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천하용봉(天下龍鳳)
한 시진 전.
적비연은 총관 진서국을 찾아갔다.
진서국은 적비연을 시종 깍듯하게 대했다.
그럴 수밖에.
죽어가던 아들을 살려준 귀인이 아니던가?
지금도 그 당시만 생각하면 머리끝이 쭈뼛 설 정도로 아찔했다.
어떻게 얻은 귀한 아들인데…….
진서국은 적비연에게 상석을 내어주며 값비싼 차를 대령하게 했다.
한 잔 구경하기도 힘들다는 대홍포(大红袍)라는 차였다.
원산지가 사파의 영역인 복건성(福建省) 무이산(武夷山)이었기에 이곳에서는 더욱 귀하게 여겨지는 차였다.
차를 한 모금 마신 적비연이 곧바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사실 내가 총관을 찾아온 이유는 따로 있소.”
진서국은 놀라지 않았다.
이미 짐작한 바였다.
“말씀하시지요. 어떤 내용이든 공자님을 위해서라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적비연이 그런 진서국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의외로 의리는 있구나.
만검세가에는 전부 되바라진 놈들밖에 없을 줄 알았는데.
하긴 그리 애지중지하는 자식을 살려줬으니.
적비연이 속내를 숨기고는 말했다.
“알다시피 그동안 나는 본가에서 망나니짓을 많이 해왔소.”
“아닙니다. 어찌 그런 말씀을…….”
“애써 부인할 것도 없소. 나 스스로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하지만 지금부터는 과거와 다른 삶을 살고자 하오.”
“무슨 말씀이신지……?”
진서국이 고개를 들고 적비연을 보다가 흠칫거렸다.
확실히 눈앞의 하천웅은 평소와 완전 다른 모습이었다.
눈빛이 깊고 맑다.
항상 짜증과 불만이 가득했던 표정도 지금은 평온하기만 하다.
마치 다른 사람을 대하는 기분이다.
사람이 삼도천을 건넜다가 돌아오면 변한다더니…….
‘정말 그런 것인가?’
진서국의 시선을 담담히 받아내던 적비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이제부터 무엇을 하든 나를 따라주실 수 있겠소?”
“그건 이미 전에도 맹세하였습니다. 아들의 목숨을 구해주신 은혜, 아비 된 자로서 평생 동안 갚아도 부족할 것입니다.”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럼 총관께서 오늘 현검회담(現劍會談)을 열어주시오.”
“현검회담을요?”
진서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현검회담이란, 만검세가에서 갑작스럽게 공표할 일이 있거나 비상상황이 발생했을 때 가내의 수뇌인사들을 모두 가주전으로 불러 회의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현검회담을 열 수 있는 자격은 가주와 소가주 그리고 총관뿐이었다.
다음 순간 적비연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총관께서 날 가주로 만들어주시오.”
“알겠습…… 쿨럭! 네? 방금 뭐라고 하셨…….”
“들으신 그대로요. 총관께서 날 가주로 만들어주었으면 하오.”
“그건…….”
“왜? 불가능하오?”
진서국이 무심결에 ‘예’ 하고 대답하려다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한 요구였다.
‘갑자기 가주라니……?’
아니, 평소에 그렇게 행동을 했으면서 이제 와서 가주가 되고 싶다는 건가?
차라리 소가주를 더 이상 밀어주지 말라거나, 자신보고 만검세가를 떠나 버리라고 한다면 모를까?
그래, 그런 요구라면 얼마든지 들어주겠다.
귀한 아들을 죽음에서 되살려주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말이 안 되잖아.’
그러거나 말거나 적비연은 할 말을 이어갔다.
“알고 있소. 이미 기울어진 판이라는 것.”
‘그걸 알면서 그런 말을 하십니까?’
진서국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꿀꺽 삼키고는 가만히 기다렸다.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되돌려 보고 싶소. 아버지에 대해서는 진 총관께서 잘 알지 않소?”
‘잘 알기 때문에 더 힘들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물론 이 말도 꿀꺽 삼켰다.
대신 적비연을 가만히 보기만 했다.
마냥 무시하기에는 적비연의 표정이 너무나 진중했기에.
“아버지를 설득시킬 방법이 없겠소?”
진심이구나.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진서국은 긴 숨을 내쉬었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진서국은 무거워지는 침묵만큼이나 이 공자가 진심으로 하는 얘기라는 걸 실감했다.
마침내 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말씀하신 대로…… 소가주님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게다가 최근 공자님의 연이은 실수로 가주님의 신뢰를 잃은 것도 사실이지요. 기울어진 판, 맞습니다. 다만…… 기회가 아주 없는 건 아닙니다.”
“그 기회를 얻을 방법이 무엇이겠소?”
“쉽지만은 않은 방법일 겁니다.”
“말해보시오.”
적비연이 입매를 희미하게 올렸다.
진서국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째서 이 망나니 공자를 믿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의 아들을 살렸기 때문에?
아니다.
분명 그것만은 아니다.
지금 눈앞의 이 공자는 확실히 예전과 다른 느낌이 든다.
정말 죽다 살아나더니 사람이 변한 건가?
그래, 어차피 아들을 되살린 순간 맹세하지 않았던가?
하천웅을 위해서라면 불구덩이에도 뛰어들겠다고.
마음을 굳힌 진서국이 달라진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우선 현검회담(現劍會談)을 열겠습니다.”
* * *
하불범이 뭐라고 말을 잇지 못하자, 하기룡이 이맛살을 팍 구기며 나섰다.
“이제 와서 무슨 헛소리냐? 그딴 헛소리를 지껄이려고 총관님에게 이런 무리한 부탁까지 했던 것이냐?”
전에 없이 그의 언성이 높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동생의 발언은 현재 소가주인 자신에게 정면으로 도전하는 내용이 아닌가?
하불범도 이번만큼은 하천웅의 편을 들어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웅아, 네가 아무리 철이 없기로서니 이런 말도 안 되는 투정을 부릴 줄은 몰랐구나. 이미 네 형이 소가주로 임명됐다는 걸 모르느냐?”
“오래전에 아버지께서 그러셨지요. 소가주는 형님으로 임명하지만, 언제든 그 자리는 바뀔 수 있다고. 누구든 본가를 빛내고 우수한 능력을 인정받으면 가문을 이을 자격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랬지. 하지만 너는 가문을 빛내기는커녕, 자칫 가문을 빚더미에 앉힐 뻔했지.”
“제 실수를 인정합니다. 그래서 제게 한 번 더 기회를 달라는 겁니다. 실수를 만회하고 저를 다시 평가할 수 있는 기회를요. 단 한 번이면 됩니다.”
“이미 숱하게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적비연이 말을 이어가려고 하자, 하불범이 더 이상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만. 죽다 살아나서 뭔가 좀 달라지길 기대했건만, 몹시 실망이구나. 오늘은 이만 자리를 파하도록 한다. 총관! 아무리 웅아의 부탁이라고는 하나, 고작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현검회담을 연 것은 그대의 잘못도 있소!”
그러자 진서국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가주님, 제 생각에는 이 공자님의 말씀도 충분히 일리는 있다고 보여 집니다.”
“뭣이?”
하불범은 물론 하기룡과 다른 수뇌인사들도 웅성거리며 서로를 보았다.
총관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하기룡이 코웃음을 쳤다.
“진 총관께서 그간 아들 문제로 마음고생을 하시더니, 판단력이 흐려지셨나 봅니다. 도대체 어디에 일리가 있다고 느끼신 겁니까?”
진서국이 슬쩍 적비연을 보았다.
적비연이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이 공자님의 제안입니다만, 조만간 서안에서 치러질 천하용봉대회(天下龍鳳大會)에서 우수한 성적을 보여 가문을 빛내는 것과 동시에 능력을 입증해 보이겠다고 하셨습니다.”
순간 장내가 술렁였다.
천하용봉대회.
무림맹이 위치한 서안에서 중원 각지의 후기지수들을 상대로 이 년마다 한 번씩 치르는 큰 행사다.
이 천하용봉대회에서 십이(十二) 위 안에 들면 강호를 빛낼 십이용봉(十二龍鳳)으로 불리게 되며 무림맹에서도 상당한 지위를 확보할 수 있다.
다만 만검세가는 이번 대회에 굳이 참여할 의사가 없었다.
이미 만검세가는 무림맹에서도 상당한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다.
하기룡의 능력이 우수하긴 하지만 만에 하나 십이용봉이 되지 못하면 괜히 지금의 지위마저 흔들릴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게다가 후기지수 대회라고는 하지만 서른 살까지 출전할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미루고 미루다가 무공 실력이 한껏 상승했을 때 출전하는 게 보통이었다.
한데 하천웅이 천하용봉대회에 나가겠다고 선언할 줄이야.
하불범이 적비연을 보았다.
“천하용봉대회라면 중원 각지의 내로라는 후기지수들이 대거 몰려와서 치르는 수준 높은 대회다. 그곳에서 네가 십이용봉에 들지 못한다면…….”
“상관없지 않습니까?”
“뭣이?”
“어차피 형님이 아니라 제가 출전하는 겁니다. 설혹 제가 십이용봉이 되지 못하더라도 소가주가 직접 참가한 게 아닌 이상 본가는 잃을 게 없지요.”
“끄음.”
하불범이 입을 다물었다.
어느 정도 일리 있는 말이긴 하다.
사실 아닌 게 아니라, 그런 생각을 아예 안 한 것도 아니다.
다만 이 공자라고 해도 어쨌거나 가문의 얼굴이다.
괜히 참여했다가 밑바닥에서만 놀다오면 그 또한 망신이다.
해서 애초에 권유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한데 먼저 출전을 하겠다고 나올 줄이야.
게다가 가주의 자리를 노릴 각오라니.
하기룡이 코웃음을 쳤다.
“네가 집안에서만 뒹굴다 보니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모양이구나. 천하용봉대회는 애들 놀이터인 줄 아느냐?”
“형님이 출전할 게 아니면 좀 가만히 계시지요.”
“뭐, 뭣이?”
하기룡이 눈썹을 꿈틀거리고는 적비연을 쏘아보았다.
적비연 역시 그런 하기룡을 묵묵히 응시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맹렬하게 부딪쳤다.
‘이놈……! 뭐지? 뭘 믿고 이런 기세를……!’
하기룡은 어쩐지 동생이 사뭇 낯설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는 사이 수뇌인사들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펼쳐졌다.
총관 진서국은 열심히 적비연의 입장을 대변했다.
그때 철검당주 만대균이 하기룡에게 전음을 보내왔다.
[차라리 잘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천하용봉대회에 나가서 된통 망신을 당한다면 더 이상은 오르지 못할 나무를 쳐다보지도 않을 것입니다.]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십이용봉이 된다면?]
[흐음.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소가주님도 출전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내가 말이오?]
[그렇습니다. 혹여 이 공자가 십이용봉이 될 정도의 대회 수준이라면, 소가주님은 당연히 그 이상이 되고도 남지 않겠습니까? 천하일룡(天下一龍)이 되실지도.]
천하일룡은 천하용봉대회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을 거둔 자를 의미했다.
만약 그 대상이 여자일 경우에는 천하일봉(天下一鳳)이라 불렀다.
하기룡이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만대균의 전음이 이어졌다.
[설혹 천하일룡이 되지 못하더라도 이 공자님보다는 분명 우수한 성적을 거두실 테니, 더 이상 이 공자님도 어찌할 방법이 없을 겁니다.]
확실히 일리가 있다.
지금의 자신이라면 적어도 십이용봉은 될 수 있으리라.
굳이 출전을 피할 이유도 없다.
마음을 굳힌 하기룡이 한 걸음 나서더니 포권하며 말했다.
“아버지, 웅아가 저리도 원하니 출전을 허락하시는 게 어떨지요? 더불어 저 역시 이번 천하용봉대회에 출전하겠습니다.”
“룡아, 너도?”
“예, 아버지. 저도 가문을 빛낼 기회를 얻고 싶습니다.”
“흐음.”
하불범이 다시 침음을 흘렸다.
그가 넌지시 한 손으로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얼마 전, 적비연에게 발로 얻어맞은 곳이기도 했다.
‘어디 한번 시험은 해볼까?’
하불범이 단상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좋다. 단, 웅아는 내 시험을 통과해야만 한다.”
“시험이라면……?”
“내 일권(一拳)을 막아보아라.”
다시 장내가 술렁거렸다.
하기룡이 눈살을 구겼다.
‘아예 출전을 불가하실 셈이신가? 아니면…….’
일부러 약하게 쳐서 기회를 제공하실 지도 모를 일이다.
아버지는 늘 동생에게 관대하셨으니까.
적비연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답했다.
“알겠습니다. 해보겠습니다.”
“그럼 여기서 바로 시작하겠다.”
“예, 아버지.”
적비연이 천천히 방어 자세를 취했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후우우웅!
한 줄기 미풍이 불면서 하불범의 장삼 자락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내공을 끌어올린 탓이다.
다음 순간,
쉬이이잇!
하불범의 주먹이 질풍처럼 뻗어나갔다.
동시에 적비연이 쌍장을 뻗어냈다.
쩌어엉!
기의 폭발과 함께 사방으로 기풍이 훅 불어나갔다.
다음 순간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하불범과 적비연을 보았다.
“저럴…… 수가……?”
“제자리에서 조금도 밀리지 않고 막아내다니?”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하불범이었다.
‘이 녀석이……?’
뭔가 달라졌구나!
한편 천천히 자세를 바로잡은 적비연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제 가도 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