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누구냐, 넌
따악!
아까와는 판이하게 다른 소리가 울렸다.
별로 크지도 않았고 큰 진동도 없었다.
바위는 멀쩡했다.
“아야야…….”
적비연이 일부러 앓는 소리를 내며 주먹을 호호 불었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눈을 끔뻑이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뭐야? 이제 보니 정말 바위에 문제가 있었던 거잖아?”
“난 또 다른 십이용봉 후보가 나타난 줄 알고 괜히 긴장했네.”
“네가 긴장을 왜 해? 참가하는 데에 의의를 둔 놈이?”
“뭐야, 인마?”
여기저기에서 잡소리와 낄낄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적비연이 내심 미소를 지었다.
‘됐다. 딱 원하는 정도다.’
심사관이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는 다가가가서 주먹 자국의 깊이를 재보았다.
‘흐음, 애매하군.’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깊이가 일 촌이 될까 말까다.
적비연이 슬쩍 긴장했다.
너무 살살 때렸나?
괜히 또 극마가 나설까 봐 힘을 더 뺀 점도 있다.
‘하여튼 도움이 안 되는 녀석이라니까.’
-전에도 말했지만 네 생각은 내게 다 들린다!
‘들으라고 한 생각이야.’
-크윽!
극마가 약이 바짝 올라서 손으로 잡아먹을 듯한 시늉을 했다.
하지만 실체가 없는 그였기에 적비연에게 어떤 위해를 가할 수는 없었다.
단지 적비연을 통해서 어느 정도 힘을 드러낼 수만 있을 뿐.
분하지만 별수 없다.
참을 수밖에.
어디 똥이 무서워서 피하던가?
마침내 심사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두 번이나 시험을 치른 점도 있으니 이 정도면 합격으로 봐드리겠소.”
“고맙소.”
적비연이 포권하며 대꾸하자 사람들이 툴툴 웃으며 흩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몇몇 이들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던지고 있었다.
하기룡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좀 수상한데. 정말 우연일까?’
자신이 아는 동생은 이런 상황에서 결코 두 번 시험 볼 놈이 아니다.
그렇잖아도 남에게 자랑하지 못해 안달 난 녀석인데, 굳이 두 번 시험을 쳐서 웃음거리가 될 이유가 있나?
게다가 저 녀석이 ‘공정’을 운운해?
누구보다 비열하게 살아온 놈이?
죽다 살아나더니 정말 성격이 변했나?
그래, 백번 양보해서 성격만 변한 거라면 다행이다.
한데 실력도 변한 거라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미심쩍은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한편 적비연은 하기룡이 의심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하여튼 도움이라고는 안 되는 덩치 때문에 일이 제대로 꼬였다.
-덩, 덩치이?
극마가 뒷목을 잡고 소리쳤지만, 적비연은 무시한 채 주변을 살폈다.
그때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저놈은…… 묘청운?’
적비연의 입매가 치켜올라 갔다.
그리고 그런 적비연을 또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
바로 매삼랑이었다.
“흥, 그럼 그렇지. 역시 운이었군.”
“오라버니. 운이 아닐 수도 있잖아요?”
매소약이 적비연을 쳐다보지도 않고 아예 몸을 돌린 채 말했다.
마치 맹수로부터 몸을 숨기는 아기 새 같았다.
‘쯧쯧. 그리도 저놈이 두려운 건가?’
매삼랑은 다시 화가 치밀었다.
어쩌다가 동생이 이 지경까지 됐나?
생각 같아서는 당장 일수에 저놈을 때려죽이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약아, 너는 지금 공포에 질려 사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어서 녀석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거라. 강호를 살아가다 보면 그보다 험한 일이 숱하다. 너의 치욕은 내 반드시 조만간 갚을 것이다.”
매소약이 입술을 깨물었다.
안다.
강호가 험난하다는 것을.
그땐 아버지가 지켜주고, 오라버니가 나서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난밤 겪은 일을 통해서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앙갚음을 한들 무슨 소용인가?
이미 자신은 그런 모욕적인 일을 당해 버렸는데.
때마침 저만치 떨어져 있던 묘청운이 전음을 보내왔다.
[형님, 저 녀석 그냥 놔두실 겁니까?]
[놔두지 않으면?]
[저는 그렇다 쳐도 매 소저를 생각하신다면 이대로 놔둘 수 없지요! 형님이라면 저런 놈쯤은…….]
[별것도 아니겠지.]
[그렇죠! 그런데 왜…….]
[자네는 장사의 소룡(小龍)이 안 보이는가?]
그제야 묘청운이 흠칫거리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의 시야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
하천웅을 가만히 지켜보는 남자.
장사의 소룡!
만검세가 소가주 하기룡이었다.
하천웅과 달리 하기룡은 꽤 유명했고, 종종 무림맹에 들락거려 얼굴도 제법 알려져 있었다.
물론 적비연이 그들의 전음을 엿들었다면 절대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장사의 소룡?
장사의 실지렁이일 뿐이라고 노발대발했겠지만, 어쨌거나 세간에서는 하기룡을 그리 부르고 있었다.
매삼랑의 전음이 이어졌다.
[저들 사이가 좋지 않다는 소문이 있지만, 그래도 형제지간일세. 자칫 가문의 명성에 누가 된다고 생각한다면 장사소룡이 가만있지는 않을…… 응? 자네 어디 가나? 이봐?]
매삼랑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묘청운을 불렀다.
하지만 묘청운은 뭔가 잔뜩 억울한 표정이 되어서는 적비연에게 뚜벅뚜벅 걸어갔다.
당황한 매삼랑이 얼른 전음을 날렸다.
[경거망동하지 말라니까! 자네가 아무리 원한이 깊다고 해도 장사소룡 앞에서 저놈을 건드리는 건……!]
하지만 그의 전음이 끝나기도 전에,
따악!
묘청운이 적비연의 뒤통수를 있는 힘껏 후려갈기는 게 아닌가?
매삼랑이 눈을 크게 뜨고는 입을 쩍 벌렸다.
‘저, 저……!’
남해상단 소단주라는 신분을 믿고 저러는 건가?
아니, 그렇다고 해도 저건 좀 아니잖아?
지금껏 묵묵히 지켜보기만 하던 하기룡도 눈살을 슬쩍 구겼다.
뜻밖의 상황.
묘청운이 사람들이 잔뜩 지켜보는 가운데 억지웃음을 날렸다.
“으하하하! 이놈, 여, 여기 있었구나! 역, 역시 네놈도 대, 대회에 참가했구나! 하. 하. 하!”
표정은 웃고 있지만 마음은 울고 있는 묘청운이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적비연이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도록 묘청운을 돌아보며 슬쩍 미소 지었다.
[잘했다, 더 해라. 더 때려. 최대한 모욕적으로.]
적비연의 지시에 사색이 된 묘청운이 다시 눈을 질끈 감고는 뒤통수를 후려쳤다.
따악!
“이, 이놈아. 어제 나한테 그리 당하고도 정, 정신 못 차렸느냐? 네, 네놈 따위가 나설 대회가 아니라는 걸 모, 모르겠냐?”
퍽! 딱! 퍽!
묘청운이 연이어 손을 휘둘렀다.
정말이지 때리면서 울고 싶은 기분은 처음이다.
‘이 미친 변태 새끼가 왜 자꾸 나보고 때려달라는 거야? 나중에 또 얼마나 개지랄을 하려고?’
그렇게 열 대가 넘어갈 때였다.
탁!
누군가 묘청운의 손목을 낚아챘다.
흠칫거리고 돌아보니 하기룡이었다.
그가 싸늘한 눈초리로 일렀다.
“무슨 짓이냐?”
“웬, 웬 놈이냐?”
“이 녀석의 형이다.”
“형……? 그럼 장사소룡……?”
묘청운이 처음 알아본 척 중얼거리자, 하기룡이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뭐, 사람들이 그리 부르더군.”
“끄음. 나, 난 남해상단 소단주 묘청운이오.”
그제야 묘청운이 한 걸음 물러나며 포권을 했다.
하기룡이 마지못한 듯 예를 갖추며 대답했다.
“남해상단 소단주께서 무슨 일로 내 아우를?”
“아아, 별일 아니오. 혹시나 오해는 마시오. 그저 친분이 있어서 그런 것이니.”
“그렇다면 다행이오.”
“그, 그럼 나는 이만 가보겠소!”
다시 포권을 해 보인 묘청운이 적비연을 힐끔 보더니 뒤통수를 툭 쳤다.
“다음에 보자.”
그렇게 묘청운이 멀어지자 지켜만 보던 매삼랑도 간신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저 얼간이는 왜 나서가지고! 어찌 된 영문인지 따져봐야겠군!’
그가 조금 화난 표정으로 묘청운을 향해 걸어갔다.
주변이 조용해지자 하기룡이 적비연을 차갑게 쏘아보았다.
“흥, 꼴좋구나. 집안 망신시키지 말라고 그리 일렀거늘.”
“그럼 남해상단 소단주를 건드리라는 겁니까?”
“건드리진 못해도 맞고만 있을 필요는 없지.”
“전 형님처럼 섬세하지 못해서 그런 조절이 안 됩니다. 그냥 죽여 버리면 모를까?”
하기룡이 입매를 비틀었다.
‘곧 죽어도 실력이 떨어져서 덤비지 못했다는 말은 안 하는군.’
역시 바위를 부순 건 운이었던 건가?
이제야 동생답다는 생각이 든다.
하기룡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차갑게 말을 뱉었다.
“그래서 네가 후계를 잇지 못하는 거다.”
그가 몸을 휙 돌려 걸어갔다.
적비연이 하기룡의 뒤통수를 보며 짐짓 화난 척 소리쳤다.
“두고 보십시오! 내가 어떤 놈인지 보여줄 테니!”
“제발 그러길 바라마.”
하기룡이 냉소를 지었다.
그래, 저래야 내 동생이지.
언제나 말만 앞서고, 큰소리만 치는.
하지만 실속이라고는 없는.
강자 앞에서는 찍소리도 하지 못하는.
‘그게 바로 너지.’
적비연은 멀어지는 하기룡을 보며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의심은 좀 덜어낸 모양이군.’
적비연의 예상대로 하기룡뿐만 아니라 주변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혀를 끌끌 차며 돌아갔다.
‘어쨌든 작전은 성공이긴 한데…… 이 새끼 생각보다 너무 세게 때리던데? 나중에 진지하게 얘기 좀 나눠봐야겠네.’
적비연이 뒤통수를 어루만졌다.
* * *
“뭐? 그놈이 전음으로 지시를 내린 거라고?”
“그랬다니까요. 자기 뒤통수를 치면서 면박을 주라고요.”
“허어.”
매삼랑은 말을 잇지 못했다.
묘청운이 느닷없이 적비연의 뒤통수를 때릴 때만 해도 미친 게 아닌가 싶었다.
한데 그런 속사정이 있을 줄이야.
도대체 왜?
설마 하기룡 때문에?
하기룡이 보는 앞에서 남에게 얻어맞아야 할 이유가 뭐지?
‘혹시…… 실력을 숨기기 위해선가?’
하지만 형제지간에 실력을 숨긴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평생을 한 집안에서 같이 자랐다면, 각자의 실력을 모르고 싶어도 알게 되지 않겠나?
아무리 원수처럼 지냈다지만…….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군.”
그러자 묘청운이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그놈은 그냥 미친놈이에요. 이유 따위는 없는 거죠. 미친 변태 새끼가 분명하다고요.”
“흐음. 진정하시게.”
“형님, 제발 그놈 좀 어떻게 해주십쇼. 그놈만 보면 머리끝이 쭈뼛쭈뼛 서서 미칠 것 같습니다.”
“서두르지 말게. 기회는 있을 테니.”
“형님!”
“…….”
매삼랑이 착 가라앉은 눈으로 묘청운을 보았다.
묘청운이 이내 주눅 든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흥분했습니다.”
매삼랑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묘청운은 남해상단 소단주다.
그를 막 대할 수는 없다.
남해상단의 재력이라면 본가에도 엄청난 힘이 될 터.
“아닐세. 자네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네. 하면 하나만 묻지.”
“네.”
“만약 그놈을 처리하면 자네에게 뒷일을 맡겨도 되겠나?”
묘청운이 흠칫거리고는 물었다.
“처리라면…… 죽이시겠단 말씀입니까?”
죽여도 시원찮지.
내 동생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하지만 매삼랑은 다른 말을 꺼냈다.
“물론 내일 치를 일차시험에서 녀석을 탈락시키는 정도로만 할 생각일세. 하지만 자네 말대로 그놈이 꽤나 강하다면 사고가 있을 수도 있으니 말이야. 우리 애들이 좀 거칠거든. 한데 뒷수습을 할 만한 능력이 있는 건 역시 남해상단밖에 없지 않겠나?”
묘청운이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굳은 표정으로 답했다.
“뒷일은 책임지고 수습해 드리겠습니다. 설사 놈이 죽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