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50화 (51/301)

50. 새옹지마(塞翁之馬)

“적 가주가 멀쩡했다고?”

하기룡이 미간을 구기며 물었다.

우벽산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소. 심지어 아주 건강해 보였소.”

“그럴 리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소. 집무실이 지저분해 보여서 정리 좀 하고 있었다고 대충 둘러댄 걸 믿어주기에 망정이지.”

우벽산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날 등 뒤에서 섬뜩한 소리를 듣고 돌아섰던 그는 그 자리에 석상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너무나 멀쩡한 적비연이 차디찬 눈으로 노려보는 게 아닌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변명을 했고, 다행히 적비연은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다만…….

“날 의심하는 것 같았소.”

“의심을 한다?”

“내가 간자라는 걸 눈치챈 것인지도 모르오! 이제 난 적가에서 거의 소외되고 있소. 모든 일이 내가 모르는 사이에 진행되고 있단 말이오! 어서 날 여기서 꺼내주시오!”

우벽산이 다급한 마음에 하기룡의 옷깃을 잡으며 소리쳤다.

하기룡이 이맛살을 찌푸리더니,

짜악!

“컥!”

우당탕탕!

손찌검에 나가떨어진 우벽산이 사당의 낡은 잡기들을 부수며 나뒹굴었다.

치욕이다.

이런 수치가 없다.

하지만 어디에 가서 하소연할 수도 없다.

애초에 간자가 되길 자청했던 순간 정해진 운명이었다.

‘제길……! 분명 기울어가는 가문이 아니었던가! 어째서…… 어째서 지금은……!’

벽력적가가 기지개를 켜는 것만 같다.

모든 일이 잘 돌아가고 있었다.

만검세가에서 빌린 오십만 냥은 벌써 다 갚고도 남았다.

이대로라면 박쥐처럼 지낸 자신의 신세가 어떻게 될지 불을 보듯 뻔하다.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채 버려지리라.

최악의 경우 운귀처럼 목이 날아갈 수도 있다.

하기룡이 싸늘한 표정으로 옷깃을 털어내고는 말했다.

“운귀가 배신자였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최근 벽력적가에 어떤 변화가 없는지 잘 살펴보시오. 그 변화를 예의 주시하면 분명 어떤 허점이든 발견될 테니. 그 허점만 잘 노린다면 당신은 본가에 중용될 수 있을 거요.”

“알, 알겠소.”

말을 마친 하기룡이 몸을 휙 돌리고 나갔다.

홀로 남은 우벽산이 입가에 맺힌 피를 닦아내고는 침을 탁 뱉었다.

‘제길……! 내가 이런 수모를……!’

하기룡 이 빌어먹을 놈!

새파랗게 젊은 새끼가 적 가주 뺨칠 정도로 싸가지가 없다.

언젠가는 이 수모를 되갚아 주리라.

하지만 당장은 앞에 놓인 살길을 찾아야만 한다.

벽력적가에 생긴 변화라…….

뭐가 있을까? 제일 큰 변화라면…….

아, 천상원!

그래, 뭐가 됐든 일단 천상원으로 가보자.

그곳에 가면 어떤 실마리를 풀어버릴 단서가 있을지도 모르니.

우벽산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의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매서웠다.

* * *

나는 이름이 없다.

사람들은 나를 다면선사라고 부른다.

수많은 얼굴을 가진 자유로운 영혼이…… 긴 개뿔!

털썩!

다면선사가 세공으로 만들어가던 인피면구를 한쪽 구석에 아무렇게나 집어 던지고는 의자에 주저앉았다.

“후우우.”

긴 한숨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토해졌다.

힘들다. 괴롭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단 말인가?

허망한 시선을 돌려 작업 공간 한쪽을 보니 인피면구가 수북하게 쌓여 있다.

모두 벽력적가주의 인피면구였다.

저 많은 인피면구를 도대체 언제 다 쓸까?

하긴, 내 알 바 아니지.

그보다…….

‘으으. 메스꺼워.’

괜히 속이 더부룩하다.

지난번에 삼켜 버린 복혈고가 떠오른 탓이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다가도 그때의 일만 떠올리면 소화가 안 된다.

복혈고가 몸속을 돌아다니며 내장을 갉아대는 것만 같다.

“으으. 싫다.”

한차례 몸서리를 친 다면선사가 배를 쓰다듬었다.

‘내가 먹은 건 암놈일까? 수놈일까? 어쨌든 나머지 한 마리는 아상이 가지고 있었는데, 그가 죽었다고 했으니…… 그럼 누가 가지고 있는 걸까? 천상원주? 아니면 그 칙칙한 호신위가?’

그게 누가 됐든 마음만 먹으면 자신은 고독에 중독되어 죽으리라.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하지만 이래서야…….

다면선사가 좁은 방 안을 훑어보았다.

정말이지 살아도 낙이 없다.

하루 종일 이 좁은 곳에 갇혀서 인피면구만 만들고 있으니, 살아도 산 게 아니다.

“제길! 빌어먹을 내 팔자!”

화가 난 다면선사가 주먹을 꽉 말아 쥐고는 작업상을 거칠게 내려쳤다.

콰앙!

그 순간, 작업상이 밀리면서 옆에 있던 수납장이 기우뚱 기우는 게 아닌가?

“어어?”

우당탕탕! 콰당탕!

수납장이 쓰러지면서 주변의 잡기가 부서지며 온통 난리가 났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방을 보면서 다면선사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맙소사. 이걸 또 언제 정리하지?”

* * *

우벽산이 움찔거리고는 돌아보았다.

천상원 지하를 살펴보다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그가 막 몸을 돌려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미세한 소리가 들렸다.

뭔가가 무너지는 소리랄까?

‘방금…… 뭐지?’

누군가 남아 있는 건가?

하지만 지하실은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분명 아무도 없었다.

온통 약재만 보관되어 있었다.

더 깊은 곳에는 의술에 관한 서책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특별한 점은 없었다.

순간 우벽산의 본능이 신호를 보내왔다.

이건 기회라고.

절대로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고.

자신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고!

우벽산은 본능을 믿기로 했다.

이렇게 강한 충동은 그로서도 처음이었기에.

분명 여기에는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다!

어차피 지금 자신은 언제 운귀와 같은 처지가 될지 모를 상황이 아닌가?

그럴 바에는 뭐라도 저질러야 한다.

성큼성큼 걸어간 우벽산이 지하실 가장 깊은 곳으로 가서 책장을 면밀하게 살펴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잘못 들은 건가?

아니다! 분명히 들었다.

뭔가가 있어!

마음을 굳힌 우벽산이 책장에 꽂힌 낡은 서책들을 마구 꺼내기 시작했다.

바닥에 서책이 아무렇게나 쌓여갔다.

마침내 책장이 텅 비었다.

우벽산은 빈 책장을 이리저리 더듬었다.

‘뭔가 있다……! 이곳에 내가 모르는 뭔가가……!’

그렇게 얼마나 만지고 더듬었을까?

손끝에 뭔가 걸렸다.

자신의 키보다 높은 선반 바닥에 움푹 들어간 곳이 있었다.

우벽산이 손가락에 힘을 주어 꾹 누르자,

절거덕, 기이이잉……!

놀랍게도 책장이 미끄러지듯이 돌아가며 좌우로 열리는 게 아닌가?

‘기관 장치!’

내심 쾌재를 부르던 우벽산은 책장 안쪽을 확인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신은……?”

책장 안쪽, 그러니까 비밀리에 만들어진 그 방 안에서 다면선사가 수납장을 정리하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의 시선이 우벽산 근처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서책들로 향했다.

“저어…… 진동이 거기까지 미친 건가요?”

순간 다면선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공이 늘었나, 하는 생각까지 했다.

한편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한 우벽산이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물었다.

“당신…… 누구요?”

“예? 아…… 그게…….”

다면선사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잠깐, 나를 모른다?

왜?

나를 모르면서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지?

우연인가?

수많은 의문들이 순차적으로 떠올랐다.

“저는 다면선…….”

무심코 대답하려던 다면선사가 순간 움찔거리고는 우벽산을 보았다.

혹시 이게 나에게 유일한 기회라면?

정말 앞으로 남은 인생에서 흔치 않은 기회라면?

심장이 뛴다.

본능이 신호를 보낸다.

이건 기회라고.

절대로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보라.

자신에게 복혈고를 먹인 자들과 한패라면 자신의 정체를 모를 수가 없지 않나?

‘그래!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매 한가지가 아닌가!’

마음을 굳힌 다면선사가 얼른 우벽산에게 달려가 무릎을 꿇고는 바짓단을 붙들었다.

“나리! 저 좀 살려주십시오! 전 여기에 억울하게 잡혀 있습니다! 아무 잘못도 없이 이곳에 갇혀서 저런 걸 만들고 있었습니다!”

“저런 거라니…… 무슨……? 헛! 저건……!”

우벽산의 시선이 작업상 위에 놓인 인피면구를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그러고 보니 이 방에는 같은 모양의 인피면구가 꽤나 많이 쌓여 있었다.

‘맙소사! 전부 적 가주의 인피면구잖아!’

우벽산의 표정을 살핀 다면선사가 기회라는 생각을 더욱 굳히고는 말했다.

“그들이 절 여기에 가둔 겁니다! 그래서 저걸 만들라고 했습니다! 저는 어쩔 수 없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제 몸에 든 복혈고가……!”

“복혈고까지?”

“예, 그들이 제게 복혈고를 먹였습니다!”

“그들이라면 누구 말이오?”

“무림맹 신의 아상과 적 가주의 호신위, 그리고 천상원주도 한 패입니다!”

역시! 그런 것이었나!

적잖은 충격을 받은 우벽산이 다면선사의 어깨를 꽉 쥐며 물었다.

“하면 저 인피면구…… 그러니까 저 얼굴의 주인은? 적 가주를 직접 본 적은 있소?”

“있, 있지요.”

“그는 지금 어디에 있소? 어떻게 됐소?”

“그분은 마치 시체처럼 누워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죽은 것 같지는 않았으나,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습니다.”

“식물인간이라도 된단 말이오?”

“그런 것 같았습니다.”

“그랬군!”

역시다! 이걸로 다 밝혀진 거다!

적 가주가 식물인간이었다니.

이것이야말로 값진 정보가 아닌가?

당장 만검세가로 가서 알려야 한다.

우벽산이 말을 이었다.

“당신이 아는 걸 내게 모두 말해줄 수 있겠소?”

“그, 그럼 저를 여기서 꺼내주실 수 있습니까?”

“물론이오! 내 약속드리겠소!”

“알겠습니다.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벽산의 입매가 치켜 올라갔다.

“잘 생각하셨소.”

* * *

“하아, 우벽산 고놈. 이젠 아주 그냥 내 방을 제멋대로 들락거린단 말이지?”

적비연은 하천웅의 처소 지붕 위에서 단검을 던졌다가 받길 반복하며 중얼거렸다.

생각할수록 괘씸하지 않은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말 같지도 않은 핑계를 대는데도 참아준 건 아직은 좀 더 지켜보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용할 수 있을 때까지는 이용하기 위해서.

‘그래도 너무 쉽게 믿어줬나?’

좀 더 윽박을 지르고 성을 냈어야 했을까?

어쨌든 그 바람에 심영장에서 구입한 마선접비록을 가져오지도 못했다.

이번에 제대로 한 번 읽어보려고 했건만.

‘좀 더 이곳 분위기를 보고 여유가 생기면 가지러 가든지 해야겠어.’

자칫 여기서 자신을 찾는 사람이 생기면 또 부재증명이 어려우니 사달이 날 수 있다.

인피면구가 있다고 해서 남용하면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나저나 이왕 하천웅 몸으로 들어왔으니, 지금부터라도 슬슬 만검세가의 실권을 장악해야겠는데.

문제는 하천웅이 보통 망나니짓을 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하불범은 하천웅을 내놓은 자식 취급했고, 하기룡은 여전히 자신을 냉랭하게 대한다.

그나마 하천웅을 도와주던 철검당주 만대균조차도 등을 돌린 상황.

뭐, 일단 진 총관을 얻었으니 거기부터 시작해 볼까?

적비연이 몸을 일으키고는 목을 우두둑 꺾었다.

그런데 그때,

“음? 저놈은……?”

저만치 우벽산이 걸어오는 게 아닌가?

저 미친놈이 이젠 아예 대놓고 찾아와?

‘가만, 혹시 뭔가 중요한 걸 알아냈나?’

수상한 생각이 든 적비연이 얼른 뛰어내려서 우벽산에게 다가갔다.

“멈춰라!”

그의 부름에 우벽산을 안내하던 시종이 걸음을 멈추고는 고개를 조아렸다.

“이 공자님.”

“안녕하십니까?”

시종과 우벽산이 나란히 인사를 건네왔다.

적비연이 턱짓으로 시종을 물리고는 우벽산을 빤히 보았다.

“이 야심한 시각에 본가에는 무슨 일이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우벽산의 눈빛이 반짝인다.

그는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시종 자신을 무시하며 핍박하는 하기룡보다는 차라리 하천웅에게 이 정보를 말해주는 게 나을 거란 생각이 든 것이다.

어차피 공로를 치하하는 건 하불범이 될 텐데, 그렇다면 하기룡이 잘되는 꼴을 보느니 하천웅을 띄워주는 게 나으리라.

한편 적비연은 기감을 펼쳐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지켜보는 자가 없다.

“따라오시오.”

“예, 공자님.”

우벽산이 얼른 고개를 조아리고는 적비연의 뒤를 따랐다.

처소로 들어온 적비연이 자리에 앉을 것을 권하고는 물었다.

“그래서 긴히 할 말이라는 건?”

“그것이…… 아무래도 적 가주가 식물인간이 된 것 같습니다.”

“뭐요? 그게 정말이요?”

적비연이 내심 놀라며 되물었다.

이놈이 그걸 어떻게 알았지?

적비연이 다그쳤다.

“자세히 말해보시오!”

“예, 공자님.”

우벽산은 신이 나서 그간 있었던 일을 줄줄 읊어댔다.

모든 이야기가 끝나자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렇게 된 거군.”

“그렇습니다! 저도 놀랐습니다. 인피면구로 그리 감쪽같이 속일 줄이야.”

우벽산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고개를 들고 하천웅을 보다가 기겁을 하고 말았다.

“으허억!”

“이렇게 말이오?”

어느새 하천웅이 적비연의 외모로 바뀌어 있는 게 아닌가?

본인의 인피면구를 뒤집어쓴 적비연이 입매를 비틀며 물었다.

“너는 아직도 내가 하천웅으로 보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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