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한 번 잡숴봐
확 엎어버려?
제대로 참교육을 해줘?
가슴속에서 뜨거운 불길이 화끈화끈 타오른다.
성질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일어나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고 싶지만…….
’아서라, 일단 참자.
사군자들이 보고 있다.
이런 사사로운 일에 흥분해서는 큰일을 치르지 못하지.
갑자기 자신의 달라진 무위를 보였다간 하기룡에게 그대로 보고가 될 것이고 여러모로 피곤해질 거다.
적비연이 한숨을 내쉬고는 묘청운을 보았다.
“필요 없으니 가져가시오. 차례를 기다리든지, 정 이 자리가 탐난다면 내가 양갈비를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리시오.”
“뭐야? 이 새끼가 정말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
콰직!
묘청운이 다시 한번 검집을 내리치자 탁자에 금이 쩍 갔다.
“너 이 새끼…… 사문이 어디냐?”
“만검가의 하천웅이오.”
그러자 주변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강호에서 만검세가를 모르는 자는 거의 없으리라.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적비연의 귀에도 들려왔다.
“저자가 만검세가의 이 공자였군!”
“어쩐지 기세가 당당하더라니.”
“그런데 듣기로는 이 공자는 가주도 내놓은 망나니라던데.”
“나도 그리 들었네. 아무리 만검세가라도 남해상단을 건드리는 건 섣부른 행동일 텐데.”
“뭐, 그래도 만검세가면 장사 제일 문파가 아닌가?”
적비연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망나니라는 둥, 섣부른 행동이라는 둥…….
’다 좋다 이거야.
그런데 장사 제일 문파라니!
‘장사 제일 문파는 벽력적가라고! 이것들아!’
속에서 치미는 소리를 꿀꺽 삼키는 동안 묘청운과 매소약도 조금 흠칫거리는 듯했다.
하지만 묘청운은 곧 사나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만검세가가 마냥 무시할 가문은 아니었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녀석이 이 공자라는 것에 의미를 둔 것이다.
만검세가의 이 공자는 가주도 내놓은 자식이라는 소문이 자자하지 않던가?
게다가 상대가 그럴듯한 집안 배경을 가지고 있으니 더욱 호승심이 생겼다.
“꼴에 집안 믿고 설치는 모양이구나! 다치기 싫으면 그 돈 가지고 썩 꺼져라!”
적비연이 귀를 팠다.
“거참 시끄럽네. 집안 믿고 설친 건 그쪽 아닌가?”
“뭐, 뭣이? 너 이 새끼가 진짜……!”
묘청운의 전신에서 살기가 피어올랐다.
당장 일수를 뻗을 기세.
그때 점소이가 양갈비 한 접시와 술병을 쟁반에 담아 이 층으로 올라왔다.
술 한 병과 양갈비가 일 인분인 것을 보니 적비연이 시킨 게 분명해 보였다.
그걸 본 매소약이 얼른 끼어들었다.
“묘 대협, 그냥 돌아가죠. 이젠 밥맛도 없네요.”
“이대로 그냥 돌아갈 수는……!”
“저를 봐서라도 그냥 가요. 네?”
매소약이 청초한 표정으로 묘청운을 올려다보았다.
묘청운이 어금니를 꾹 깨물고는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 가자니 왠지 만검세가라는 배경에 밀린 것 같지 않은가?
귀주일봉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말이다.
모두가 묘청운이 어떤 행보를 보일지 궁금해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때 점소이가 매소약 앞을 지나쳤다.
툭.
매소약이 순간 발목을 틀어 점소이의 다리를 걸었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인 데다 사람들이 묘청운만 눈여겨보고 있었기에 미처 보지도 못했다.
“우앗!”
쨍그랑!
점소이가 중심을 잃고 넘어지면서 접시가 깨지고 말았다.
양갈비는 양념범벅이 되어 바닥에 아무렇게나 흩어졌고, 술병은 그대로 허공으로 떠올랐다.
“이런.”
탁!
묘청운이 얼른 손을 뻗어 술병을 낚아챘다.
그가 히죽 웃으며 점소이를 부드럽게 타일렀다.
“조심해야지. 여기 계신 손님의 음식이 다 쏟아졌잖아?”
“죄,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점소이가 연신 굽실거리면서 사죄했다.
적비연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버리자, 묘청운이 이죽거리며 다가왔다.
그의 발에 양갈비가 아무렇게나 짓밟혔다.
“뭐, 그리 무서운 표정을 짓고 그러나? 양갈비야 또 시키면 되지. 그 양갈비는 내가 사 주는 걸로 하지. 이 술도 함께 말이야.”
묘청운이 손에 든 술병을 거꾸로 들었다.
술이 줄줄 흘러내리면서 적비연의 머리부터 흠뻑 적셨다.
“저, 저런…….”
“어허, 못 본 척하자고.”
사람들이 술렁거렸고, 점소이는 입을 딱 벌린 채 어쩔 줄을 몰랐다.
탁!
술병을 완전히 비우고 탁자에 내려둔 묘청운이 입매를 비틀었다.
“그럼 맛있게 처먹도록. 돈은 그걸로 충분하고도 남을 테니. 갑시다, 매 소저.”
묘청운이 몸을 휙 돌리고는 저벅저벅 걸어갔다.
매소약이 희미하게 웃으며 그 뒤를 따랐다.
아까부터 몸 둘 바를 모르던 점소이가 우물쭈물 다가왔다.
“저, 손, 손님…… 괜, 괜찮으신지요?”
“……들었지? 이 돈 가져가서 양갈비 다시 해오고, 술은 제일 비싼 걸로.”
“네……?”
적비연이 귀신처럼 입매를 찢으며 점소이를 보았다.
“나 두 번 말하는 거 싫어하는데.”
“알, 알겠습니다요! 최, 최대한 빨리 대령하겠습니다요!”
점소이가 헐레벌떡 달려가다가 다시 돌아왔다.
“아, 도, 돈을…… 잠시…… 죄송합니다!”
그렇게 점소이가 돈 꾸러미를 들고 내려가자 술렁거리던 사람들도 다시 식사하기 시작했다.
적비연의 눈이 바닥에 짓이겨진 양갈비로 향했다.
‘저 아까운 걸…….’
포장이라도 해야 하나?
* * *
“하하하하!”
하기룡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술 한 잔을 입에 털어놓고는 기분 좋은 듯 말을 이었다.
“그래, 놈이 남해상단 소단주를 건드렸단 말이지?”
“예, 그랬습니다.”
죽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하기룡이 입매를 비틀었다.
“놈도 어지간히 운도 없구나. 하필 남해상단 소단주를 건드리다니. 차라리 이왕 건드린 것 예전처럼 사고라도 화끈하게 쳤으면 더 좋았을 뻔했구나.”
“그게 저희들도 조금 이상했습니다.”
“뭐가 말이냐?”
“이 공자의 성격상 진작 칼을 뽑아 들었을 텐데, 술을 머리에 쏟아붓는데도 가만히 있었던 건 의외였습니다.”
“흥, 지금까지는 가문을 믿고 설쳤던 거지.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아버지가 시험을 해보신다고 하셨다. 더 이상 사고를 쳤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된다는 걸 녀석도 알고 있었던 게지.”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모욕까지 참으신다는 건 이 공자의 성격으로 볼 때는…….”
“알아. 나도.”
하기룡이 자신의 술잔에 술병을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
“놈은 그런다고 참을 놈이 아니다. 이성보다는 늘 감정이 앞서는 녀석이니까. 그럼에도 놈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건…… 움직이지 못했다는 뜻이지.”
“아…….”
죽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룡이 다시 술잔을 기울이고는 말했다.
“아마 묘청운이 웅아에게 살기를 쏟아냈을 것이고, 웅아는 그 살기를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 내 동생은 자존심은 세지만, 강자 앞에서는 한없이 비열한 녀석이니까.”
술잔을 내린 하기룡이 다시 자작을 하며 희미하게 웃음을 머금었다.
놈, 꼴좋구나.
서안에 온 첫날부터 거물을 건드리다니.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자리를 양보하지 못하고 남해상단 소단주에게 단단히 찍혔으리라.
대회가 시작되면 아마 묘청운은 하천웅만 호시탐탐 노릴 것이다.
‘굳이 내가 애쓰지 않아도 되게 생겼군. 알아서 자기 무덤을 팔 줄이야.’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하기룡은 다시 채워진 술잔을 한입에 털어넣었다.
술이 목구멍을 타고 시원하게 흐른다.
술이 참 달았다.
* * *
“오늘 정말 달콤한 하루였소.”
묘청운이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밤공기가 상쾌했다.
그 곁을 나란히 걷는 매소약이 부드럽게 웃었다.
이 대회에 함께 참가한 오라버니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한 말이 있었다.
“남해상단 소단주를 네가 잘 다룰 수만 있다면 우리 가문에 날개를 단 셈이 될 거다.”
이만하면 오늘 하루는 성공이었다.
아마 내일이 되면 묘청운은 자신에게 더욱 빠져들리라.
“저도 묘 대협 덕분에 즐거웠어요.”
“다행이오. 혹시나 그 만검가의 망나니 때문에 기분이 상했을까 봐 걱정했소.”
“그럴 리가요. 그런 하찮은 일 때문에 제 기분이 나빠지진 않는답니다.”
“역시 매 소저는 참으로 현명하시구려.”
“아직 부족한 게 많습니다.”
매소약이 짐짓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묘청운은 그런 그녀를 보면서 내심 욕정이 꿈틀거리는 것을 참기 힘들었다.
‘정말 매력적이군. 이런 여자가 내 아내가 된다면 어떨까?’
그의 머릿속에 혼자만의 상상이 펼쳐졌다.
남해상단이 있는 광서성(廣西省)과 귀주는 바로 옆이니 거리도 멀지 않다.
부부의 연을 가지기에는 딱 좋지 않은가?
묘청운이 한참이나 쳐다보자 매소약이 몸을 살며시 비틀었다.
“너무 그렇게 쳐다보시니 부끄러워요.”
“아, 미, 미안하오. 하하!”
묘청운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웃다가 사뭇 진중한 표정으로 매소약을 보았다.
달빛 아래 눈이 마주친 두 사람.
“매 소저…….”
“묘 대협…….”
두 사람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하지만 매소약이 먼저 한 걸음 물러나며 고개를 돌렸다.
“아, 내 정신 좀 봐. 시간이 많이 늦었네요.”
“매 소저!”
묘청운이 매소약의 팔을 잡아끌자, 그녀가 휙 돌아섰다.
다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묘 대협…….”
꿀꺽.
묘청운이 마른침을 삼켰다.
매소약의 눈동자가 모로 돌아갔다.
“이, 이러시면…….”
“매 소저…….”
“묘 대협…… 저는 아직…….”
묘청운이 멈칫멈칫 망설였다.
왠지 너무 빨리 다가서면 매소약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대로 떨어지기에는 아쉽다.
그렇게 얼마나 멈칫거리며 갈등했을까?
“아우! 답답해서 더 못 보겠네? 뽀뽀 할 거야? 말 거야?”
느닷없이 불쑥 들린 목소리!
묘청운과 매소약이 기겁을 하며 물러섰다.
묘청운이 사방을 둘러보며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웬, 웬 놈이냐!”
“여기다, 여기.”
목소리와 함께 어둑한 골목에서 한 인영이 스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은신을 펼치고 있던 적비연이었다.
적비연이 목을 한쪽으로 우두둑 꺾고는 말했다.
“뭐, 좀 두근두근한 순간 같아서 좀 더 지켜보려고 했는데, 영 진도가 안 나가니 별로 재미도 없고.”
“저, 저 미친놈이……!”
묘청운은 눈알이 뒤집히는 것만 같았다.
낮에 용호객잔에서 보았던 그놈이 아닌가?
매소약 역시 미간을 곱게 찡그리고는 적비연을 노려보았다.
묘청운이 저벅저벅 걸어갔다.
“너 이 새끼. 다시 내 눈에 띄면 죽여 버린다고 했을 텐데.”
“고마워서 말이야.”
“뭐?”
“나한테 양갈비 사 줬잖아. 그래서 너무 고마워서. 이젠 지켜보는 눈이 없기도 하고.”
“하, 이 새끼 분위기 파악 못 하네.”
“내가 그래도 은혜는 갚는 성격이거든. 이 맛있는 양갈비를 나만 맛볼 수는 없어서 이렇게 포장해 왔지. 자고로 맛있는 건 나눠 먹어야 하잖아?”
적비연이 종이에 담긴 양갈비를 풀어 보였다.
그건 묘청운이 발로 밟아 짓이겨진 양갈비였다.
매소약의 이마가 일그러졌다.
“이 미친…….”
아름다운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게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묘청운의 뺨이 씰룩였다.
“이 새끼…… 정녕 뒈지고 싶은 게로구나.”
차앙!
묘청운이 검을 뽑아 들자 시퍼런 날이 달빛을 받아 시리게 빛났다.
순간 그가 바닥을 차며 몸을 날렸다.
“노옴! 어디 혼 좀 나……!”
매섭게 달려가던 묘청운은 순간 그 자리에서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
적비연의 두 눈에서 쏘아진 살기.
마치 보이지 않는 칼날이 온몸을 난자하는 것만 같다!
‘어째서 사람 눈이 저렇게나……!’
마치 먹이를 노려보는 맹수의 눈이랄까?
하지만 이미 관성을 이기지 못한 몸은 그대로 동작을 이어가고 있었다.
찰나,
스팟!
푹!
“커억……!”
눈앞에서 사라진 적비연이 어느새 바로 앞에 서 있는 게 아닌가?
게다가 검 손잡이가 명치에 맞닿아 있다.
‘어, 어느 틈에……!’
묘청운은 검을 들어 올린 채로 꿈쩍도 하지 못했다.
등골이 서늘했다.
적비연이 뿜어낸 살기의 사슬에 꽁꽁 묶인 것만 같다.
적비연이 나직이 속삭였다.
“넌 좀 기다려. 일단 저년한테 먼저 맛을 보여주고.”
얼음처럼 굳어버린 묘청운을 뒤로 하고는 적비연이 저벅저벅 걸었다.
그가 매소약을 보며 양갈비를 내밀었다.
“자, 한 입 잡숴봐. 맛이 끝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