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61화 (62/301)

61. 나도 좀 쉬자

새하얀 수염이 바람에 휘날렸다.

선풍도골의 풍채를 가진 노년의 사내.

그는 뒷짐을 진 채 나뭇가지 꼭대기에 꼿꼿하게 서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가지가 흔들렸고, 그의 몸도 바람결에 파도를 타듯 넘실거렸다.

범인이 본다면 입을 딱 벌릴 만큼 신묘한 경지였다.

“흐음.”

침음을 흘린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속속 모여드는 무인들을 보았다.

‘과연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도 기재(奇才)들이 많구나.’

가장 먼저 도착한 자는 화산파(華山派)의 매화수검(梅花秀劍)이라 불리는 현청(炫靑)이었다.

그리고 낙양문(洛陽門)에서 온 낙양쾌도(洛陽快刀) 임송화(林淞花)가 뒤를 이었다.

임송화는 아담한 체구와 어울리지 않게 커다란 도를 등에 매고 있었다.

‘저리 큰 대도를 다루면서도 쾌도라는 별호를 얻다니. 낙양문의 홍복이로군.’

그 후로도 무인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장사소룡 하기룡도 있었고, 천도미룡 매삼랑도 도착했다.

매삼랑은 기대했던 것보다도 많이 늦었는데 아무래도 자신의 여동생을 이끌며 오느라 그랬던 모양이다.

그 외에도 최근 천상단을 제조해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벽력적가의 무인들도 두 명 보인다.

‘그러고 보니 벽력적가주가 이 대회에 참가할 수 없어서 아쉽게 됐군.’

참가 규정상 문주나 가주는 후기지수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차관문이 시작될 이곳은 임시로 만든 집합소인 만큼 정문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허술했다.

간단한 목책이 울타리처럼 둘러져 있을 뿐, 별다른 건축물도 없다.

단지 정문만큼은 튼튼하게 지어놓았다.

수염을 쓸던 노인이 고개를 들고 해를 보았다.

‘이제 반각 정도 남았나? 슬슬 준비를 해야겠군.’

노인이 집합 장소에 설치된 목책 쪽을 돌아보았다.

그의 뜻을 알아들은 무림맹 소속 무인들이 일제히 목책 위로 올라가 대략 삼 장 간격으로 배치됐다.

혹시나 무리하게 목책을 넘어서라도 들어오려는 지각생들을 배제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유독 덩치가 큰 무인 두 명이 정문으로 다가가서 문고리를 잡았다.

이제 노인이 다시 한번 지시를 내리면 이곳 집합 장소의 정문이 닫히리라.

그때 마침 누군가 헐떡이면서 정문으로 달려 들어왔다.

“헉, 헉, 헉……!”

도착하자마자 무릎을 짚고 연신 숨을 몰아쉬는 사람은 묘청운이었다.

그를 본 노인이 눈살을 슬쩍 구겼다.

‘저 녀석이…… 남해상단의 소단주.’

노인은 알고 있었다.

묘청운이 일차관문에 대한 정보를 미리 알고 있다는 것을.

그럼에도 이렇게 늦은 것은 운이 없었던 걸까?

어쨌든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묘청운뿐만 아니라, 숱한 후기지수들이 각종 편법을 사용한다.

심지어 한 가문에서 소가주를 십이용봉으로 만들기 위해 그 수하들을 무더기로 참가시킨 경우도 있었다.

엄연히 따지자면 규정 위반이지만 그들은 교묘하게 규정을 피해간다.

그래도 무림맹은 엄격하게 제재하지 않는다.

어차피 음모와 배신, 온갖 간계가 난무하는 강호다.

이런 곳에서 그 정도의 편법에 가로막혀 좌절할 수준이라면 십이용봉의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물론, 묘청운처럼 노골적으로 주최 측에 요구하는 자는 드물지만.

‘집안 배경만 믿고 까부는 놈. 과연 얼마나 갈까?’

한편 묘청운은 겨우 숨을 돌리고는 매삼랑에게 다가갔다.

“형님, 역시 먼저 도착하셨군요. 매 소저도 무사히 도착해서 다행이오.”

매소약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고, 매삼랑이 희미하게 웃었다.

“자네는 좀 늦었군.”

“운이 없었습니다. 하필 기관 장치가 많은 길목으로 들어서는 바람에…….”

“뭐, 그래도 늦지 않게 들어와서 다행이네.”

묘청운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속삭이듯 물었다.

“한데 그 녀석은 보이지 않는군요.”

“그럴 수밖에.”

매삼랑이 싸늘하게 미소를 그렸다.

흑풍대 여섯 조가 모두 투입됐다.

어느 길목으로 오든 흑풍대가 처리했을 것이다.

저만치 선 하기룡도 기다리는 눈치였지만 하천웅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매삼랑이 뇌까리듯 말했다.

“아마 다시는 보지 못할 걸세.”

“역시. 뒷수습은 맡겨만 두십시오. 확실히 사고사로 만들어두겠습니다.”

“든든하군.”

매삼랑이 희미하게 웃고는 고개를 들어 노고수를 보았다.

여전히 나무 꼭대기에 서 있는 그는 늘어진 나무 그림자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시간을 확인하는 것이리라.

‘그나저나 정말이지 대단한 영감이군. 벌써 한 식경이 다 되도록 저러고 있으니.’

저 정도 수준이면 아마 무림맹에서도 알아주는 고수이리라.

매삼랑은 다시 정문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 사내가 쓰러질 듯 달려오고 있었다.

거리로 보니 시간 내에 정문 안으로 들어올 것 같다.

하지만 하천웅은 아니다.

묘청운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많이 줄었네요. 대략 삼백 명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군.”

확실히 많이 줄었다.

참가자가 일천 명이 넘었는데 약 삼분지 이 정도가 일차관문에서 탈락한 것이다.

이차관문에서는 또 얼마나 많이 떨어져 나갈까?

한편 먼저 도착해 있던 단휘와 예홍은 시종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했다.

“어째서 가주님이 아직 안 오시는 거지?”

단휘가 손톱을 물어뜯으며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예홍이 검을 스르릉 뽑아 들었다.

“남은 대회, 무운을 빌지. 나는 가주님의 곁으로 가겠다.”

쉬잇, 팍!

단휘의 발길질에 예홍의 연검이 날아가 나무 기둥에 꽂혔다.

마침 나무 기둥에 몸을 기대고 있던 무인이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이런 미친! 싸우자는 거냐?”

“아, 미안하게 됐소. 우리끼리 장난을 치다가 그만. 정중히 사과드리겠소.”

단휘가 얼른 허리까지 숙이며 사과하자, 상대는 씨근거리며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예홍이 단휘를 노려보았다.

“나의 의지를 방해하지 마라, 단휘.”

“재수 없는 소리 그만하라고! 너는 가주님이 걱정도 안 되냐?”

“이미 죽은 사람을 왜 걱정하는지.”

아, 도저히 말이 안 통한다.

‘가주님! 도대체 왜 이리 늦으시는 겁니까? 진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죠? 이러다 이 녀석 장례부터 치르게 생겼다고요!’

그때였다.

노고수의 내공 실린 음성이 허공에 울렸다.

“시간이 되었다. 정문을 닫는다.”

“존명!”

구구구구궁……!

육중한 덩치 무인 두 명이 두께가 일 척이 넘는 철문을 밀기 시작했다.

묘청운의 입매가 사악하게 비틀렸다.

“이걸로 놈은 끝이군요.”

“내 다시는 보지 못할 거라고 하지 않았나?”

“오라버니, 감사해요.”

매소약이 그제야 매삼랑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매삼랑이 부드럽게 웃으며 동생의 어깨를 감쌌다.

“이제 그런 녀석은 신경 쓰지 말고 다시 당당해지도록 해라.”

“네, 오라버니.”

다시 밝아진 매소약을 보니 매삼랑도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정문을 바라보던 매소약의 표정이 점점 사색이 되는 게 아닌가?

“왜 그러느냐? 약아.”

“저, 저…… 기……!”

“음……?”

그때쯤 다른 사람들도 웅성거리며 정문 쪽을 보고 있었다.

시선을 돌린 매삼랑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저놈이 어떻게……!”

“헉!”

묘청운도 놀라서 헛바람을 삼켰다.

조금씩 닫혀가는 정문 너머로 빠르게 달려오는 남자.

“그, 그, 그 녀석입니다! 형님!”

“나도 보고 있네.”

“저 녀석…… 어떻게 여기까지……! 분명히 처리하신다고…….”

“조용! 동네방네 소문낼 일이라도 있나?”

“죄, 죄송합니다. 너무 놀라서 그만…….”

“신경 쓸 것 없네. 놈이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일차관문은 탈락이야. 저 속도라면 도착하지 못할 걸세. 게다가 부상도 꽤 입었군.”

매삼랑의 말대로 적비연의 옷은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고, 곳곳에 베이고 찔린 상처가 가득했다.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된 모습.

마치 전장에서 홀로 적진을 누비다 귀환하는 병사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점점 닫혀가는 문을 보며 적비연이 크게 소리쳤다.

“아직 닫지 마라!”

하지만 고분고분 말을 들을 무인들이 아니었다.

두 명의 덩치 무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육중한 문을 밀어댔다.

이제 정문은 점점 좁아져 사람 하나가 겨우 들어올 수 있을까 말까 한 상황.

“쯧쯧. 틀렸군. 저자는 탈락이야.”

“안타깝게 됐군. 거의 다 왔는데 말이야.”

몇몇 이들이 혀를 찼다.

그리고 마침내 문틈이 한 뼘 정도 남았을 때,

타앙!

적비연이 커다란 철문에 양손을 갖다 댔다.

문틈으로 드러난 적비연의 얼굴이 피에 젖은 혈귀(血鬼) 같았다.

“닫지 말라고 했지?”

덩치 무인들이 움찔거렸다.

그 순간 다시 노고수의 엄한 목소리가 들렸다.

“뭣들 하는가? 어서 문을 닫지 않고!”

덩치 무인들이 다시 힘을 주기 시작했다.

그그그그……!

하지만 문이 좀처럼 밀리지 않았다.

적비연이 양손으로 철문을 마주 밀기 때문이었다.

“이익……! 닫지 말라니까……!”

그그그그……!

적비연의 팔뚝에 힘줄이 툭툭 불거져 나왔다.

꿀꺽.

지켜보는 자들이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지?

노고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상초유의 사태였다.

닫히는 문을 힘으로 열고 들어오려고 하다니!

내공이라면 저 두 명의 무인도 만만치 않을 텐데.

‘허어……! 별종이로다!’

그러거나 말거나 적비연은 이를 뿌득 갈면서 온 힘을 다해 문을 밀었다.

그그그그긍……!

-얼굴 벌게졌네?

어느새 나타난 극마가 이죽거렸다.

적비연이 이를 빠득 갈며 온 힘을 다했다.

‘시끄러워.’

-그러다 똥 싸겠는데?

‘닥쳐!’

-지금이라도 사부로 모셔라. 그럼 내 힘을 보태주겠다. 그 잘난 자존심 때문에 일차관문에서 탈락하고 싶은가?

‘제길, 그놈들만 아니었으면……!’

적비연이 이를 빠득 갈았다.

흑풍대 삼 조를 처리하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그놈들 중 하나가 신호탄을 던져 올렸다는 것이다.

그 바람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흑풍대가 모두 적비연에게 모여들었다.

개개의 무공은 적비연에게 한참 못 미치지만 백 명에 달하는 인원이 한꺼번에 덤벼드니 적비연도 시간이 흐르면서 손발이 어지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처음으로 묵검을 괜히 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길! 가란다고 아예 가버리냐? 하여튼 융통성이 없어! 융통성이!’

특히 흑풍대주를 상대할 때는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와 수하들이 한꺼번에 밀어닥치니 보통 감당하기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놈들을 모두 처리하고 나니 시간이 빠듯해졌다.

죽어가는 놈을 고문해서 놈들의 정체만 알아내고 온 힘을 다해 달려온 터였다.

-그만 끙끙거리고 쉽게 가라. 사부님으로 모신다면…….

“제길, 좀 꺼지라고!”

적비연이 버럭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선천지기를 끌어올렸다.

그 순간,

파앙!

콰당!

육중한 문이 거짓말처럼 활짝 열리면서 덩치 무인들이 엉덩방아를 찧는 게 아닌가?

“헉, 헉, 헉……!”

적비연이 비척거리면서 정문 안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놀란 표정을 짓는 노고수를 보며 씨익 웃었다.

“규정대로 문 닫히기 전까지…… 도착.”

말을 마친 적비연이 털썩 주저앉았다.

-흥, 지독한 놈!

극마가 씨근거리고는 스르르 사라졌다.

적비연은 그대로 벌러덩 누워 버리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늘어난 선천지기가 아니었다면 정말 탈락할 뻔했다.’

고작 저 문짝을 열려고 선천지기까지 사용했다는 걸 사람들이 알면 놀라자빠질 것이다.

한 번 고갈된 선천지기는 웬만해서는 채워지지 않는 것이기에.

노고수가 허공에 보이지 않는 계단이라도 있는 것처럼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내려왔다.

그것을 본 무인들이 저마다 감탄을 터뜨렸다.

바닥에 내려선 그가 쓰러진 덩치 무인들을 향해 호통쳤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것이냐? 어서 문을 닫지 않고!”

“예, 옛!”

덩치 무인들이 헐레벌떡 일어나서 얼른 정문을 닫았다.

그그그긍……! 쿠웅!

비로소 일차관문 종료였다.

노고수가 휙 돌아섰다.

“자, 그럼 이차관문을 시작하겠다.”

적비연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뭐? 벌써?

제길! 나도 좀 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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