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60화 (61/301)

60. 누구냐, 넌

다음 날 무림맹 대연무장에 다시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여전히 천 단위의 인원수였지만 그래도 어제에 비하면 많이 줄어든 셈이었다.

아침 해가 제법 높이 솟아오르자 대연무장 정면의 단상에 설치된 북이 큰 소리로 울렸다.

둥! 둥! 둥! 둥!

“모두 조용.”

단상 위에 나타난 무림맹 고수의 목소리가 대연무장에 묵직하게 울렸다.

크게 외친 소리는 아니었지만, 웅혼한 내력이 담겨 있어서 모든 이의 귀에 그 목소리가 또렷하게 박혀들었다.

적비연은 그를 올려다보면서 적어도 자신보다 고수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확실히 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다.

하긴, 자신은 이제 막 초절정의 단계로 들어선 것이니 자만할 수준은 아니었다.

자신을 무림맹 의협당주(義俠堂主) 노상국(盧常國)이라고 소개한 사내는 간단한 환영인사를 건넨 후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럼 이제부터 천하용봉대회 일차관문을 안내 해드리겠소. 천하용봉대회 일차관문은 개벽관(開闢關)!”

노상국이 손을 뻗자 한 장의 지도가 촤르륵 펼쳐졌다.

제법 큰 지도였지만, 대연무장이 워낙 넓었기에 멀리 있는 자는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결국 지도를 자세히 보기 위해서는 내공으로 안력을 키워야만 했다.

노상국이 손가락으로 지도 한 부분을 가리켰다.

“규칙은 간단하오. 정확히 반 시진 후, 집합 장소의 정문이 닫히기 전까지 도착하면 통과! 이차관문은 이곳에서 시작될 거요. 반드시 정문으로 들어가야만 하오. 그럼 여러분 모두의 무운을 빌겠소.”

말을 마친 노상국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단상을 내려갔다.

그걸로 끝이었다.

어떠한 부연 설명도 없다.

-니미, 더럽게 불친절하네.

어느새 적비연 어깨 위로 홀연히 나타난 극마가 팔짱을 낀 채 투덜거렸다.

‘뭐, 불친절할 것도 없지. 핵심은 모두 말해줬으니.’

하지만 내공이 부족한 자들은 지도를 확인하지 못했기에 목적지도 모르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로 가란 거야? 뭐가 보여야지!”

“나도 모르겠어. 일단 사람들 가는 곳으로 따라가 보자고.”

“반 시진이면 그리 먼 곳은 아니겠지.”

하지만 적비연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마 저들은 늦을 것이다.

노상국이 가리킨 곳은 서안의 북동쪽에 위치한 여산(驪山)이었다.

분명히 달려서 가기에는 시간이 빠듯하다.

한마디로 이번엔 경공술을 보겠다는 뜻이리라.

경공술은 무공에서도 기본 중의 기본.

눈치가 빠른 자들은 벌써 출발했다.

어딘지도 모르고 따라붙는 자들을 떨쳐내기 위해 몇몇 이들은 일부러 먼 길로 돌아가는 듯했다.

적비연도 달리기 시작했다.

은신과 경공의 달인이었던 운귀의 능력이 있었기에 늦을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늑장 부릴 이유는 없다.

이왕이면 너무 늦지도, 뒤처지지도 않게.

적비연은 최단거리를 이용하기로 했다.

시간이 많이 남으면 목적지 근처에서 여유를 부릴 생각이었다.

그렇게 숲을 가로지르며 얼마나 달렸을까?

어느 순간,

쉭쉭쉭쉭!

느닷없이 사방에서 암기가 쏟아지는 게 아닌가?

얼른 몸을 비틀면서 검을 휘두르자 암기 수십 자루가 튕겨 날아갔다.

따다다다당!

촤아아악!

적비연이 공중제비를 돌고는 바닥에 미끄러지듯 착지했다.

그 순간 갑자기 수풀 아래에서 넓고 커다란 판자가 수직으로 일어서며 적비연을 덮쳐왔다.

후우웅!

판자에는 풀잎처럼 녹색으로 칠한 칼날이 빽빽하게 박혀 있었다.

파밧!

적비연이 얼른 경공을 펼쳐 물러나자, 조금 전까지 서 있던 자리에 칼날 박힌 판자가 쿵! 소리를 울리며 덮쳤다.

-호오, 재미있는 장난감을 여기저기 잘도 뿌려놨군.

극마가 스르르 나타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적비연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주변을 살폈다.

기감을 펼쳐 보니 기척은 없다.

단순한 기관 장치다.

‘그런가? 경공술만 보진 않겠다는 거군.’

어쩐지 정식 관문치고는 생각보다 단순하다고 느꼈다.

한데 이런 함정이 있을 줄이야.

아니나 다를까 인근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기관 장치가 시간에 맞춰 작동하도록 되어 있나 보다.

-아무리 그래도 좀 악취미군.

적비연도 극마의 말을 부정하진 않았다.

이래서야 진짜 죽을 수도 있지 않나?

하긴, 뭐 이 정도 위험은 강호인으로서 일상처럼 받아들여야 한다는 건가?

‘그렇다면 조금 더 서둘러야겠군.’

단순히 경공만 시험하는 게 아니라면 여유가 없을지도 모른다.

타앗!

적비연이 서둘러 바닥을 차고 쏜살같이 날아갔다.

수풀과 나무, 바위 따위가 정신없이 뒤로 지나간다.

적비연은 그야말로 바람처럼 달렸다.

중간중간 기관 장치는 계속해서 작동했다.

느닷없이 불길이 치솟거나 어디선가 쇠창살이 날아들기도 했다.

곳곳에 쓰러져서 허덕이는 부상자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적비연은 거침이 없었다.

어느 순간에는 같은 자리를 맴돌기도 했다.

진법이었다.

그땐 의외로 극마가 도움이 됐다.

-이런 시답잖은 길 찾기 놀이라니. 흥!

극마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문을 찾아냈다.

과연 우화등선한 자의 노회함이 다르긴 달랐다.

물론 적비연도 시간을 조금 들인다면 빠져나오는 게 어렵지는 않았겠지만, 굳이 알려준다는 걸 마다할 필요는 없었다.

‘뭐, 이대로라면 충분히 도착하고도 남겠군.’

이제는 주변에서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다수의 무인들이 하기룡이나 매삼랑 같은 십이용봉 후보자들의 뒤를 쫓아간 탓도 있었다.

아무래도 앞서 달린 자가 기관이나 진식을 파훼해 주면, 뒤따르는 자들은 그저 달리기만 하면 될 테니까.

덕분에 적비연은 한적한 길을 홀로 여유롭게 달렸다.

‘너무 일찍 도착해도 주목을 받을 테니 슬슬 속도 조절을 해볼까?’

* * *

“다시 한번 말한다. 만검세가 이 공자 하천웅이다. 최대한 보는 사람이 없을 때 단숨에 노려야 한다.”

백룡문 흑풍대(黑風隊) 삼 조장(三組長) 장사구(張思求)의 말에 스무 명의 무인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존명!”

매삼랑은 여산에서 이차관문이 치러진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묘청운 덕분이었다.

과연 남해상단의 입김이 무서운 것인지, 묘청운은 몇 시진 만에 오늘 있을 시험 정보를 알아냈다.

그 정보를 토대로 매삼랑은 흑풍대를 조별로 나눠 여산 근처에 매복시켰다.

그중에서도 남서쪽 기슭에 매복한 건 흑풍대 삼 조.

부조장 송자개(宋慈蓋)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했다.

“뭐, 그 많은 길목을 놔두고 이쪽으로 올까요? 최단거리라고는 하지만 길이 험하기도 하고.”

“그래도 혹시 모를 일 아니냐? 집중해.”

장사구가 싸늘하게 대꾸했지만 그 역시 송자개의 생각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설혹 이곳으로 온다고 해도 한참이나 뒤쳐져서 나타날 가능성이 컸다.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최단거리인 만큼 기관 진식이 가장 많이 집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주변에 다른 무인들이 있을 때는 은밀히 뒤따르다가 기회를 봐서 제거하도록 한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언제쯤 사람이 지나갈까요?”

“아무리 빨라도 일각은 더 지나야겠지.”

장사구의 대답이 무색하게 누군가 속삭이듯 외쳤다.

“엇! 누군가 나타났습니다!”

뭐? 벌써? 그럴 리가…….

장사구와 송자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돌아보았다.

정말로 누군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일단 표적일 가능성은 없을 테니 몸을 숨기고…….”

“표적입니다!”

다시 누군가 외쳤다.

거의 동시에 장사구도 상대를 알아보았다.

틀림없다.

만검세가의 하천웅!

하지만 어째서 벌써 여기까지?

가능한 일인가?

아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지!

주변에 인기척은 없다.

오히려 잘됐다.

단숨에 제거한다.

“쳐라!”

장사구의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스무 명의 흑풍대원들이 복면을 쓰고는 일제히 몸을 날렸다.

촤아아앗!

갑자기 복면인들이 나타나자 적비연이 미끄러지며 멈춰 섰다.

‘뭐지? 이것도 관문 중 하나인가?’

생각도 잠시,

타앗!

제일 먼저 장사구가 날아들었다.

쒸에에엑!

그가 화살처럼 일직선으로 검을 뻗었다.

적비연이 허리를 활처럼 휘청 젖혔다.

스팟!

앞섶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지나친 장사구가 혀를 찼다.

“칫!”

아깝게 됐다.

조금만 더 빨랐어도 가슴을 뚫었으리라.

하지만 그건 장사구의 착각이었다.

적비연은 필요 이상의 동작을 취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딱 피할 수 있을 만큼만 움직인 것이다.

“흐압!”

“하앗!”

이번엔 왼쪽과 오른쪽에서 동시에 흑풍대원들이 덮쳐왔다.

적비연이 그대로 몸을 팽이처럼 회전하며 검을 휘돌렸다.

따다다앙!

그에게 날아들던 검신이 불꽃을 터뜨리며 튕겨나갔다.

적비연을 중심으로 자욱한 핏빛 기운이 퍼졌다.

만검세가의 무공인 백검혈화의 변초였다.

의외로 능숙하게 방어하자 장사구는 당황하고 말았다.

‘생각보다 강하다!’

만검세가의 이 공자는 개망나니라더니.

이렇게 강한 자였나?

일격필살은 이미 실패한 상황.

그래도 아직은 기회가 있다.

주변에서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최대한 빨리 제거해야 해!’

장사구가 수신호를 내렸다.

그러자 복면인들이 일제히 대열을 갖추며 기수식을 취했다.

촤촤악!

당장에라도 살을 엘 것만 같은 살기!

적비연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복면인들을 노려보았다.

“아주 그냥 필살의 의지가 가득하군. 보아하니 정식 관문은 아닌 것 같고. 노골적으로 살기를 드러내고 칼까지 들이밀었으니, 죽어도 억울할 건 없겠지?”

이번엔 적비연의 전신에서 살기가 풀풀 일어났다.

장사구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뭐지? 이자의 살기는 마치…….’

강호에서 구르고 구른 자처럼 거칠고 패도적이다.

얼핏 사파의 냄새가 날 정도다.

‘뭔들 상관없지. 너는 오늘 여기서 죽는다!’

마음을 굳힌 장사구가 재차 수신호를 내렸다.

순간, 흑풍대원들이 일제히 합격술을 펼치며 적비연에게 날아들었다.

바로 그때,

쒸쒸쒸에에엑!

따다다당!

푹푹! 싸아악!

적비연 주변으로 돌풍 같은 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난데없이 무인 세 명이 나타나며 검을 휘두르는 게 아닌가?

“크아악!”

“아악!”

복면인 대부분이 튕겨 나갔고, 몇몇 이들은 피를 흘리면서 쓰러졌다.

샤샤샥!

적비연을 에워싸며 순식간에 나타난 세 명의 무인.

그들은 바로 묵검과 단휘, 그리고 예홍이었다.

묵검이 뺨을 씰룩이며 복면인들을 노려보았다.

“감히 누구를 건드리는가?”

장사구가 눈자위를 꿈틀거렸다.

‘이, 이게 무슨……! 이들은 대체 누구지?’

마치 저 망나니를 호위하는 것 같지 않은가?

한데 두 사람의 가슴에는 대회 참가자임을 증명하는 명패를 달고 있다.

규정상 호위대가 같이 참가했을 리는 없을 텐데.

하긴, 자신들도 규정을 어기고 있는 셈이니.

그때 예홍이 싸늘하게 식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감히 가주님을 건드리다니. 사지를 찢어서 소금에 찍어 먹겠습니다.”

순간 단휘가 입을 쩍 벌리더니, 적비연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가주님. 저는 못 먹겠습니다.”

“아니, 뭐 먹을 것까진 없고.”

적비연의 대답에 예홍이 연검을 앞세우며 다시 말했다.

“그럼 피부를 벗겨 사막에 던져두겠습니다.”

“사막은 너무 멀어.”

“토막을 내서 끓는 기름에…….”

“됐고. 너희들은 먼저 가라.”

“예?”

예홍은 물론 묵검과 단휘도 놀라서 돌아보았다.

적비연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했다.

“괜히 이런 모습 들켜서 좋을 것도 없잖아? 저것들은 나로 충분하니까 가봐. 그리고 묵검은 앞으로 대회에 끼어들지 말고. 내가 위험해 보이더라도.”

“하지만…….”

“두 번 말하는 거 싫다.”

적비연의 말에 세 사람이 입을 다물었다.

그들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초절정에 이른 적비연이다.

자신들이 없어도 일, 이류 스무 명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으리라.

게다가 몇 명은 부상까지 입혀놨으니.

이만하면 시간도 충분할 테고.

“그럼 가보겠습니다.”

묵검이 고개를 숙이고는 몸을 날리자, 단휘와 예홍도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여산을 향해 달렸다.

장사구는 어이가 없었다.

목숨도 내던져 가며 지킬 것처럼 굴던 이들이 갑자기 어딜 가는 건가?

도대체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지?

그러는 사이 적비연이 천천히 기수식을 취했다.

“자, 그럼 다시 시작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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