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천하용봉(天下龍鳳)
하기룡이 두 눈을 부릅떴다.
믿을 수가 없었다.
‘저 녀석이 아버지의 주먹을……?’
하지만 놀라움도 잠시, 하기룡의 미간이 팍 일그러졌다.
아버지가 일부러 봐주셨구나!
그러지 않고서야 저런 일이 일어날 수는 없다.
자신조차도 아버지의 일권을 받으려면 몇 걸음은 물러날 수밖에 없으리라.
힘을 빼신 거다.
그것도 아주 많이!
‘너무하시군요. 아버지.’
이렇게 눈앞에서 보란 듯 봐주실 줄이야.
매번 마지막 기회가 어쩌고저쩌고 하셨지만, 역시 아버지는 하천웅을 마음에서 완전히 놓지 못한 것이다.
하긴 아버지는 항상 그러셨다.
어머니보다 첩이었던 그 여자를 더 사랑하셨고, 그 질투심을 이기지 못해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아버지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으신 분이다.
하지만 그 여자가 괴한들에게 당해서 죽었을 때는 몇 날 며칠 식음을 전폐하고 세상을 다 잃은 사람처럼 사셨다.
‘흥! 좋습니다. 끝까지 그렇게 감싸 보시죠. 그럴수록 저 녀석은 더욱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겁니다.’
하기룡이 어금니를 까득 갈았다.
동생이 가주의 자리를 대놓고 노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가진 능력에 비해 욕심이 많은 아이라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능력은 쥐뿔도 없으면서 온갖 사고만 쳐대니 견제할 것도 없는 녀석.
그런 놈이 감히 자신의 자리를 넘봐?
‘아버지가 녀석에게 어떤 기대를 품든 커지는 건 실망뿐일 겁니다!’
생각을 마친 하기룡이 몸을 휙 돌리고는 가주전을 빠져나갔다.
한편 아직 자리에 남은 수뇌인사들이 놀란 표정으로 떠들어댔다.
“맙소사, 이 공자께서 무공이 느셨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근래에 깨달음이라도 얻으신 모양입니다.”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가주님의 일권을 저리 가벼이 받아내실 줄이야.”
하지만 그들은 찬사를 쏟아내면서도 은밀히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사실 그들 중 누구도 이것이 진짜 하천웅의 실력이라고 믿지 않았다.
무공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그리 발전할 리가 있겠나?
그들은 하기룡과 같은 생각이었다.
‘가주님이 여전히 이 공자께 미련을 버리지 못하셨군.’
‘그렇다면 우선은 반대만 하고 볼 일은 아니지.’
‘뭐, 대회에서 망신을 제대로 당하면 그땐 가주님도 포기하실 테니.’
하지만 그들의 생각과 다른 사람도 있었다.
바로 총관 진서국이었다.
그는 눈에 힘을 주고는 적비연을 응시했다.
‘역시 그날, 이 공자의 힘이 우연은 아니었구나.’
잠자는 아들을 깨우지 않으려고 이 공자의 앞을 막아섰던 날, 자신이 일장을 얻어맞고 튕겨 날아가지 않았던가?
영문은 모르겠지만, 죽을 위기를 겪은 후로 확실히 이 공자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놀란 또 한 사람.
‘이 녀석……! 역시 내가 바로 보았군.’
하불범이 자신의 주먹을 어루만지다가 슬쩍 배를 쓰다듬었다.
어찌 된 일인지 둘째 아들의 무공이 급격하게 늘었다.
짐작되는 것은 하나.
하천웅의 체내에서 터진 폭기가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준 것이리라.
마침내 하불범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다. 천하용봉대회에 나가는 것을 허락하마. 단, 십이용봉에 들지 못한다면 오늘 네가 한 이야기는 못 들은 것으로 하겠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적비연이 입매를 치켜올리며 포권했다.
* * *
“천하용봉대회에 참가하시겠다고요?”
단휘가 입을 딱 벌리며 물었다.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버지…… 아니, 하불범도 허락했다.”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단휘가 손가락을 딱 튕겼다.
“아하! 대회에 참가해서 아주 개망신을 톡톡히 당하시려고 그러는군요?”
적비연이 이맛살을 슬쩍 구겼다.
“왠지 지금 날 무시하는 것 같은데?”
“그럴 리가요! 단지 가주님이 하천웅의 모습을 하고 계시니까 지레짐작했을 뿐입니다.”
“그 반대야.”
“그 반대라면……?”
“최선을 다해서 십이용봉에 들 생각이다. 이왕이면 천하일룡을 노릴 거고.”
“예에에엑?”
단휘가 놀라서 소리쳤다.
옆에 있던 묵검과 예홍도 뜻밖이라는 표정이었다.
오로지 은하란만 시종 차분한 표정으로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단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만검세가를 띄워주는 셈이 되잖아요?”
“그렇겠지. 그래도 상관없다. 그땐 내가 가주가 될 수 있을 테니.”
“아! 그런 깊은 뜻이…… 그런데 소가주는 하기룡 아니었습니까? 하불범이 그렇게 순순히 가주 자리를 줄까요?”
“이 집안 속사정을 살펴보니 좀 복잡하더라고. 그 부분을 잘 노려본다면 만검세가주가 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렇군요. 하지만 가주님 혼자서 서안으로 가신다는 건 좀 위험하지 않습니까?”
“위험할 건 없지만, 심부름꾼이 없으니 불편할 수는 있겠지. 그래서 찾아온 거야.”
“가주님, 이왕이면 좋은 말로 조력자 정도로 해주시면 안 됩니까? 심부름꾼은 좀…….”
“싫으면 넌 빠지면 되고.”
“생각해 보니 심부름꾼도 어감이 꽤 좋군요.”
“태세 전환이 빠르다?”
“그야 당연히 가주님을 위해서라면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하는 저니까요.”
“홍월루 때문이 아니고?”
“물론 그것도…… 어엇! 때리지 마십시오! 저 혈액순환 무척 잘되고 있습니다!”
“눈치는 빨라가지고는.”
손을 들어 올리던 적비연이 아쉽다는 듯 혀를 차고는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너희 세 사람이 서안으로 가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휘와 홍은 대회에 참가 신청을 내도록 하고.”
“예? 저희도 참가하라고요?”
“그래야 만검세가에서 보기에도 이상하지 않을 것 아니냐?”
“아, 그렇긴 하네요.”
“잘해서 두 사람 모두 십이용봉에 들어라. 천상단까지 복용했으니 성취가 꽤 있었을 거다. 너희들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어. 이왕이면 우리도 가문을 빛내야지?”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단휘가 기운차게 대답했다.
하지만 옆에 선 예홍의 반응은 영 딴판이었다.
“틀렸어요. 저 같은 건 그런 곳에 나가봐야 일각도 버티지 못해 탈락할 거예요. 아마 밑바닥에서 기다가 이름도 모를 무인의 칼에 찔려 죽을지도 모르죠. 대회라고는 하지만 진검이 허용되니까 오래 살긴 힘들겠네요.”
으, 또 시작이다.
저럴까 봐 면전에서는 얘기를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하하…… 하…….”
단휘가 어색하게 웃으며 예홍의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아. 너 정도면 충분히 잘할 거야. 내가 도와준다면…….”
“역시 틀렸어. 이런 얼빠진 녀석의 도움을 받았다간 더 위험해질 거야. 난 이미 저승 강을 반쯤 건넌 셈이야.”
“야! 우리도 충분히 강하다고! 그리고 후기지수들만 모여서 치르는 대회잖아!”
“후기지수라고 해도 강호 무인은 바닷가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아. 그중에 네가 눈에 띌 진주가 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 모르겠지? 역시 넌 우물 안의 개구리일 뿐이야. 우린 둘 다 개죽음을 당할 거야. 다 끝장이라고…… 가주님은 우리에게 죽을 것을 명한 것이나 다름없는 거야…… 눈치 없는 녀석…… 가주님, 저희의 죽음으로 생각해두신 계획이 있다면 기꺼이 거름이 되어드릴게요.”
적비연이 입을 척 벌리고는 기운 빠진 표정으로 묵검을 돌아보았다.
묵검도 포기했는지 눈을 지그시 감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뿐이었다.
단휘가 울상이 되어서 소리쳤다.
“가주님! 저 출전 안 할래요! 얘 말 듣다 보니 무서워요!”
“이리와 봐. 진짜 무서운 게 뭔지 알려줄게.”
“아니, 왜 자꾸 저만 가지고 그러세요? 쟤는 저보다 더한데!”
“저 녀석은 내가 건드릴수록 피곤해지니까 그렇지!”
“그럼 저도 피곤하게 굴래요!”
“좋아, 오늘 우리 모두 한번 진탕 피곤해져 보자.”
“진짜 너무하시네! 가주님 미워!”
“저, 저……!”
말을 마친 단휘가 창밖으로 몸을 훌쩍 날리며 달아나 버렸다.
뒷목을 잡던 적비연이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옛날 생각 나네.’
별로 오래전도 아니건만, 마치 몇십 년 전의 일인 것만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적비연은 수십, 아니, 수백 년에 달하는 기억을 보유하고 있었다.
실제로 물리적인 시간은 그리 많이 흐르지 않았지만, 그의 정신이 겪는 시간은 차원이 달랐다.
그러다 보니 매순간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적비연은 여전히 세상 다 끝났다는 듯 중얼거리는 예홍을 무시하고는 은하란에게 걸어갔다.
척!
적비연이 품에서 서책을 꺼내 책상에 던졌다.
“다시 가져 오셨네요?”
은하란이 물었다.
적비연이 꺼내둔 것은 우벽산을 시켜 가져오게 했던 마선접비록이었다.
적비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뭘 알아먹어야 읽든지 하지. 죄다 고대어로 적혀 있어서 한 글자도 읽지 못하겠더라고. 대체 무슨 내용이지?”
“쉽게 말해서 내공을 운기하는 방법이 핵심이니까 심공서 같은 거라고 보시면 되겠네요.”
“역시 이 서책에 대해서 알고 있군?”
“조금은요.”
“그럼 내가 알아볼 수 있게 다시 적어줄 수도 있을까?”
은하란이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좋아, 그리고 은 원주도 함께 서안으로 가줘야겠어. 혹시라도 그 심공서를 익히다가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니까.”
“이젠 절 믿으시는 건가요?”
적비연이 피식 웃었다.
“아니. 그 반대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바로 책임을 따지기 위해서니까.”
* * *
“뇌검대주 단휘와 진천대주 예홍이 대회에 참가한다고?”
하기룡의 물음에 우벽산이 답했다.
“그렇소. 적 가주는 그 두 사람의 능력을 꽤나 신뢰하고 있소.”
“흐음. 하긴 적 가주가 직접 참가할 수는 없을 테니.”
하기룡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로만 따진다면 적비연도 후기지수라고 할 수 있지만, 가주나 문주 등 문파의 수장은 참가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다만 아무도 참가하지 않을 거라는 예상을 깨긴 했다.
그 정도로 두 사람이 강하다는 건가?
뭐 어차피 누가 참가하든 상관없다.
자신이 그들에게 밀리진 않을 테니.
오히려 지금 신경 쓰이는 건 동생이다.
평소라면 거들떠도 보지 않았겠지만, 이상하게 요즘 계속 신경이 쓰인다.
하기룡은 생각을 떨쳐내고는 물었다.
“알아보라고 한 건 어떻게 됐소?”
“천상원도 조사해 보고, 가주전도 살펴보았소. 하지만 특별히 이상한 점은 없었소. 오히려 최근에는 가주님이 내게도 자주 모습을 보이고 있소.”
하기룡이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가주님……?’
이것 봐라.
호칭이 달라졌다?
지금껏 우벽산은 적 가주를 부를 때 항상 ‘가주’라고만 말해왔다.
그런데 지금은…….
잠깐 생각에 잠긴 하기룡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일단 알겠소. 앞으로도 예의주시해보시오. 내가 서안에 가 있는 동안에도 꾸준히.”
“알겠소. 그럼.”
고개를 끄덕인 우벽산이 사당을 막 나가려고 할 때였다.
“우 총관.”
하기룡의 부름에 우벽산이 힐끔 돌아보았다.
하기룡이 그를 보지도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운귀가 죽은 건…… 본가를 배신했기 때문이라는 걸 잊지 마시오. 그의 배신을 가장 먼저 눈치챈 것도 나라는 사실을.”
“알, 알겠소.”
간신히 대답한 우벽산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사당을 빠져나갔다.
‘제길! 이놈이나 저놈이나 날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구나.’
정말이지 울고 싶은 우벽산이었다.
* * *
며칠 후 서안 어귀.
하기룡은 서안의 저잣거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어깨를 활짝 폈다.
“드디어 도착했구나. 이제 이곳에서 우리 가문의 역사가 다시 새겨질 것이다.”
그 뒤에 선 적비연이 속으로 조소를 지었다.
그렇지. 바로 나에 의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