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풍비박산(風飛雹散)
딸랑딸랑.
적비연이 금속패를 던졌다가 받길 반복했다.
“이걸 노리는 거냐?”
적비연의 물음에 매삼랑이 피식 웃었다.
“여유 있는 걸 보니 어디 믿는 구석이라도 있나 보구나.”
“글쎄. 믿는 거라면 나 자신이랄까?”
-재수 없게 말하는 법이라도 어디서 배우는 거냐?
극마가 미간을 잔뜩 찡그리며 적비연을 힐끔거렸다.
매삼랑이 품에서 금속패를 꺼내 보였다.
“그건 우리도 이미 하나씩 가지고 있어서 필요 없고.”
“그럼 왜 날 막아 세운 거지?”
“몰라서 묻는 건 아닐 테고. 시간을 끌어보겠다는 건가?”
“정말 몰라서 묻는 건데.”
적비연이 어깨를 으쓱이자, 매삼랑이 어금니를 꾹 씹었다.
그가 은근히 내공을 끌어올리며 따졌다.
“네놈이 내 동생에게 한 짓을 알고 있다.”
“그래? 그럼 감사 인사를 하려는 거냐?”
“뭐라?”
매삼랑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적비연이 귀를 후비며 말했다.
“그러니까 네 여동생에게 올바른 교육을 해줘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러 온 거냐고 묻잖아.”
“격장지계를 펼칠 셈인가?”
“웬 격장지계? 혹시 지금 내 말에 화난 거야? 그럼 너도 되바라진 네 여동생과 같은 부류였구나?”
“노옴!”
후우우웅!
푸드드득!
매삼랑이 사자후를 터뜨리자 공력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면서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 바람에 인근에 있던 산새들이 화들짝 놀라며 날아올랐다.
매삼랑의 장삼이 잔뜩 부풀어 올라서 금방이라도 찢어져 나갈 듯했다.
그가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네놈을 내 직접 손보기 전에 하나만 물어보마.”
“두 개 물어도 돼.”
“이놈이 끝까지…….”
매삼랑은 이마에 핏대가 서는 걸 느끼면서도 간신히 화를 눌러 참았다.
원래 실력이 없는 것들이 입만 나불거리는 법 아니던가?
저놈이 동생과 묘청운을 위협했다지만, 그 둘의 무공이 고절하진 않다.
반면 자신은 일찌감치 십이용봉 후보로 거론되었다.
어디서 호패도 내밀지 못할 놈이 나타나서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힌 매삼랑이 적비연을 빤히 노려보며 물었다.
“일차관문을 어떻게 통과한 거지?”
“그걸 왜 묻지? 내가 통과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이놈! 흑풍대를 만났구나!’
매삼랑은 적비연의 반응을 보고는 확신했다.
하면 설마 이놈이 흑풍대를 뚫었단 말인가?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조별로 흩어놓았지만 어느 한 조가 발견할 경우 나머지 대원들이 집합하도록 했다.
흑풍대원만 전부 백이십이다.
한데 이 녀석이 단신으로 그들을 처리했다고?
‘그럴 리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그때 적비연이 불쑥 물었다.
“너구나?”
“뭐?”
“네가 그 떨거지들을 불러 모았구나?”
“떨거…… 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네 동생을 훈육했다고 백 명이 넘는 무인들을 모은 건 심하지 않냐?”
‘이놈! 흑풍대와 제대로 만났다! 그런데 어떻게?’
마치 매삼랑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적비연이 대꾸했다.
“너 때문에 죽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나도 만검세가의 자식이야. 뭐, 우리 아버지가 날 골치 아프게 여기긴 하지만 그래도 피를 물려받은 자식이란 말이지. 한마디로 나도 누군가 지켜주는 몸이란 거야.”
그제야 매삼랑은 적비연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그건 완전한 오해였지만.
‘이놈이…… 비호를 받고 있었구나!’
하긴 일차관문에서는 많은 문파들이 교묘하게 규정을 어긴다.
참가자와 불참자들을 애써 구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차관문은 다르다.
불참자들은 여산으로 발을 들일 수 없다.
만약 발각되면 그 순간 실격 처리된다.
‘그렇다면…… 차라리 잘됐군.’
이 자리에서 묵사발을 내주는 거다.
다시는 저런 건방진 말을 할 수 없도록.
더 이상 방해할 비호 세력도 없을 테니.
스르르릉.
매삼랑이 검을 뽑아 들자 적비연이 표정을 굳혔다.
“그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은데.”
“너에겐 그렇겠지. 하지만 너는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을 건드렸다. 그리고 잘 알고 있을 테지? 이곳에서 일어난 은원은 이곳에서 묻는다는 걸.”
“뭐, 알고는 있지만 굳이…….”
“잔소리가 많다!”
타앗!
매삼랑이 일갈을 터뜨리더니 다짜고짜 바닥을 차며 쏜살같이 날아갔다.
쒸에에엑!
적비연이 얼른 검을 뽑아 들었다.
쩌엉!
고막을 찢어발길 듯한 금속성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콰당탕탕!
포탄처럼 튕겨 나간 적비연이 그대로 바닥을 구르더니 저만치 나무 기둥에 처박혔다.
“크윽!”
적비연이 인상을 잔뜩 구기더니 짐짓 큰 소리로 말했다.
“아앗, 생각보다 너무나 고강하잖아? 깜짝 놀랐어!”
-지금 그건 연기라고 한 거냐?
‘시끄러워. 다 생각이 있다고.’
-나참, 그런 어설픈 연기에 속을 인간이 어디에…….
극마가 말을 마저 잇기도 전에,
“오오오! 역시 형님이십니다! 저놈이 완전히 놀라서 쫄았군요!”
묘청운이 두 눈을 반짝이며 소리쳤다.
그의 감탄에 어깨가 으쓱해진 매삼랑이 천천히 적비연에게 걸어왔다.
“네놈은 날 두 번이나 열받게 했다. 먼저 내 동생을 능멸했고, 흑풍대를 공격했지.”
“그거…… 두 번 다 그쪽이 먼저 잘못한 건데.”
“누가 먼저 잘못한 건지는 천천히 따지도록 하지.”
팟!
매삼랑이 다시 빛살처럼 날아갔다.
쉬까앙!
“크읏!”
적비연이 휘청거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매삼랑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걸 막아? 과연 아주 맹탕은 아니구나.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는 이 몸을 상대하지 못한다!’
매삼랑이 연이어 검공을 퍼부었다.
깡! 까강! 까라라랑!
정말이지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현란한 공격이었다.
반면에 적비연은 막아내는 것에만 급급해 보였다.
묘청운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역시 형님이십니다! 저놈은 지금 피하는 것도 벅차 보입니다!”
‘당연한 것을.’
매삼랑은 냉소를 짓고는 더욱 매섭게 몰아붙였다.
이대로 조금만 더 공격을 퍼붓는다면 적비연은 알아서 무너질 터였다.
그런데 이변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벌어졌다.
“꺄악!”
느닷없이 들린 비명 소리에 매삼랑이 우뚝 멈추고는 돌아보았다.
“소약!”
매소약이 쓰러져 있었고, 낯선 남자의 손에 금속패가 들려 있는 게 아닌가?
매삼랑이 도끼눈을 뜨고는 소리쳤다.
“웬 놈이냐!”
깡마른 체구의 사내가 매삼랑을 스윽 돌아보더니 금속패를 들어 보였다.
“이게 필요해서.”
그러자 묘청운이 깡마른 사내에게 몸을 날리며 검을 휘둘렀다.
“이놈! 감히 누구의 패를 빼앗느냐!”
쒸이이잇!
하지만 마른 사내는 생각보다 훨씬 빨랐다.
파밧!
순간 그의 신형이 사라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묘청운 앞에 나타나 목을 움켜잡고는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아 버렸다.
“컥!”
꽈다앙!
쩌저적……!
바닥에 마른 논바닥 같은 균열이 생겼다.
묘청운은 거품을 물고 기절해 버렸다.
이를 본 매삼랑이 눈이 뒤집혀 달려들었다.
“노오옴!”
순식간에 십여 장을 날아간 매삼랑이 그대로 검기를 일으키며 마른 사내를 베었다.
쒸이이잇!
슈가가각!
하지만 검기는 마른 사내를 그대로 지나치면서 애꿎은 삼나무만 베고 말았다.
구구구구…… 쿠웅!
거대한 삼나무가 쓰러지자 육중한 소리가 울렸다.
그 자리에 있었던 마른 사내는 이미 그 옆의 삼나무 꼭대기에 올라가 있었다.
“규정대로 대회에 충실히 임한 것일 뿐이니 은원은 따지지 않기를.”
무뚝뚝하게 말을 뱉은 마른 사내가 이내 경공을 펼쳐 어디론가 사라졌다.
한편 적비연은 갑자기 일어난 일에 어깨를 으쓱이고는 중얼거렸다.
“그렇게 방울 소리를 시끄럽게 울려댔으니 누군가는 올 줄 알았지. 그래도 저런 놈이 나타날 줄은 몰랐네.”
-저 녀석은 꽤 강하군.
극마의 말에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극마가 그런 적비연을 힐끔거리고는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글쎄. 저 마른 남자, 왠지 낯이 익어서.’
분명히 낯이 익다.
그런데 어디서 봤는지 도통 모르겠다.
하긴 지금까지 만난 사람이 한둘도 아니고.
‘뭐, 일단 이 틈에 가던 길이나 가야겠다.’
금속패를 확보한 이상 굳이 매삼랑과 싸울 필요는 없다.
어차피 삼차관문에서 만나게 되어 있을 테니.
적비연이 경공을 펼치고 날아가자, 매삼랑이 이를 뿌득 갈고는 울분을 터뜨렸다.
“내 반드시 두 놈 다 죽여 버리겠다!”
* * *
염능파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장내를 훑어보았다.
모두 아흔여섯 명.
금속패를 찾아서 돌아온 자들이다.
‘생각보다는 일찍 끝났군.’
그는 특히 저만치 뒤에서 하품을 하는 적비연을 빤히 보았다.
‘만검세가의 하천웅이라고 했던가? 정말이지 독특한 놈이로구나.’
제일 나중에 출발했지만 비교적 빠른 시간에 돌아왔다.
게다가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다.
오히려 수십 년은 살아온 사람처럼 느긋하다.
하는 행동만 보면 노인이 서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분명 저 여유로움은 허세가 아니다.
‘만검세가가 두 마리 용을 키웠나 보군.’
반면 기대가 컸던 백룡문의 자녀 중 한 명은 탈락하고 말았다.
의외였다.
매소약이 무공이 강하지는 않다지만, 그래도 나름의 수완이 있었을 텐데.
게다가 매삼랑이 함께 있었을 테고.
하긴 이번 시험이 시작되고 나서 그녀는 이상할 정도로 눈에 띄지 않았다.
반면 만검세가의 하천웅 이외에 새로 떠오른 인물도 있다.
저만치 나무 아래 걸터앉은 마른 사내.
광주(廣州) 신풍문(神風門)의 장문탁(張紋濯)이라고 했던가?
‘생긴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문파가 잠룡을 키워냈구나.’
염능파가 수염을 한 차례 쓸고는 입을 열었다.
“이로써 이차관문 임적탐관을 종료한다. 금속패를 제출한 아흔여섯 명은 열흘 후부터 삼차관문인 용봉비무(龍鳳比武)에 임하도록 한다. 용봉비무는 승자결 방식으로 진행되며 십이용봉이 정해지는 마지막 관문이다. 대진표는 당일 즉석에서 공개되니 오늘은 모두 돌아가서 푹 쉬도록.”
열흘의 시간을 주는 이유가 있다.
부상자들 때문이다.
비무에 임할 때만큼은 최대한 최적의 몸 상태를 유지한 다음에 겨루도록 하려는 것이다.
말을 마친 염능파가 몸을 돌려 걸어가자, 모여 있던 아흔여섯 명의 후기지수들도 하나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 * *
엿새 후.
“아버지가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하기룡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하불범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어찌 그리 놀라느냐? 너희들이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비무를 관람하기 위해 왔다. 나 같은 사람이 적은 것도 아니지 않느냐?”
물론 그렇다.
각 문파의 수장들은 대체로 제자들의 성적을 직접 보기 위해, 또는 무림맹 수뇌부와 친분을 쌓기 위해서 서안을 찾아오곤 한다.
다만 하불범이 이렇게 예고도 없이 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내일 있을 비무는 자신 있느냐?”
“소자, 가문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허허, 너는 걱정하지 않는다. 웅아도 잘 해주었더구나.”
“운이 좋았습니다.”
적비연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하불범이 그런 둘째 아들을 흡족한 표정으로 보았다.
확실히 그 망나니 아들이 아니다.
어딘지 늠름해졌다.
고개를 끄덕인 하불범이 비로소 속에 담고 있던 말을 꺼냈다.
그건 적비연이 기다린 말이기도 했다.
“너희들에게 긴히 할 말이 있다.”
“무엇입니까?”
“말씀하십시오.”
하불범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충격적인 말을 꺼냈다.
“너희 두 사람 중 십이용봉에 드는 자에게 소가주 자리를 물려주기로 했다.”
“예에?”
하기룡이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하지만 적비연은 담담했다.
‘역시 진 총관이 잘 해주었군.’
그가 내심 미소 짓는 동안 하기룡이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만에 하나…… 정말 만에 하나 저희 모두 십이용봉에 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하하. 그럼 아주 경사스러운 일이겠구나. 만약 그리된다면 둘 중 더 높은 성적을 거둔 자에게 소가주를 물려주겠다. 그리고…….”
이어진 발언은 적비연으로서도 놀랄 만한 내용이었다.
“너희 중에 일룡(一龍)이 나온다면 가주의 자리를 바로 넘겨주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