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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무적-57화 (58/301)

57. 누구냐, 넌

천천히 눈을 떴다.

휘아아아앙!

주변으로 한기 가득 머금은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가 싶더니 다시 불기를 머금은 뜨거운 바람이 훅 불어닥친다.

그리고 그 변화무쌍한 허공에 미증유의 기운을 가진 거대한 존재가 팔짱을 낀 채 묵묵히 서 있었다.

적비연은 가만히 그 존재를 뜯어보았다.

사람보다는 덩치가 컸지만 외모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었다.

미중년의 사내로 보였으나, 어쩐지 풍기는 분위기로 보아서는 그보다 더 나이가 많을 것 같다.

하긴 저런 초월적인 존재에게 제대로 나이라는 개념을 갖다 붙일 수도 없겠지.

척추를 중심으로 왼쪽은 시퍼런 한기가 풀풀 휘날렸고, 오른쪽은 뜨거운 열기가 활활 타오른다.

한데 이 두 기운이 교묘하게 섞이면서 다시 위치를 바꾸기도 한다.

‘신기하네.’

마선의공을 연마하면 이런 환영까지 나타나는 거였나?

책에는 그런 내용이 없던데.

지금껏 내공심법을 익히면서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미지의 존재는 적비연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눈싸움이라도 해야 하나?

적비연은 그 눈길을 피하지 않고 묵묵히 마주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서로를 노려보았을까?

‘이 환영은 언제 없어지는 거지? 좀처럼 안 없어지네.’

그때였다.

-환영이 아니다!

미지의 존재가 말을 걸어오는 게 아닌가?

직접 귀로 들리는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머릿속이 웅웅 울렸다.

흠칫거린 적비연이 이맛살을 슬쩍 구겼다.

환청까지?

그러자 미지의 존재는 팔짱을 풀더니 적비연 앞에 똑바로 섰다.

키가 크다 보니 천장에 머리가 닿을 지경이었다.

-흥! 환청은 무슨! 네놈에게 어째서 들어갈 수 없는 것이냐!

이쯤 되자 적비연은 점점 모르겠다는 표정이 됐다.

환청이 아니라 진짜인가?

아니면 자신이 주화입마에 걸려 미쳐 버린 건가?

그건 좀 곤란하다.

차라리 죽는 게 더 깔끔한데.

-노옴! 무슨 허튼 생각이냐? 비키지도 않을 거면서 네놈은 어쩌자고 나를 불러낸 것이냐? 아니, 그보다 어째서 버티고 있는 것이냐?

입을 벙긋거리던 적비연이 곧 다물었다.

‘괜히 대답할 뻔했다. 진짜 미친놈이 될 뻔했어. 무시하다 보면 환영도 없어질 테지.’

-놈! 환영이 아니래도!

두어 걸음 물러난 미지의 존재가 순간 바닥을 차며 적비연에게 쏘아지듯 달려들었다.

쒸에에엑!

그가 수도를 내질러왔다.

수도는 정확히 적비연의 이마를 향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이마가 뚫려 버릴 것만 같은 위기.

적비연이 반사적으로 검을 뽑으며 막아섰다.

다음 순간,

쩌어엉!

요란한 마찰음과 함께 기의 폭발이 일어났다.

휘아아아앙!

뜨겁고 차가운 바람이 아무렇게나 뒤섞이며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콰콰콰콰콰!

와장창창!

적비연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주변을 살폈다.

환영인 줄만 알았는데, 실제로 폭발이 일어난 것이다.

주변 사물들과 잡기가 기풍에 떠밀려간 것도 모자라 창문이 깨지면서 떨어져나갔다.

한바탕 소란이 일어나니 적비연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눈앞의 환영을 보았다.

진짜…… 인가?

-그렇다고 하지 않았느냐!

미지의 존재가 화가 난 듯 으르렁거렸다.

동시에 그 역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자신의 손을 보며 쥐락펴락했다.

-어째서 네놈에겐 들어갈 수 없는지 모르겠군.

내게 들어온다고?

도대체 무슨 소리지?

적비연의 생각을 읽은 듯 미지의 존재가 손가락으로 마선접비록을 가리켰다.

-마선접비록. 그 마선의공을 익히면 내가 네놈 몸에 빙의하게 되어 있지. 한데 어째서 안 되는 거냔 말이다!

아, 그런 거였나?

그제야 마선접비록 서문에 있던 경고문이 생각났다.

그렇다면 마선의공은 내공심법이라기보다는 마교의 대법과 비슷하지 않은가?

특히 눈앞에 나타난 저 미지의 존재에게서는 마기마저 희미하게 느껴진다.

결국 마공서였던가?

이제 조금 이해가 된다.

마선접비록은 결국 마교의 대법과 비슷한 것이리라.

마선의공을 익히게 되면 저 존재와 접신하게 되고, 저 존재가 육체에 빙의되는 것이리라.

그 후에는 자아를 상실한 채 무아지경 속에서 싸우게 될 테고.

정말이지 서문에 써진 대로 사악하고 위험한 수단이다.

자칫 정신력이 약한 자라면 그대로 미치광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확실히 ‘무공’이라기보다는 ‘수단’이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하면, 저건 마선(魔仙)이겠군.

마공을 익혔다가 극의를 깨우쳐 우화등선한 존재.

하지만 저렇게 떠다니는 걸 보면 완전한 우화등선은 아닌 건가?

그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면서 점소이가 나타났다.

“손, 손님! 괜찮으십니까?”

점소이는 황망한 표정으로 아수라장이 된 주변을 둘러보았다.

뭔가 깨지는 소리가 들릴 때부터 짐작은 했던 터였다.

그래서 조금 조용해지길 기다렸다가 이제야 나타난 거다.

하지만 이상한 건 객실에 적비연 말고는 아무도 없다는 점.

적어도 무인끼리 싸운 것이라면 시체 몇 구가 나뒹굴거나 핏자국이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적비연이 검을 갈무리했다.

“난 괜찮아. 그보다…… 저거 보이나?”

적비연이 턱짓으로 마선을 가리켰다.

점소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예, 창문이 아주 작살났네요.”

“아니, 창문 말고 그 앞에.”

“그 앞이라면…… 깨진 탁자 말씀이십니까?”

점소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적비연이 손을 저었다.

“됐다. 가봐.”

“손님, 파손된 부분은…….”

“제대로 변상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예, 예. 그럼 부디 편안한 밤 되십쇼!”

점소이가 얼른 허리를 꾸벅 숙이고는 달려갔다.

적비연이 마선을 빤히 응시했다.

‘그렇군. 넌 내 눈에만 보이는 거군.’

-네놈이 날 불렀으니 당연한 게 아닌가?

‘그런데 내 몸을 차지하지 못해서 좀 화가 난 것 같은데?’

적비연이 입매를 슬쩍 비틀자, 마선이 으르렁거리며 대꾸했다.

-그 또한 당연한 소리다! 어째서 네놈의 몸에 빙의할 수 없는 것이냐?

뭐 짚이는 부분이 있긴 하다.

-그게 무엇이냐?

‘정확히 말하자면 이곳에 네가 빙의할 내 육체는 없다는 거지.’

-뭐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럼 네놈의 그 몸뚱이는 인간이 아니란 말인가?

‘아니, 뭐 인간인 건 맞지만 내 몸은 아니란 소리지.’

-무슨 개소리를…….

‘한마디로 나도 이 몸에 빙의되어 있단 뜻이야. 그러니 네가 들어올 수 없는 거지. 널 부른 게 이 몸의 진짜 주인은 아니니까.’

-그런……! 그렇다면 네놈은 현재 대법을 펼친 상황이더냐?

‘마교의 대법 같은 건 아니지만…… 그 비슷한 처지라고 해둬야겠군.’

-비슷한 처지라니…….

‘내가 그것까지 일일이 설명해 줄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귀찮기도 하고.’

-허! 이런 건방진 놈을 봤나?

마선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껏 이런 인간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자신에게 반말을 하다니.

-버르장머리 없는 놈. 네놈은 조상도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조상이었나?’

-내가 우화등선을 한 게 수천 년 전이다.

‘수천 년? 무공의 역사가 그리 깊었나?’

-아니, 뭐…… 정확하게 따지자면 천 몇 년……?

‘갑자기 확 줄어드는군.’

-그, 그것이 중요한가!

‘하긴 뭐, 별로 상관없지.’

-건방진 놈. 진실을 알고도 예의를 갖추지 않다니.

‘예의는 사람에게나 갖추는 거지. 넌 사람도 아니잖아?’

-이놈이……!

마선이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수백 년 만에 마선접비록을 취한 자가 하필이면 다른 사람의 육신을 차지하고 있는 녀석이라니.

정말이지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나?

-젠장!

콰앙!

마선이 주먹으로 벽을 때렸다.

하지만 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떠한 떨림조차 없었다.

적비연이 눈을 빛냈다.

아까와 달리 아무런 효과가 없다.

결국 마선은 나를 통해서만 그 힘을 전달하는 게 가능하다는 건가?

‘결국 내가 주인이란 말이네.’

마선이 흠칫거리고는 적비연을 돌아보았다.

-뭐라? 주인? 주이이인?

‘사실이 그렇잖아? 지금 너는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그나마 날 통해서 네 힘을 조금 나타낼 수는 있는 것 같지만 한계는 분명해 보이고. 그렇다고 이 육신을 차지하지도 못할 테고.’

구구절절 옳은 말이니 마선은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눈만 끔뻑이는데 적비연이 깍지 낀 손을 뒤통수에 대며 말했다.

“결국 마선접비록은 별 쓸모도 없는 거였군.”

-저, 저 미친……!

오늘따라 미쳤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하긴 자신도 아까는 스스로 미친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을 정도였으니.

마선은 이제 뒷목을 잡고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몸 하나를 차지해서 강호를 종횡무진하며 활개를 치고 다닐 거라고 생각했건만!

지금쯤 마선의공을 익힌 자는 그 영혼을 찾을 수도 없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된 건지.

-후우.

“한데 너에게서 느껴지는 마기는 뭔가 좀 다르군. 마기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야.”

-아까부터 당연한 소리만 하는구나. 이미 천 년이 흘렀으면 여러 세대를 그치며 그 기운의 색깔도 변질되었을 터.

“변질될 뿐만 아니라, 더 발전했지.”

-흥, 모르는 소리. 모든 변화의 끝은 순정이다.

뭐, 그건 어느 정도 인정한다.

그래, 지금 무공이 발전했다지만, 고대에서부터 전설처럼 내려오는 천해경과 만해경의 경지는 좀처럼 구경하기 힘드니까.

어쨌거나 중요한 건…….

“오늘 별로 건진 게 없다는 거지.”

-뭐야?

버럭 소리치던 마선이 뭔가를 떠올린 건지 곧 피식 웃었다.

-그래도 나를 홀대해서 좋을 건 없을 텐데.

“각별히 대해서 좋을 것도 없지.”

-과연 그럴까?

“……?”

마선이 팔짱을 끼며 입매를 비틀었다.

-어떤 무공이든 극의를 깨우쳐 우화등선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 나를 사부로 모신다면 내 너에게 무공을 전수해 주마.

순간 적비연의 눈빛이 반짝였다.

과연 그런 제안이라면 생각을 달리 해볼 만하다.

그렇다고 사부로 모실 생각은 없지만.

“나를 주인으로 인정한다면 내게 무공을 전수할 기회를 주지.”

-뭐, 뭣이?

마선은 기도 안 찼다.

세상에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단 말인가?

-야이 미친놈아! 우화등선한 전설의 무공을 배울 기회를 이 몸이 친히 알려준단 말이다! 그런데 뭐가 어쩌고 어째?

적비연이 귀를 파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주인으로 인정하면 배워주겠다니까?”

-허! 저, 저……!

정말이지 마선은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도대체 말이 통해야지!

어디서 이런 모지리가 굴러 들어왔단 말인가?

적비연이 마선의 반응을 재미있다는 지켜보다가 말했다.

“아니면 뭐 그대로 다시 소멸되시든가? 아니, 봉인이라고 해야 하나?”

-뭣이? 네놈이 날 불러놓고 다시 가둘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뭐, 책에는 없어도 알 만한 사람을 알고 있거든.”

적비연이 희미하게 웃었다.

마선이 그런 적비연을 빤히 바라보았다.

-끄응. 거짓은 아닌 모양이군.

적비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라고. 며칠간의 여유를 줄 테니. 난 이제 잠을 좀 자야겠어.”

적비연이 침상에 벌러덩 드러눕자, 마선이 입을 척 벌렸다.

정말이지 숱한 세월을 겪으면서 이런 꼴통은 처음이었다.

* * *

마침내 천하용봉대회가 시작되는 날.

수많은 무인들이 무림맹 대연무장에 모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지 무림맹 정문에서부터 입장하려는 자들로 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정문을 지나서도 대연무장에서는 곳곳에서 등록자들이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수천 명은 됨직했다.

강호 무인들이 바닷가의 모래알만큼이나 많다지만 이렇게 많은 자들이 모일 거라곤 적비연도 생각지 못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보니 묵검 일행이나 하기룡은 찾아보기도 어려웠다.

한참이나 차례를 기다린 적비연에게 심사관이 다가와 물었다.

“어디에서 온 누구요?”

적비연이 씩 웃으며 답했다.

“장사에서 온 만검가의 하천웅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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