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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무적-54화 (55/301)

54. 한 번 잡숴봐

“그럼 대회 개최하는 날 보자. 부디 집안 망신시키는 일은 없길 바라마.”

하기룡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어라? 따로 움직이자는 건가?

적비연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하기룡이 한쪽 입매를 비틀었다.

“우리가 마주 앉아서 밥 먹을 정도로 우애가 돈독한 사이는 아니지 않느냐?”

뭐, 그건 인정.

오히려 따로 움직인다면 훨씬 편하다.

장사를 떠나는 날, 하불범은 호신위를 붙여주겠다고 했지만, 적비연이 극구 마다했다.

이 시점에서 호신위는 자신을 지켜주는 자가 아니라, 그저 감시자에 불과했기에.

뭐, 여러모로 따로 행동하는 게 잘 된 일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가주가 보지 않는다고 바로 본색을 드러내냐?’

적비연이 속내를 숨기고는 대꾸했다.

“그러지요, 형님도 부디 좋은 성적 거두시길.”

“흥, 네 앞가림이나 신경 써라.”

하기룡이 차갑게 말을 뱉고는 걸어갔다.

어우, 저 싸가지.

덕담을 해줘도 지랄이다.

적비연은 그 길로 서안의 저잣거리로 들어갔다.

허리춤에 칼을 찬 무인들이 제법 많이 보였다.

아마 천하용봉대회 때문에 평소보다 더 많은 무인이 모였을 것이다.

천하용봉대회가 비록 후기지수들만 참가하는 대회지만, 여러 문파의 원로격 무인들도 관심을 가지는 대회였다.

또한 이름난 상단들은 이곳에서 다양한 정보를 주고받으며 십이용봉이 될 자들과 미리 친분을 쌓아두기도 했다.

미래에 대한 투자랄까?

향후 수년 후에는 이 강호가 십이용봉을 중심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일단 맛집 탐방부터 해볼까?’

적비연은 이미 봐둔 곳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성큼성큼 걸어갔다.

마침 저만치 줄을 길게 선 객잔이 보였다.

용호객잔(龍虎客棧).

적비연이 저곳을 아는 이유는 아상의 기억 때문이었다.

아상이 무림맹에서 지내던 시절, 그는 용호객잔의 단골이었다.

특히 양갈비가 끝내주게 맛있는 집이지.

적비연이 직접 먹어본 적은 없지만 아상의 기억 속에서는 무척이나 맛있었다.

그 기억을 떠올리니 벌써부터 입에 침이 고였다.

줄을 서서 한참을 기다리자 마침내 적비연의 차례가 됐다.

“아이고, 나리. 오래 기다리셨지요? 이 층으로 모시겠습니다! 마침 예약하신 손님이 도통 오시지 않아서 가장 좋은 자리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저잣거리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난간 자리입지요!”

과연 점소이 말대로 이 층에 썩 좋은 자리가 비어 있었다.

적비연이 자리에 앉자마자 주문했다.

“양갈비와 술 한 병.”

“술은 어떤 걸로 드릴깝쇼?”

“아무거나 적당한 걸로.”

“예, 예.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금방 대령하겠습니다요!”

점소이가 얼른 달려갔다.

‘확실히 자리는 좋네.’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니 저잣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훤히 보였다.

장사도 번화한 도시지만 이렇게 많은 무인들이 거리를 오가는 풍경은 좀처럼 보기 어렵다.

‘무한에서 본 것보다도 많군.’

무인들이 많다 보니 곳곳에서 시비를 걸거나 대놓고 비무를 벌이는 모습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대회를 앞두고 기 싸움을 하는 것이리라.

‘그나저나…… 하기룡도 생각보다 꼼꼼하네.’

여기까지 와서도 꼬리를 붙여놓을 줄이야.

은신술이 꽤 뛰어나서 처음에는 눈치를 못 챌 뻔했다.

하지만 용호객잔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면서 뭔가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어디선가 자신을 감시한다는 기분.

만약 호신위로서 오래 지낸 운귀의 능력이 없었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상대 역시 작정하고 숨어서 미행하는 것일 테니까.

‘총 네 명. 사군자들이군.’

하기룡의 심복들.

이미 손을 섞어봤기 때문인지 각각의 기운을 희미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다.

날 감시하겠단 말이지.

하긴, 하기룡 정도 되면 갑자기 동생이 변했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을 테지.

아마 지금쯤 인정은 하지 않으면서도 내심 불안해하고 있으리라.

‘일단은 모른 척하고 조심해야겠군.’

적비연은 일부러 사군자들이 은신한 곳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대신 저잣거리를 오가는 사람들만 구경했다.

그가 군침을 꼴깍 삼키고는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빨리 양갈비 먹고 싶다.”

* * *

한편 적비연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화용월태(花容月態)라는 미사여구가 꼭 어울리는 여인이 풍채 좋은 귀공자와 함께 용호객잔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외모가 어찌나 아름다운지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저마다 시선을 돌려 넋을 놓을 정도였다.

만약 그들이 여인의 출신을 알았더라면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으리라.

귀주일봉(貴州一鳳)이라고도 불리는 그녀는 바로 백룡문(白龍門)의 매소약(梅素若)이었다.

그리고 귀주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여인의 곁에서 나란히 걷는 남자는 남해상단(南海商團)의 장남, 묘청운(苗靑雲)이었다.

“매 소저를 위해서 아침부터 예약을 해두었소. 정말 음식 맛이 끝내주는 곳이오.”

“기대되네요.”

매소약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아름다움이 곧 힘이라는 것을.

아버지는 늘 무공 수련에 몰두하라고 잔소리하셨지만, 여자에게는 또 다른 무기가 있다는 걸 몰라서 하는 말이다.

무공 수련할 시간에 차라리 미혼술(迷魂術) 같은 것을 익히는 게 낫다.

‘그래, 결국 남자들은 다 똑같지. 예쁘면 반하게 되어 있거든. 간이든, 쓸개든 모조리 내어준단 말이야.’

눈앞에서 입을 헤벌쭉 벌리고 있는 묘청운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강호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든다는 대부호의 장남이 자신의 외모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린다.

‘뭐, 덕분에 편하게 지내긴 하겠네.’

마침 용호객잔에 도착한 묘청운이 점소이를 불렀다.

“아침에 예약한 묘청운이다. 자리로 안내해라.”

“아이고, 나리. 왜 이리 늦으셨습니까요? 도통 안 오시기에 조금 전에 자리가 나갔습니다. 정말 죄송하지만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요?”

“뭐라?”

묘청운이 눈썹을 성큼 치켜올렸다.

점소이가 손바닥을 비비며 눈치를 살폈다.

“그래도 회전률이 빠르니 조금만 기다려주시지요. 최대한 빨리 자리를 마련해드리겠습니다요.”

매소약이 미간을 곱게 찡그리더니 툭 쏘듯 말했다.

“감히 이분이 누군 줄 알고 이러느냐?”

옥구슬이 구르는 듯한 목소리에 객잔의 사람들이 모두 이목을 집중했다.

몇몇 이는 그녀의 화려한 외모를 보고 저도 모르게 감탄을 터뜨렸다.

점소이가 우물쭈물거리자, 매소약이 앙칼지게 말했다.

“이분은 남해상단 소단주님이시다.”

그 말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남해상단이라면 강호에서도 수완이 좋기로 유명한 곳.

무공으로 이름을 떨친 곳은 아니지만, 그들만의 수완으로 강호 권력기관을 온통 주름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남해상단주가 재채기를 한 번 하면 무림맹 후문이 덜컹거린다는 말이 떠돌까?

사내의 정체를 알자, 슬쩍 나서려던 자들도 슬그머니 자리에 앉았다.

매소약이 흡족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보았다.

묘청운을 띄워주면서 자신도 동시에 주목받게 하려는 목적은 어느 정도 성공한 듯했다.

하지만 점소이는 순진했다.

“나리, 정말 죄송합니다. 이미 다른 분이 앉아계시니…….”

빠악!

“끄아악!”

묘청운이 정강이를 걷어차자 점소이가 그 자리에 고꾸라지며 비명을 내질렀다.

묘청운이 버럭 소리쳤다.

“다시 비키라고 하면 될 것 아냐!”

“나, 나리…… 그건 좀…….”

“꺼져라! 네놈이 말을 못한다면 내 직접 하겠다!”

묘청운이 점소이를 발로 걷어치우고는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갔다.

이미 이 층에서도 아래층의 소란을 모두 들었기 때문에 따로 나서는 자들은 없었다.

그저 곁눈질만 힐끔거릴 뿐이었다.

묘청운은 그 시선을 한껏 누리며 거들먹거렸다.

“어디냐?”

“저, 저기…… 입니다만.”

점소이가 기가 죽어 자리를 가리켰다.

적비연이 앉은 자리였다.

‘별 시답잖은 놈 때문에…….’

묘청운이 성큼 걸음을 내디디려고 할 때였다.

“제가 해결해볼게요.”

매소약이 나섰다.

그녀는 지금이야말로 자신이 돋보일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묘청운의 질투를 유발하는 것과 동시에 그의 곤란을 해결해 주는 능력까지 발휘하는 것.

마음의 빚을 지게 하면서도 질투심까지 얻는다.

적비연에게 다가간 매소약이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난간 아래를 구경하던 적비연이 고개를 돌렸다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매소약은 내심 웃었다.

‘그래, 너무 예뻐서 놀랐겠지. 이렇게 예쁜 여자가 말을 걸어오니 더 놀랐을 거고.’

하지만 적비연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뜻밖이었다.

“양갈비는?”

“네?”

“양갈비는 안 나오고, 왜 당신이 왔소? 당신 누구요?”

“…….”

매소약은 순간 어이가 없었다.

자신을 보자마자 대뜸 하는 말이 양갈비?

꼴에 자존심은 있어서 일부러 이러는 건가?

하지만 적비연은 진심 어린 반응이었다.

그의 머릿속은 아까부터 온통 양갈비 밖에 없었다.

매소약이 애써 입매를 틀며 말했다.

“재미있네요. 저는 백룡문의 매소약이라고 해요.”

그러자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술렁임이 이어졌다.

몇몇 이의 입에서 ‘귀주일봉’이라는 별호까지 튀어나왔다.

매소약은 그 반응을 즐기면서 남자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래서?”

“네?”

“그래서 양갈비는 안 나오고 왜 당신이 왔냐고.”

뭐, 뭐야? 이 남자?

뭐 이런 반응이…… 설마 고자인가? 그렇게 보이진 않는데…….

자존심을 구긴 매소약이 조금 까칠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대협이 앉은 그 자리는 예약석이랍니다. 저와 일행이 앉기로 되어 있었죠. 죄송하지만 비켜주시겠어요?”

적비연이 미간을 찡그렸다.

이게 무슨 개똥 같은 소린가?

어딜 가나 얼빠진 것들이 설친다더니.

적비연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비킬 생각 없소.”

빠직.

매소약은 이마에 핏대가 서는 걸 느꼈다.

정말이지 지금껏 살면서 이런 반응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나온단 말이지?’

매소약이 은근히 내공을 끌어올렸다.

아버지의 핀잔을 들으면서도 매일같이 익힌 미형선공(迷形鮮功)을 발휘할 참이었다.

말 그대로 자신을 더욱 아름답게 보이도록 하는 심공이었다.

순간 매소약에게서 향긋한 내음이 풍겼다.

하지만 적비연은 시종 시큰둥했다.

“내 말 못 들었소? 왜 앞에서 끙끙거리고 있소? 가서 줄이나 서시오. 그러다 점심 굶겠소.”

뭐, 이런……!

매소약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때,

쾅!

다짜고짜 검집으로 탁자를 내려찍은 묘청운이 버럭 소리쳤다.

“놈! 당장 비키지 못하겠느냐? 매 소저가 마음씨가 고와서 좋게 말로 해결 하려는데도 끝까지 무례하게 구는구나!”

“무례?”

“지금 네놈 짓이 무례가 아니면 무엇이냐?”

“예약 시간을 지키지 못했으면서 다짜고짜 먼저 앉은 나보고 꺼지라는 게 더 무례한 거 아닌가?”

“흥! 고작 한 시진 정도 늦었을 뿐이다!”

“고작 한 시진……?”

적비연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고작 한 시진이라니?

한 시진이면 양갈비를 두 번은 시켜먹고 뒷간을 다녀와서 낮잠도 잤겠다.

매소약이 나섰다.

“묘 대협께서 참으세요. 말이 안 통하는 인간이에요.”

“매 소저. 이런 거지 같은 것들은 결국 노리는 게 있어서 그러는 거요.”

정말이지 잘들 논다.

묘청운이 갑자기 품에서 뭔가를 꺼내 던졌다.

툭!

묵직한 소리를 내며 천 주머니가 탁자에 떨어졌다.

“너 이 새끼. 오늘은 매 소저를 생각해서 험한 행동은 삼가도록 하지. 네놈에겐 차고 넘칠 돈이니 갖고 썩 꺼져라!”

“뭐?”

“그리고 다시는 내 눈에 띄지 마라. 다음에 또 날 마주쳤다간 뼈도 못 추릴 것이다!”

적비연이 천 주머니를 풀어보자 돈이 들어 있었다.

“자, 어서 썩 꺼져라! 그만하면 만족할 것 아니냐!”

적비연의 표정이 더욱 굳었다.

사군자들이 지켜보고 있어서 최대한 참으려고 하는데…….

아, 진짜. 이것들이 성질 건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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