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새옹지마(塞翁之馬)
우벽산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머릿속에 땡벌 몇 마리가 마구 날아다니는 것만 같다.
그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는 물었다.
“인, 인피면구를 쓴…… 거요?”
“뭐, 그런 셈이지.”
“어, 어떻게 그 인피면구를……?”
정말이지 정신을 차릴 수 없다.
지금 앞에 있는 사람은 하천웅인가? 적비연인가?
하천웅이 적비연의 인피면구를 쓴 건지, 아니면 적비연이 하천웅의 인피면구를 쓰고 있다가 벗은 건지 도통 모르겠다.
그때 적비연이 덮어쓰고 있던 인피면구를 뜯어냈다.
얇은 가죽이 뜯겨 나가자 놀랍게도 하천웅의 얼굴이 다시 드러났다.
저 얇은 가죽으로 저렇게나 얼굴이 변할 수 있다니…….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우벽산이 눈을 끔뻑이고만 있자 적비연이 히죽 웃었다.
“자, 문제를 내지. 나는 과연 적비연일까? 하천웅일까?”
“이, 이게 대체…….”
우벽산이 말을 더듬으며 허둥거렸다.
설마 적 가주인가?
하지만 그럴 리가 없지 않나?
그러고 보니 하천웅은 얼마 전에 운귀가 죽을 때 내력이 폭주하여 쓰러졌다고 들었다.
그런데 벌써 기운을 차리고 일어났단 말인가?
아니면 혹시 적 가주가 하천웅을 암살하고 인피면구를 써서 그의 행세를 하고 있는 건가?
짧은 시간 우벽산의 머릿속에서는 그야말로 온갖 망상이 다 스쳐 지나갔다.
곧 우벽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무 억측이야.’
아무래도 적비연이 하천웅인 척할 가능성은 적다.
굳이 그래야 할 이유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역시 이자는 하천웅이리라.
원래 망나니짓을 잘 하기로 소문난 자가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짓인지.
‘형이나 동생이나 대놓고 날 무시하는 건 똑같군!’
하천웅이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하자, 우벽산은 내심 불쾌한 생각이 들었다.
그가 정색하며 대꾸했다.
“농이 지나치시오. 어찌 이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데 이런 수준 낮은 장난질이요?”
그러자 하천웅의 얼굴로 돌아온 적비연이 일순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이 어찌나 차가운지 큰소리를 친 우벽산조차 내심 움찔거리고 말았다.
“어이, 우 총관.”
“예? 아, 아니. 뭐, 뭐요?”
제길, 자신도 모르게 존대가 나가 버렸다.
적비연이 우벽산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내가 묻잖아. 아직도 내가 하천웅으로 보이냐고.”
순간 우벽산이 움찔 떨었다.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팔뚝을 따라 소름이 오소소 돋아난다.
왜였을까?
‘조금 전…… 이자에게서 적 가주의 얼굴이 보였던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한데 자꾸만 최악의 상황이 떠오른다.
“대, 대체 이게 무슨……?”
“대답 안 해? 여전히 수준 낮은 장난질로 보이나?”
순간 적비연이 사기를 살짝 섞어 진득한 살기를 흘렸다.
우벽산은 이제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진짜 적비연인가?
‘그럴 리가 없잖아! 분명히 하천웅이다! 적비연의 얼굴은 인피면구로 가린 것일 뿐이었어!’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쫄리는 걸까?
마치 적 가주가 매우 분노했을 때 그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기분이다.
“대체…… 왜 이러는 거요? 나는 귀한 정보를 주었는데…….”
우벽산이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하자, 적비연이 살기를 거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넌 귀한 정보를 가져왔어. 날 만검세가에 팔아먹었지.”
“대체 또 무슨 말장난을……!”
순간 적비연이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콰앙!
거친 소리와 함께 탁자 한쪽 모서리가 맥없이 부서져나갔다.
“이 지경이 되어서도 너는 내가 하천웅으로 보이는가 보군. 확실히 이럴 땐 이런 외모가 편한 점도 있네. 운귀보다 의심은 덜 받을 테니까.”
한쪽 입매를 치켜올린 적비연이 과거 우벽산과 있었던 일을 줄줄 읊기 시작했다.
적비연이 아닌 이상 알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하나씩 이야기가 풀어질 때마다 우벽산의 표정이 점점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는 그제야 확신하게 됐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자는…….’
적 가주가 틀림없다!
우벽산이 심호흡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하나만 묻겠소.”
“뭐야?”
“지금의 그 모습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소?”
“네가 알고 있듯이 나는 식물인간이 되었지만, 유체가 이탈해서 하천웅의 몸에 들어온 거라고 보면 된다.”
“하면 영혼이 하천웅의 몸에……?”
말을 꺼내던 우벽산이 흠칫거리고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적비연을 보았다.
‘이런 미친……!’
설마 마교의 이혼대법(移魂大法)을 쓴 것인가!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적비연에게서는 다소 사특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던가?
‘그렇구나! 자세한 경위는 모르겠지만 죽을병에 걸린 적 가주가 마지막 몸부림으로 이혼대법까지 손을 댄 것이리라! 그런데 내가 그것도 모르고 여기 와서 모든 걸 줄줄 늘어놓았으니……!’
우벽산이 단단히 착각하고는 입술을 쿡 씹자, 적비연이 즐기듯 물었다.
“이제 좀 감이 와?”
“가, 가주님…….”
“그래. 이제 알아보네. 어제는 내 방을 네 멋대로 들락거리더니, 오늘은 또 여기에서 보네?”
“죄, 죄송합니다!”
일단 살고 봐야 한다.
우벽산이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그 자리에서 무릎을 털썩 꿇었다.
적비연이 방 한쪽 구석으로 걸어갔다.
“뭐,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지만 비상용으로 가져오길 잘했네.”
적비연이 멀어지자 우벽산이 빠르게 눈치를 살폈다.
‘지금이라면……!’
멀리 갈 것도 없다.
이 처소만 벗어나자마자 큰 소리로 도움을 요청하면 된다.
하천웅이 적비연이라고 하면 모두가 미쳤다고 하겠지만, 기회만 주어지면 얼마든지 믿게 만들 방법은 있으리라.
좋아, 지금이다!
결단을 내린 우벽산이 온 힘을 다해 몸을 날렸다.
파바밧!
하지만 적비연은 초절정의 경지에 이른 몸이었다.
게다가 타인의 기감을 귀신처럼 눈치챌 수 있는 호신위 경험도 있었다.
그대로 우벽산을 놓칠 리가 없었다.
“어딜 가려고.”
턱!
막 문을 벗어나려던 우벽산이 그 자리에 멈춰 서서는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이, 이럴 수가……!”
그야말로 눈 깜빡할 사이에 적비연이 앞을 막아선 게 아닌가?
도대체 어느 틈에……?
우벽산이 그대로 몸을 돌리려는 순간,
핑! 피피잉!
적비연이 손가락을 튕겨 세 줄기의 지풍을 날렸다.
푹푹푹!
순식간에 마혈을 점혈 당한 우벽산이 그 자리에서 굳은 듯 선 채로 꿈쩍도 하지 못했다.
내공을 운기해서 마혈을 풀어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 이 정도 수준이라니……!’
이건 분명 적 가주의 수준도 뛰어넘은 게 아닌가?
적어도 예전의 적 가주라면 지풍만으로 자신의 마혈을 점할 정도는 아니었다.
뚜벅뚜벅.
적비연이 우벽산에게 다가왔다.
“너, 아상 어르신을 마중하러 가는 날. 일부러 무공 수준이 낮은 자들로 채운 거지?”
“…….”
“아혈은 점하지도 않았는데, 말을 안 하네?”
푸욱!
적비연이 무심한 듯 명치 쪽에 단검을 쑤셔 넣었다.
“크아아악!”
우벽산이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자, 적비연이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사악하게 웃었다.
“쉿. 조용히 하자고. 다들 자는 시간이잖아?”
창가에서 스며드는 달빛에 적비연의 미소가 섬뜩하게 비쳤다.
‘이, 이 새끼는 괴물이다! 마공을 써서 그런지 전보다 훨씬 악독해졌어! 이 미친 새끼!’
적비연이 다시 서늘한 표정이 되어서 말했다.
“다시 묻는다. 아상 어르신을 마중하던 날, 너는 모든 걸 다 알고 있었지?”
“…….”
“배가 간지러운 모양이군. 좀 더 긁어줘야겠네.”
쑤욱!
“크아아아악!”
우벽산이 다시 비명을 내질렀다.
피가 주르륵 흐르자, 적비연이 친히 점혈로 지혈해 주었다.
“어차피 대답도 안 하는데 네 몸은 그냥 칼집으로나 써야겠구나.”
적비연이 다시 단검을 찌르려고 하자,
“마, 맞습니다! 일부러 그랬습니다!”
“역시 그랬군. 그날 죽었던 남운재라는 녀석이 있어. 그놈이 만검세가 수색조 놈들을 개박살 냈었지. 그때 포상도 제대로 하지 않았지?”
“그, 그건 어떻게……?”
따악!
적비연이 우벽산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정말이지 눈물이 찔끔 날 만큼 아프다.
골이 울리니 찔렸던 배가 더욱 아파오는 것만 같다.
“어우, 내가 그때 생각만 하면 지금도 분해서 잠이 안 와.”
“죄, 죄송합니다.”
“넌 앞으로 이중 첩자 노릇을 해줘야겠다.”
“이중…… 첩자?”
죽이진 않겠다는 뜻인가?
하지만 자신을 어찌 믿고?
“당연히 나는 널 믿지 않아. 그래서 안전장치를 걸어둘 거다.”
“무슨…….”
우벽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적비연이 손을 뿌렸다.
쉬쉬쉭!
푸푸푹!
순식간에 손을 떠나간 세침(細針) 세 자루가 우벽산의 요혈에 각각 꽂혔다.
따끔하긴 했지만 다행히 큰 고통은 없었다.
우벽산이 이게 뭐냐는 듯 바라보자, 적비연이 입매를 치켜올렸다.
“사활침이라는 거다. 내게 한 달에 한 번씩 침을 맞지 않으면 넌 지독한 고통에 시달리다가 칠주야 안에 죽게 될 거다. 그게 어느 정도 고통인지 궁금하지?”
우벽산이 열렬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혀 궁금하지 않다.
알고 싶지도 않고.
하지만 적비연은 친절했다.
“그래, 궁금할 거야. 그걸 알려줘야 너도 더 믿을 테니까. 그게 어느 정도의 고통이냐면…….”
“괜, 괜찮소. 알려주지 않아도 충분히…….”
푹!
가까이 다가온 적비연이 우벽산의 기사혈(氣舍穴)에 침을 놓았다.
그 순간,
“끄아아아악! 우아아악!”
우벽산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사지가 찢어져 나가고 생살이 불에 타들어가는 것만 같다.
“시끄럽네.”
탁.
“으읍……!”
적비연이 아혈까지 점해 버리자 우벽산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얼굴이 시뻘게져서 괴로워했다.
만약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제발 그만 괴롭히고 이제 죽여달라고 애원을 했을지도 몰랐다.
대략 반각이 지나서야 적비연이 모든 침을 뽑아냈다.
그러자 생살이 뜯겨져 나가는 고통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헉, 헉, 헉……!”
마지막으로 마혈과 아혈을 풀어주자 우벽산이 그 자리에 털썩 쓰러진 채로 부들부들 떨었다.
적비연이 그제야 조금은 만족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야 분이 조금 풀리네. 그간 내가 널 얼마나 벼르고 있었는지 몰라.”
“시,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제발 용서를……!”
우벽산이 눈물과 콧물을 줄줄 흘리며 애원했다.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내 사람에게 이런 짓하는 게 참 마음이 아프다. 아무튼 그 사활침의 효력을 없앨 방법을 아는 사람은 중원 천지에 나밖에 없다는 것만 알아둬. 정 의심스러우면 모험을 해봐도 좋고.”
“의심하지…… 않습니다.”
우벽산이 몸서리를 쳤다.
적비연이 입매를 치켜올렸다.
당연한 반응이다.
그 지옥보다 더한 고통을 한 번이라도 맛본 자라면, 감히 다시 겪을 용기가 나지 않을 테니.
인간은 결국 죽음이 두려운 게 아니다.
고통이 두려운 것이다.
우벽산은 이미 그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한 번 몸소 겪었다.
죽어도 다시 겪고 싶지 않으리라.
“이제부터 하기룡과 나눈 모든 대화는 나에게 보고하도록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천상원주에게 가서 심영장에서 산 서책을 달라고 해서 가져와라. 이왕이면 기운을 숨길 수 있도록 해서. 그렇게 말하면 알 거다. 그럼 가봐.”
“알겠습니다.”
허리를 꾸벅 숙인 우벽산이 주춤주춤 눈치를 보며 물러나다가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허겁지겁 달려갔다.
적비연이 기분 좋게 미소 짓고는 침상으로 갔다.
“그럼 기분 좋게 잠이나 자볼까?”
* * *
다음 날.
하불범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기룡은 눈살을 잔뜩 찌푸렸고, 그 외의 수뇌인사들은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수군거렸다.
하불범이 목을 가다듬고 물었다.
“커험. 웅아, 지금 뭐라고 했느냐?”
적비연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제게도 만검세가의 가주가 될 기회를 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