 흡수하다 보니 그가 조금 이해되기도 한다.
‘이 녀석이 첩의 자식이었을 줄이야.’
몰랐던 사실이다.
결국 하기룡과는 배다른 형제.
그나마 하기룡의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는 하기룡의 적대감이 지금처럼 깊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자, 하기룡은 노골적으로 하천웅을 멸시하기 시작했다.
하기룡은 자신의 친어머니가 돌아가신 이유가 첩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사실이긴 했다.
하불범이 첩을 가내로 들이면서 하기룡의 어머니는 질투와 시기에 미쳐가다가 숨을 거뒀으니까.
‘그냥 하는 말로 콩가루 집안이라고 했지만…… 정말 콩가루 집안일 줄이야.’
어쨌거나 어린 하천웅은 하기룡의 지독한 미움 속에서 악착같이 지내왔다.
그리고 하불범의 눈에 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형인 하기룡의 타고난 재능을 능가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몹쓸 짓도 많이 하고…….
“그래도 인마. 그렇게 살면 안 되지.”
찰싹!
동경을 보던 적비연이 제 뺨을 때렸다가 곧 후회했다.
어우, 너무 얄미워서 때렸는데 내가 너무 아프네.
뭐, 당연한가?
‘아, 그래도 자학하고 싶다.’
보통 얄미워야지.
적비연이 동경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가장 미워하는 자의 얼굴을 하고 살아야 하다니.
뭐, 어쨌거나 이미 벌어진 일이다.
당장 싫은 기분은 어쩔 수 없지만, 생각을 바꿔보면 이건 또 하나의 기회이리라.
‘우리 가문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이 사악한 만검가를 직접 몰락시켜 줄 기회!’
일단 든든한 아군도 얻었다.
총관 진서국은 진심으로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리라.
뭐, 어떻게 아기가 위험한 걸 알았냐고 꼬치꼬치 묻는 바람에 좀 귀찮긴 했지만.
죽은 아상 어르신이 꿈에 나타나서 알려줬다고 대충 둘러대니 그런대로 넘어가긴 했다.
침술 역시 아상 어르신과 가깝게 지내는 동안 어깨너머로 익혔다고 둘러댔다.
다행히 진서국은 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하긴.
죽어가던 아기가 살아났으니 그딴 게 아무렴 어떻겠나?
그저 진서국에게는 적비연이 귀하고 귀한 은인일 뿐.
‘일단 다들 걱정하고 있을 테니 오랜만에 돌아가 볼까?’
적비연이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잠시 후, 그의 신형이 스르르 지워져갔다.
확실히 운귀의 은신술은 편하다니까.
* * *
“이렇게 편하게 있을 때가 아닙니다.”
단휘가 천상원주실을 연신 서성였다.
묵검은 창가에서 팔짱을 낀 채 침묵으로 일관했고, 은하란은 말없이 서책을 읽었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서는 예홍이 손톱을 물어뜯으며 퀭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다 틀렸어. 끝났어. 가주님은 돌아가신 거야. 그래, 목이 잘리면 영혼이 빠져나올 수 없는 거야. 환생은 거기서 끝난 거야. 역시 나도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어졌어. 단휘, 내 목을 가주님 곁에 나란히 걸어…….”
쉬잇, 팍!
단휘가 대답도 하지 않고 발을 내질러 예홍의 연검을 걷어찼다.
으레 그랬듯이 예홍의 연검이 원주실 벽에 처박힌 채 휘청거렸다.
책을 읽고 있던 은하란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제 집무실에 온통 구멍을 낼 작정인가요?”
“죄송합니다, 원주님. 그런데 정말 이렇게 기다리기만 하실 겁니까? 가주님께 무슨 일이 생긴 거라면 빨리…….”
“진정하세요. 가주님의 본체에는 어떠한 이상도 없어요. 천문을 읽어도 특이사항이 없고요.”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만 있는 건…….”
그때였다.
끼이익……!
문이 열리는 소리에 네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가장 먼저 반응한 사람은 역시 단휘였다.
“저, 저, 저……! 미친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차앙!
예홍 역시 재빨리 몸을 날려 벽에 꽂힌 연검을 뽑아내고는 기수식을 취했다.
묵검은 자세를 바로 하고는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문을 열고 나타난 사람은 하천웅.
다만 은하란만은 살며시 미소 지을 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천웅의 모습을 한 적비연이 내심 감탄했다.
‘정말 저 여자는 내 비면인지 뭔지가 보이나 보네.’
은하란의 말에 의하면 그녀만큼은 자신의 진짜 얼굴이 보인다고 했다.
적비연이 한숨을 내쉬고는 단휘를 보았다.
“이젠 내가 너한테 미친놈이라는 소리도 다 들어보는구나.”
“당연한 소리! 네놈과 우리가 철천지원수가 되었다는 건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인데, 이렇게 오밤중에 찾아온 건 역시 천상단을 노리겠다는 심보냐?”
예홍은 말보다 행동이 앞섰다.
타앗!
그녀는 벌써 하천웅의 목을 향해 연검을 내지르고 있었다.
쉬이이익!
그녀의 검이 목을 뚫어버리기 직전,
“나, 적비연이다.”
우뚝!
그야말로 머리카락 한 올 차로 멈춘 연검.
적비연이 멍한 표정을 짓는 세 사람을 보며 피식 웃었다.
“웃기겠지. 뭐, 나도 지금 적응이 안 되는 건 마찬가지야.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하지만 예홍의 연검은 적비연의 목에 바짝 와닿았다.
“헛소리. 가주님이 이런 시궁창 같은 외모를 하고 있을 리가 없지. 가주님은 이미 돌아가셨어.”
“홍, 넌 정말 내가 죽길 바라는 거냐?”
“당연히 네놈이 죽기를 바란다.”
“아니, 내가 적비연이라니까?”
“가주님은 이미 돌아가셨다. 나는 다 알고 있다.”
“아, 돌아버리겠네. 은 원주, 뭐라고 말 좀 하지 그래?”
은하란이 피식 웃었다.
“그분은 적 가주님이 틀림없어요. 두 분 다 검을 거두세요.”
그제야 단휘와 예홍이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주춤 물러났다.
적비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솔직히 시궁창 같은 외모라는 말에 동의는 하지만, 막상 면전 앞에서 들으니 기분은 별로네.”
“앗! 가주님께 드린 말씀은 아니었어요. 죽음으로 죄를 씻겠습니다!”
말을 마친 예홍이 누가 말릴 틈도 없이 연검을 자신의 목에 가져갔다.
쉬잇, 팍!
으레 그랬듯이 단휘가 발로 차서 연검을 날려 버리고는 말했다.
“가주님, 말실수하셨습니다.”
“그런 것…… 같군.”
그제야 묵검이 다가오며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뭐, 말하자면 복잡하지. 일단 내 인피면구부터 줘봐.”
“여기 있습니다.”
묵검이 품에서 적비연의 인피면구를 건네주었다.
“다면선사는 어디에 있지?”
“천상원 지하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숙소도 그곳에 방 하나를 만들어 지내게 했습니다.”
“별일 없지?”
“자기 몸에 복혈고가 들어 있다고 생각하는데 무슨 짓을 벌이겠습니까?”
“하긴.”
적비연이 인피면구를 뒤집어쓴 다음 환라육천골을 시전하자 감쪽같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단휘와 예홍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단휘가 감탄한 듯 말했다.
“정말 감쪽같습니다. 완전 가주님 같아요!”
“내가 가주 맞다니까.”
“아, 그렇죠.”
“은 원주, 내가 맡겼던 서책은?”
“가장 안전한 곳에 보관해 두었어요.”
“가장 안전한 곳이라면…… 비동?”
은하란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모처럼 내 방으로 돌아가 보겠군. 그전에 너희들이 궁금해할 그간의 이야기를 해줄게.”
적비연이 네 사람에게 그간의 있었던 일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 * *
슬슬 풀릴 때가 됐다.
오늘이야말로 모든 의문을 말끔히 풀어버리리라.
우벽산은 눈매를 가늘게 여미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분명 아무도 없다.
묵검이 천상원으로 떠나는 것을 확실히 봐두었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요즘은 단휘와 예홍도 천상원에 자주 들르고 있다.
한마디로 가주와 친목이 있는 자들은 모두 천상원에 갔단 말이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가?
‘가주가 다 죽어간다는 뜻이겠지!’
처음에는 가주가 이미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천상원을 드나드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아마 가주는 죽을병에 걸렸을 거라는 것!
그러지 않고서야 갑자기 천상원을 세우고, 충신들이 그곳을 저리도 열심히 들락거릴 이유가 있겠나?
‘오늘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겠다!’
마침내 가주실 앞에 멈춘 우벽산이 목을 가다듬고는 소리쳤다.
“가주님! 총관, 우벽산입니다! 가주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역시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우벽산이 주변을 다시 한 번 살피고는 넌지시 말했다.
“커험,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그가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적막한 가주실의 전경이 드러났다.
그는 총총걸음으로 침실로 다가갔다.
‘인기척이 전혀 없다.’
이건 의외다.
아픈 사람이라도 있다면 어떠한 기척이라도 느껴져야 할 텐데.
완전히 빈방 같지 않은가?
침상으로 다가간 우벽산이 발을 걷어치우자 텅 빈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사용한 지 한참은 된 것 같군!’
역시 보통 수상한 게 아니다.
냄새가 난다. 아주 미심쩍은 냄새가!
‘아! 비동이 있다고 했었지? 그럼 여기서 이어지는 비동에 아픈 가주가 누워 있거나, 시체가 되어 있을 테지.’
내심 확신한 우벽산이 침실을 꼼꼼하게 살폈다.
별것 아닌 물건을 들어 올려도 보고 벽을 더듬어도 보고, 소복하게 쌓인 먼지를 닦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특별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기관 장치 같은 건 보이지 않는데……’
혹시 침실에서 이어지는 게 아니라, 집무실 쪽이려나?
생각을 바꾼 우벽산이 이번에는 집무실로 다가가서 꼼꼼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장신구를 들었다가 놓는가 하면, 책상 서랍을 하나하나 열어보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역시 책장이 제일 수상한가?’
벽 하나를 가득 채운 책장.
우벽산은 다시 책을 하나하나 꺼내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마침 서책 하나를 빼자 그곳에 손가락만 한 구멍이 나 있는 게 보였다.
‘음? 저건 뭐지?’
그냥 넘기기에는 이상한 기분이 든다.
‘혹시 기관 장치……?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작동하는 거지? 저기로 기풍을 쏘면 되는 건가?’
우벽산이 골몰히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등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불쑥 들려왔다.
“너, 내 방에서 뭐 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