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풍비박산(風飛雹散)
적비연이 눈을 끔뻑이고는 하불범을 보았다.
“가주 자리를 바로 넘겨주시겠다고요?”
“그렇다. 너희들은 갑작스러울지 모르겠지만 실은 오래전부터 생각하던 것이기도 하다. 다만 이런 날이 정말 올 줄은 몰랐지만.”
그러자 하기룡이 당황한 표정으로 나섰다.
“하지만 아버지. 아버지가 이렇게 정정하신데 어찌 저희들이 감히…….”
“아니다. 나도 언젠간 일선에서 물러날 때가 올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강호의 상징이 되는 일룡이 탄생할 때가 가장 적기이지 않겠느냐? 또한 현재 장사를 이끌어가는 무인들은 대체로 젊다. 본가와 원수를 진 적가만 보더라도 그렇지 않더냐? 너희 중에 일룡이 탄생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기회도 없다고 본다.”
이번엔 적비연이 나서서 물었다.
“하면 다른 분들도 동의한 겁니까?”
“그렇다. 물론 몇몇 반대 의견을 제시한 자들도 있었으나, 대체로 찬성 의견이 많았다.”
호오, 이것 봐라?
이야기가 이렇게 간단하고 빨리 진행되다니.
총관 진서국이 확실히 제 역할을 해준 모양이다.
적비연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얼마 전 장사에서 진서국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공자께서 최종관문까지만 올라가신다면 제가 이곳에서 모든 작업을 마쳐놓겠습니다.”
진서국의 말에 적비연이 그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며 물었다.
“아버지가 내게 소가주 자리를 물려주도록 하겠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단, 공자께서 소가주님보다 높은 성적을 거두셔야 할 겁니다.”
“그건 맡겨두시오.”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무엇이오?”
“혹 어디선가 기연을 얻으신 겁니까? 무공이 갑자기 상승하신 것 같아 감히 여쭤봅니다.”
“기연이라. 내가 의식을 잃었던 게 기연이라면 기연이겠지. 꿈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둡시다.”
모호한 말이었지만 진서국은 더 따지지 않았다.
대신 다짐을 받아냈다.
“반드시 공자께서 소가주님보다 높은 성적을 거두셔야 합니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소가주의 자리도 어렵게 됩니다.”
“잘 알겠소. 아버지가 한 번 더 내게 기회만 줄 수 있도록 해주시오.”
“그러겠습니다. 만약…….”
“만약?”
“어려운 이야기지만 만에 하나 일룡이 되신다면 그 이상도 가능하도록 애써보지요.”
그때까지만 해도 그 이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저 소가주로 확정하고 번복이 없도록 하겠다는 정도로 이해했다.
한데 당장 가주 자리를 넘겨주겠다니?
적비연이 힐끔 하기룡을 쳐다보았다.
한데 하기룡도 나쁘지 않은 표정이었다.
하긴. 동생에게 질 거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고 있을 테니.
어쩌면 이 기회에 하기룡 역시 가주의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날을 벼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불범 역시 그것을 노린 것이리라.
가주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라도 두 아들 중 하나가 천하일룡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 아니겠나?
척!
하기룡이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아버지 기대에 부응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허허, 그래. 그래야지.”
하불범이 부드럽게 웃으며 두 아들을 바라보았다.
* * *
맹주전에 무림오절(武林五絶)이 모였다.
무림오절이란 무림맹 간부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초고수를 일컫는 말이다.
맹주 허위청이 기다란 목간에 새겨진 이름들을 찬찬히 훑고는 고개를 들었다.
“과연 이번 대회에서는 수준 높은 참가자들이 많은 것 같소.”
“아마도 보상이 여느 때보다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차관문인 임적탐관을 주관했던 염능파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무림오절에 속한 묵성궁주(墨星宮主) 고엽풍(高葉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총군사님의 계책이 어느 정도 통한 것이라 볼 수 있군요.”
“계책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총군사 가후(賈侯)가 고개를 저으며 겸양을 갖춰 답했다.
이에 듣고만 있던 장로회주 편무량(扁無量)이 맹주를 돌아보았다.
“하면 이번 십이용봉에게 그 임무를 내리실 생각이십니까?”
“이만한 성적이라면 그래도 좋을 것 같습니다.”
맹주의 대답에 나머지 두 사람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의 뜻을 나타냈다.
한 명은 맹주 호위를 전담하는 수룡전주(守龍殿主) 태무결(太無缺)이었고, 다른 한 명은 부맹주이자 금악궁주(禁惡宮主)인 축일공(祝日公)이었다.
맹주가 염능파를 보며 물었다.
“직접 대회를 주관하신 염 당주가 보시기에 눈에 띄는 인재가 있었소?”
“몇몇 있습니다. 개중에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자들도 있었지요.”
“예측하지 못한 자들이라면?”
“우선 낙양문의 임송화는 소문 이상이더군요. 그리고 신풍문의 장문탁도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또 만검세가의 하천웅도 뜻밖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적성문(赤星門)의 소문주 진도천(眞刀川)을 비롯해 몇몇이 있었습니다.”
“하면 명불허전은 누가 있었소?”
“화산파의 현청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고, 만검세가의 하기룡, 백룡문의 매삼랑, 개방의 만소걸(萬笑乞) 정도가 특히 눈에 띄었습니다. 물론 제가 미처 알아보지 못한 잠룡이 또 있을 겁니다.”
“하긴. 아흔여섯이나 되니.”
맹주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십이용봉이 정해지고 모든 대회가 끝나면 총군사의 말대로 잠룡비동(潛龍飛東)의 계를 실시하겠소.”
처척!
맹주전에 모인 다섯 사람이 일제히 포권하며 대답했다.
“맹주님의 뜻을 따릅니다!”
* * *
드디어 용봉비무가 열리는 날.
무림맹 대연무장에는 세 개의 비무대가 있었고, 그곳에서 각각 비무가 순서대로 치러졌다.
또한 단상 쪽에는 귀빈석이 마련되어서 각 문파의 수장들이 참관할 수 있도록 했다.
물론 하불범도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적비연의 대전 상대는 적성문의 소문주 진도천이었다.
육중한 덩치에 커다란 쌍도를 쓰는 자였는데, 나이에 비해 무척이나 겉늙어 보이는 외모였다.
마침내 적비연의 차례가 되었다.
비무대 위로 오르자 관람하는 자들의 함성이 크게 들렸다.
마침 극마가 옆에 나타나더니 턱을 괴고는 말했다.
-흐음. 매삼랑이라는 녀석이랑 붙을 줄 알았더니 의외군. 그놈들이라면 대진표를 조작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일부러 진도천을 나와 붙인 거야.’
-어째서? 그날 보았을 때는 당장에라도 네놈을 때려눕힐 것처럼 굴더니?
‘일단 간을 보겠다는 거지. 뭐, 매삼랑이라는 녀석은 생각보다 신중한 성격 같았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관람자들 사이에는 이미 비무를 끝낸 매삼랑이 섞여 있었다.
어찌나 두 눈에 힘을 주고 노려보는지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과연 이번 비무를 통해 네 실력을 확실히 확인하겠다는 건가?
‘그럴 거야. 아마 여기서 이기면 매삼랑이랑 붙을 확률이 높겠지.’
적비연이 마주 선 상대를 빤히 보았다.
적성문의 진도천이라.
첫 대전 상대치고는 나름 강한 자다.
우연은 아닐 것이다.
분명 남해상단의 입김이 작용했으리라.
뭐, 어차피 큰 상관은 없지.
생각을 마친 적비연이 비무대 가운데로 걸어가 포권을 취했다.
“진 형에게 한 수 배우겠소.”
그러자 진도천이 씨익 웃으며 마주 포권했다.
“목숨은 보장해 드리겠소.”
그의 답례가 끝나자 작은북소리가 둥둥 두 번 울렸다.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적비연이 장내를 힐끔힐끔 보니 여기저기에서 돈을 거두는 모습이 보였다.
내기를 하는 것이다.
비무대회가 있을 때면 빠질 수 없는 광경이기도 했다.
불법은 아니다.
오히려 무림맹 측에서는 장려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내기를 통해 무림맹이 거두어들이는 수익도 막대하다.
그때 적비연의 귓가로 묵검의 전음이 흘러들어왔다.
[배당은 삼 대 이입니다. 가주님이 적습니다.]
한마디로 적비연이 진다는 쪽에 돈을 건 사람이 더 많다는 뜻.
예상대로다.
그래도 최종관문까지 올라왔기 때문인지 적비연을 대놓고 무시하는 자들은 없었다.
적비연이 검을 뽑아 들고는 슬그머니 기를 끌어올렸다.
목숨은 보장하겠다니.
자신감이 차고 넘치지 않나?
용봉비무는 어느 한 사람이 패배를 시인하거나 전투 불능이 될 때까지 진행이 된다.
물론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추후 은원을 따질 수는 없다.
그런 걸 볼 때 진도천의 인사는 배려라고도 할 수 있지만, 확실히 패도적인 면이 없진 않다.
마침 진도천과 눈이 정확히 마주쳤다.
타앗!
순간 진도천이 번개처럼 몸을 날려 왔다.
“죽어랏!”
쒸에에엑!
시퍼런 도기를 이끌면서 진도천의 육중한 몸이 혜성처럼 떨어져 내렸다.
콰앙!
시퍼런 대도가 그대로 적비연이 서 있던 자리를 내려찍었다.
적비연이 이맛살을 슬쩍 구겼다.
목숨은 보장하겠다더니 다짜고짜 죽으라고?
말과 행동이 너무 안 맞네. 아니, 말도 앞뒤가 안 맞네.
진도천의 공격은 계속 이어졌다.
“노옴! 언제까지 피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죽어라앗!”
쒸이잉! 쉬카앙! 쒸에엣!
두 자루의 도가 거침없이 허공을 갈랐다.
도를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죽으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아무래도 기합성과 비슷한 습관 같았다.
따앙!
촤촤아아악!
쌍도가 동시에 내려쳐지는 것을 아슬아슬하게 막아낸 적비연이 뒤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적비연이 연신 어깨를 들먹였다.
“하아, 하아, 하아!”
“지금이라도 패배를 선언한다면 다치지 않을 거요.”
진도천이 도 한 자루로 적비연을 척 가리키며 말했다.
하오체와 반말이 뒤섞였다.
‘얼핏 보면 반쯤은 미친 사람 같군.’
-공감이다.
적비연이 호흡을 고르는 척하며 천천히 기수식을 취했다.
이만하면 꽤 고전하는 것처럼 보이리라.
그래야만 한다.
하기룡과 매삼랑의 이목을 속이기 위해서는.
-굳이 그들을 속일 필요가 있나?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언젠간 비무하게 될 텐데.
‘나한테 생각이 있다니까.’
적비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제 더 이상 비무를 길게 끌 생각은 없다.
어차피 자신이 월등한 실력으로 이긴 것만 아니라면 상관없으니.
반면 적비연이 패배 선언 대신 기수식을 취하자 진도천이 콧김을 뿜어내고는 두 자루의 도를 들고 기수식을 취했다.
다음 순간,
타앗!
“죽어라앗! 난도살풍(亂刀殺風)!”
우렁찬 고함 소리와 함께 두 줄기의 도기가 어지럽게 쏟아졌다.
따다다당! 따당!
적비연이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며 두 자루의 도를 막아냈다.
연신 불꽃이 터져 나오자 지켜보는 자들이 함성을 질러댔다.
‘있구나. 초식명을 입 밖으로 소리치는 놈이…….’
-그러게 말이다.
어쨌거나 살벌한 초식명답게 진도천은 무서운 기세로 도를 휘둘러 왔다.
적비연의 입매가 슬쩍 올라갔다.
‘딱 좋다. 이거라면 그런대로 말이 되겠어.’
한편 적비연의 희미한 미소를 본 진도천은 머리에서 열이 나는 듯했다.
‘웃어? 감히? 이 몸의 난도살풍에 맞서면서?’
화가 난 그가 다시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노오옴! 죽어랏! 낙도추혼(落刀追魂)!”
진도천의 몸이 허공으로 부웅 날아올랐다.
적비연이 겁을 먹은 듯 헛바람을 삼켰다.
“흐익!”
적비연이 눈을 질끈 감으면서 검을 들어 올리는 찰나,
툭,
적비연의 왼발이 오른발에 걸리면서 균형을 잃고 넘어지고 말았다.
물론 이것 또한 적비연의 계산이었지만, 진도천으로서는 갑작스러운 변수였다.
“음?”
콰자앙!
마침내 진도천이 그대로 두 자루의 도를 바닥에 꽂았다.
정말이지 머리카락 한 올 차이로 적비연의 얼굴 양옆을 내려찍었다.
함성을 지르던 사람들이 일순 조용해졌다.
진도천이 생각하기에는 적비연이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운이 따랐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적비연을 노려보았다.
“너 이 새끼……?”
그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놀랍게도 적비연의 검이 진도천의 왼쪽 어깨에 깊숙이 박혀 있는 게 아닌가?
적비연이 씨익 웃더니 전음을 흘렸다.
[이거 참, 천운이네?]
적비연이 검을 쥔 손에 내력을 흘려보냈다.
쫘자자자작!
순간 진도천은 수천 자루의 칼로 난도질을 당하는 고통을 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아악!”
진도천이 몸을 비틀며 쓰러지자, 귀빈석에서 지켜보던 적성문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저런……!”
반면 하불범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말이지 둘째 아들이 죽는 줄만 알았다.
아슬아슬하게 두 개의 도신이 얼굴을 스쳤기에 다행이지 자칫하면 그대로 얼굴이 두 조각 날 뻔하지 않았나?
한데 결과는 정반대가 됐다.
진도천이 부상을 입고 쓰러졌고, 자신의 아들이 멀쩡하게 일어났다.
‘흐음. 내가 웅아를 과대평가한 것일까?’
비록 진도천을 제압했다지만 우연에 불과했다.
이 정도의 수준이라면 일룡이 되기는커녕 십이용봉에 들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한편 적비연은 얼떨결에 찌른 사람처럼 행동하면서 얼른 진도천에게 달려가 목에 검을 겨눴다.
“내, 내가 이겼소!”
목 줄기에 검봉이 바짝 와 닿자 진도천 역시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억울하지만 패배를 시인할 수밖에.
“내가…… 졌소.”
그가 시인하자 장내에 함성이 차올랐다.
물러서서 포권하는 적비연의 귀에 전음이 날아들었다.
[천운이 따랐구나.]
적비연이 돌아보니 무리 속에 섞인 매삼랑이 싸늘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적비연이 전음을 보냈다.
[왜? 그래서 쫄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