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62화 (63/301)

62. 나도 좀 쉬자

딱!

노고수가 손가락을 튕기자 무림맹 소속 무인들이 앞으로 나서더니 종이 뭉치를 휙 뿌렸다.

펄럭!

눈치 빠른 후기지수들이 허공에 흩뿌려지는 종이를 낚아챘다.

노고수가 말했다.

“지금 나눠준 것들은 각서다. 이차관문 이후에 일어날 어떠한 일에 대해서도 책임을 묻지 않으며 모든 결과를 수용하겠다는 내용이다. 물론 참가자들끼리도 은원관계를 따지지 말아야 한다.”

적비연은 자기 앞에 떨어진 종이를 주워 들고는 찬찬히 읽어보았다.

‘흐음. 한마디로 사상자가 발생해도 무림맹은 책임지지 않겠다는 말이네.’

적비연이 각서 아래쪽에 자신의 피로 하천웅의 이름을 적고는 돌려줬다.

하지만 몇몇 무인들은 탐탁찮은 표정이 되어서는 기권을 선언했다.

아무래도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걸 노골적으로 확인하자 찝찝한 기분이 든 것일 테다.

무인 한 명이 귓속말을 전하자, 노고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장내를 둘러보았다.

“기권한 자를 제외하고 이차관문을 응시하는 인원은 모두 삼백열한 명! 지금이라도 기권할 의향이 있다면 거수하도록.”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오히려 대부분의 무인들은 두 눈에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물론 그 반대인 경우도 있었지만.

바로 매소약이 그랬다.

그녀는 몸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매삼랑이 곁에 있어서 기권을 하지 않았지만, 마음 같아서는 당장 이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왠지 그녀에게 있어서 하천웅은 죽여도, 죽여도 끝없이 일어나는 괴물처럼 느껴졌다.

그런 동생을 보면서 매삼랑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흑풍대가 당했단 말인가? 고작 저놈 하나를 잡지 못해서? 혹시 협력자가 있었나?’

매삼랑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하기룡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하기룡이 자기 동생을 도왔을 리는 없다.

그는 이미 자신보다도 먼저 이곳에 도착해 있었다.

오히려 하기룡도 자신의 동생이 왜 만신창이가 되어서 나타난 것인지 의아해할 뿐이었다.

하기룡은 눈살을 슬쩍 구기고는 매삼랑을 힐끔 보았다.

매삼랑이 얼른 시선을 거두는 것을 보고는 그가 가만히 생각했다.

‘저쪽하고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충분히 짐작해 봄 직하다.

남해상단 소단주가 내내 매삼랑과 붙어 있는 것을 보면…….

‘뭔가 있긴 있는 것 같은데.’

도무지 감이 안 온다.

이왕이면 저들이 동생을 처리해 주면 얼마나 좋겠나?

그리고 자신이 그에 대한 복수를 한다면 완벽한 그림이 될 텐데.

그래, 지금이라면 차라리 동생에게서 관심을 끄는 게 좋겠다.

이번 이차관문에서 저들이 동생을 마음 놓고 처리할 수 있도록.

더욱이 지금부터는 무림맹도 대회 중 사망사고를 묵시적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저들에게 찍히다니. 안됐구나.’

하기룡이 희미하게 웃어 보이고는 시선을 거두었다.

그러는 사이 노고수가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태진궁주(太眞宮主) 염능파(廉綾波)다.”

그러자 모여든 무인들이 웅성거렸다.

태진궁주 염능파.

무림맹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초절정고수!

‘과연 기세가 범상치 않다 싶더니.’

적비연이 내심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 나타난 극마가 팔짱을 끼며 물었다.

-저 아이가 그리 대단한 것이냐?

아이? 아, 하긴 극마 입장에서는 아이로 볼 수도 있겠네.

인간으로 따지면 천 살이 넘었으니.

-흥, 그걸 아는 놈이 버르장머리 없…….

‘무림맹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초고수가 바로 삼궁(三宮)의 주인들이지. 아마 강호 백대 고수에도 들어갈 테고.’

-과연 기세는 나쁘지 않군.

극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까마득한 조상이 자신을 평가하고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염능파는 품에서 뭔가를 꺼내 들어 올렸다.

딸랑딸랑.

그것은 글자가 새겨진 금속패였다.

대략 손가락 두 개 정도의 너비에 한 뼘 정도 되는 길이였다.

한데 그 안에 방울이라도 들어 있는 것인지 조금만 움직여도 꽤나 큰 소리가 울렸다.

“이차관문은 간단하다. 너희들은 지금부터 여산으로 들어가 이 금속패를 찾아오면 된다. 참고로 제한시간은 없다. 어떠한 수단을 쓰든 너희들의 자유다. 다만 외부인의 간섭은 허용하지 않는다.”

누군가 손을 들고 물었다.

“하나만 찾으면 되는 겁니까?”

“그렇다. 최종적으로 두 개 이상의 패를 제출하는 자는 실격 처리 한다. 그러니 한 사람이 하나만 가져오도록.”

“모두 몇 개의 패가 숨겨져 있습니까?”

“정확히 아흔다섯 개다. 아흔다섯 개를 모두 찾으면 이차관문은 끝난다.”

현재 인원 삼백열한 명.

이 중에서 또 삼분지 이 정도가 탈락할 거라는 소리.

참가자들 사이에서 다시 팽팽한 기류가 흐른다.

“또 다른 질문?”

“…….”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뭐, 이 정도면 필요한 건 다 이야기한 셈이니.

염능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화산파 현청은 앞으로 나오도록.”

옷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현청이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받아라. 너는 일차관문을 첫 번째로 통과했기에 이 패를 준다. 즉, 이차관문에 응시하지 않아도 된다.”

“감사합니다.”

현청이 포권을 하고는 옆으로 물러났다.

“자, 그럼 지금부터 이차관문, 임적탐관(林敵探關)을 시작한다!”

염능파가 내공을 실어 소리치자, 북소리가 크게 울렸다.

둥! 둥! 둥! 둥!

* * *

같은 시각.

수많은 무인들이 피투성이가 된 채 널브러져 있는 잔혹한 현장.

까마귀 두어 마리가 시체를 쪼다가 순간 기척을 느꼈는지 푸드득 날아올랐다.

“끄으으……!”

여린 신음을 흘리며 시체더미에서 몸을 일으키는 사내.

바로 흑풍대 삼 조장 장사구였다.

그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가 눈가로 스며들었다.

“크읏.”

인상을 잔뜩 찌푸린 그가 소매로 피를 닦아내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째서 이런 일이……!’

흑풍대 백이십 명이 몰살당했다.

단 한 사람에 의해서.

물론 처음부터 한꺼번에 작정하고 덤볐다면 결과는 어땠을지 모른다.

하지만 신호탄을 보고 모인 것이었기에 조별로 약간의 시간차가 있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일류와 이류고수 백여 명이 한 명에게 몰살당하다니!

이 정도면 초절정고수 수준이 아닌가?

동료들의 시체를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그 세 사람은 뭐였을까?

분명 만검세가는 아니었다.

그 여자는 하천웅을 보며 ‘가주’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설마……!’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만약 누군가 하천웅인 척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러니까 인피면구 따위를 써서 변장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납득이 된다.

천하의 개망나니라고 소문난 만검세가 이 공자가 이 정도의 신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왠지 모르지만 초절정고수가 하천웅을 연기하고 있다.

게다가 하천웅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분명 어딘지 모를 사특함이 있었다.

만약 사파의 초고수가 개입되어 있는 것이라면?

‘이건…… 알려야 한다! 뭔지 모르지만 소가주님께 반드시……!’

어금니를 꽉 깨문 장사구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자신 이외에 생존자는 없는 듯했다.

저만치 부조장이었던 송자개의 시신이 보인다.

송자개는 목부터 허리까지 기다란 검상이 새겨져 있었다.

억울하다는 듯 부릅뜬 눈이 애처롭지만 눈을 감겨주고 갈 시간 따위는 없다.

저벅…… 저벅……!

그렇게 힘겨운 발걸음을 옮길 때였다.

스슷.

등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

곧 시커먼 그림자가 장사구를 덮쳤다.

순간 등골을 타고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누구……?’

마른침을 꿀꺽 삼킨 장사구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해를 등진 시커먼 사내.

“또 보는군.”

“당, 당신은……?”

장사구가 뒷걸음질을 치다가 우뚝 멈췄다.

어느새 그의 가슴에는 시퍼런 검신이 박혀 있었다.

검을 찌른 사내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묵검이라고 한다.”

“묵검……?”

“가주님은 시끄러워지는 걸 원치 않는다.”

“끄윽……!”

“살수는 너희들이 먼저 뻗었으니 억울할 건 없을 터.”

쑤욱!

츄아아아!

검을 뽑자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털썩!

그 자리에서 절명한 장사구가 그대로 넘어가더니 다시는 움직이지 못했다.

촤악!

검신에 묻은 피를 털어낸 묵검이 검집에 검을 갈무리했다.

“계속 누워 있는 편이 좋았을 텐데.”

* * *

“하아, 계속 누워 있고 싶다.”

적비연이 파란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 하늘에 그림자가 드리워지더니 한 사람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헉!”

깜짝 놀란 적비연이 벌떡 일어났다.

적비연을 굽어보던 자는 다름 아닌 태진궁주 염능파였다.

염능파가 눈살을 찌푸렸다.

“천하태평이구나.”

“기를 많이 소진해서 좀 쉬고 있었습니다.”

“이미 다른 이들은 벌써 숲으로 들어가고 자네 혼자만 남았네.”

“알고 있습니다.”

“조급하지 않은가? 금속패는 아흔다섯 개밖에 없는데?”

“상관없지 않습니까? 좀 늦게 들어가도.”

“뭐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 하신 건…… 결국 먼저 찾은 놈에게서 뺏으라고 하신 말씀 아니었습니까? 그 금속패 속에 방울을 넣어둔 것도 그걸 위해서고요.”

‘호오, 이놈 봐라?’

염능파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적비연의 추측에 놀란 것은 아니다.

눈치만 조금 있다면 그 정도는 누구라도 짐작할 테니.

다만 자신이 누군지도 알면서 이렇게 따박따박 말대꾸하는 정신력이 놀라웠다.

보통이라면 눈도 마주치지 못할 터인데.

“그래서 남의 것을 뺏겠다는 것이냐?”

“안 됩니까?”

“된다.”

“그럼 그러는 편이 낫지요. 그동안 좀 쉬기도 하고요.”

“자신만만하구나. 일차관문은 꼴찌로 겨우 들어온 주제에.”

“그건 사정이 있었습니다.”

“사정이라면?”

적비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제가 좀 적을 많이 만드는 성격이라서요.”

일부러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여러모로 시끄러워져 봐야 적비연으로서도 좋을 게 없기에.

염능파가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 성격이라면.”

뭐야? 순순히 인정하는 거냐? 기분 나쁘게!

“그나저나 그렇게 기진맥진해서야 남의 것을 빼앗기는커녕 네 것도 지키지 못할 것 같구나.”

“괜찮습니다. 지금부터 준비하면 되니까요.”

말을 마친 적비연이 정좌를 하더니 품에서 단환 하나를 꺼냈다.

조금 전 단휘가 남몰래 슬쩍 건네주고 간 것이었다.

“공보단?”

역시 염능파는 단환의 냄새만 맡고도 바로 알아챘다.

적비연이 힐끔 눈을 뜨고는 물었다.

“안 됩니까? 규정에는 따로 없던데.”

“안 될 건 없다. 이차관문까지는.”

이걸 확실히 하고 싶어서 일부러 눈앞에 있을 때 꺼냈다.

괜히 나중에 사소한 트집이라도 잡히면 안 되니까.

“그럼 복용하겠습니다.”

“좋을 대로.”

“그런데 계속 거기서 구경하실 겁니까? 좀 신경 쓰이는데요.”

‘허어! 고얀 놈.’

하지만 운기행공을 하는 무인 곁에 붙어 있는 것도 강호 예절이 아닌지라 염능파는 말없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정말이지 별종이로구나.”

그가 멀어진 것을 확인한 적비연은 내공을 운기해 공보단을 완전히 소화시켰다.

단전에서부터 묵직한 기운이 되살아나는 것이 느껴진다.

마침내 그가 눈을 뜨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 그럼 이제 어떤 놈이 가진 걸 뺏어볼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