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66화 (67/301)

66. 풍비박산(風飛雹散)

다음 날, 마흔여덟 명의 후기지수들이 무림맹 대연무장에 모였다.

어제 일차 비무에서 승리한 자들이었다.

오늘 이차 비무를 통해 스물네 명이 남게 될 것이고, 내일이면 십이용봉이 정해질 터였다.

오늘 치러질 비무에서 적비연의 상대는 예상대로 매삼랑이었다.

두 사람의 비무는 서안에서도 초미의 관심사로 대두되었다.

천도미룡이라 불리는 매삼랑과 계속해서 이변을 일으키며 올라온 적비연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 결과에 흥미를 가졌다.

그러다 보니 대연무장에 마련된 세 군데의 비무대 중에서도 유독 이곳에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내기를 하는 사람들의 열기도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다만 막상 돈을 걸 때는 많은 사람들이 매삼랑이 이기는 쪽에 손을 들었다.

귀빈석에 앉아서 아들이 올라올 차례를 기다리는 하불범은 내심 불편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주변에서 온통 하천웅이 드디어 떨어질 때가 됐다는 식으로 떠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적성문의 진도천에 이어 천도미룡과 대결이라.’

확실히 대진운이 나쁘다.

진도천의 무공은 그리 고절하지 않아 운이 통했지만, 천도미룡에게 그런 운 따위는 통하지 않을 터.

‘과연 너는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겠느냐?’

하불범이 저만치 비무대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는 아들을 빤히 보았다.

만약 여기서 탈락한다면 둘째 아들에게는 소가주가 될 기회가 영영 없어질 것이다.

이미 뱉은 말이었고, 가장의 모든 무인들에게 공표했기에 번복은 불가능한 상황이다.

‘그래, 이만하면 나도 널 많이 봐준 셈이다. 이 정도 위기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가주가 되어서도 힘든 날만 이어질 터. 우선은 지켜보는 수밖에.’

마음을 굳힌 하불범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옆에서 불쑥 목소리가 들렸다.

“걱정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하불범이 돌아보니 수려한 외모의 중년인이 빙그레 미소 짓고 있었다.

눈부실 정도로 새하얀 무복을 입고 있었는데, 등에는 금빛 수실로 용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하불범은 그가 누군지 단박에 알아보았다.

‘백룡문주.’

천도미룡 매삼랑의 아버지.

확실히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짓고 있지만 어딘지 적의가 담겨 있는 듯하다.

하불범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포권했다.

“귀주의 백룡을 뵙게 되어 영광이오.”

“저 역시 만검세가주님을 이리 뵐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백룡문주 매홍립(梅洪立)이 마주 포권을 취하며 대답했다.

두 사람은 비무대를 보며 나란히 앉았다.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내심은 서로를 견제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상대의 속을 긁는 말을 먼저 꺼낸 사람은 백룡문주 매홍립이었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시겠습니다.”

“어째서 그렇소?”

하불범이 모른 척 묻자 매홍립이 노골적인 비웃음을 띠며 대꾸했다.

“저 아이가 둘째라지요? 어느 집이나 둘째가 속을 많이 썩이지요.”

“그 집 둘째는 속을 많이 썩이는가 보오.”

“말도 마십쇼. 우리 약아가 어찌나 고집이 센지. 하나 그렇다고 해도 여식이 속 썩이는 것과 사내 녀석이 속 썩이는 건 정도가 다르지요.”

“그 또한 편견이 아닌지. 염려해 주는 건 고마우나 내 아들 때문에 속 썩지는 않소.”

하불범이 코웃음을 치고는 대답하자, 매홍립이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비무대회를 치르다 불구가 되면 아비 된 자로서 속상하지 않겠습니까?”

꿈틀.

하불범의 뺨이 실룩였다.

“불구?”

하불범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하지만 매홍립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말을 이어갔다.

“용봉비무가 이래 봬도 생사비무가 아니겠습니까? 불구가 아니라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문제지요. 하지만 소문을 듣자 하니 만검세가의 차남은 목숨을 걸 정도로 심지가 굳은 건 아닌 듯하니…….”

“지금 내게 시비를 거는 거요?”

“그럴 리가요. 혹, 제 이야기에 기분이 상하셨다면 사죄드리지요.”

까득.

하불범이 어금니를 꽉 깨물고는 매홍립을 노려보았다.

여산 인근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하불범으로서는 갑자기 매홍립이 이렇게까지 시비를 거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반면 매홍립은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흥! 여산 기슭에서 본 문의 흑풍대를 전멸시켜 놓고도 모르쇠로 일관하다니. 배짱이 좋군. 하지만 어쩌나? 용봉비무에서는 더 이상 저 망나니를 비호할 수도 없을 텐데.’

매홍립이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가주님도 내놓은 자식이라는 말이 있던데 이제 보니 그건 아닌 모양이군요.”

“흐음. 매 문주께서 남의 가정사에 이리도 관심이 많은 줄 몰랐소.”

“이런,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매홍립이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사죄의 뜻을 전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싸늘한 미소로 물들어 있었다.

‘감히 내 딸을 핍박하고 흑풍대를 전멸시켜? 오늘 네 가문을 풍비박산 내주겠다.’

그러는 사이 마침내 적비연이 비무대에 오를 차례가 됐다.

적비연과 매삼랑이 비무대에 오르자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오오, 드디어 오늘의 최대 관심사구나!”

“나도 이 경기가 제일 기대됐다고!”

“뭐, 보나마나 결과는 뻔하지만 저 만검세가 이 공자는 뜬금없는 구석이 있으니까 말이야.”

사람들이 열광하는 가운데 매삼랑이 적비연을 향해 포권을 했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소, 하 공자.”

“뭐, 서로 칼을 겨누는 게 반길 상황은 아닌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합시다.”

적비연이 대충 인사하며 포권하자 매삼랑이 피식 웃었다.

‘벌써 겁을 먹은 건가?’

두 사람의 인사가 끝나자 북소리가 둥둥 올렸다.

비무 시작을 알리는 신호.

하지만 매삼랑은 적비연과 단순히 비무만 치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적비연 때문에 동생이 수치를 당했고, 백룡문의 일 개 대가 사라졌다.

이에 대한 대가를 두 배, 아니, 세 배 그 이상 치르게 해야만 했다.

매삼랑이 비무대 아래를 힐끔 보았다.

인파 사이에 서 있는 묵검이 보였다.

어젯밤 자신을 찾아왔던 사내.

매삼랑이 묵검을 향해 슬쩍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내공을 실어 적비연에게 외쳤다.

“하 공자! 한 가지 제안을 하려고 하오!”

“뭐요?”

적비연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묻자 매삼랑이 희미하게 미소 짓고는 소리쳤다.

“단순한 비무는 흥이 오르지 않으니 내기를 하는 게 어떻겠소?”

“내기?”

“내 듣기로 하 공자는 유흥을 즐긴다고 들었소! 나 역시 마찬가지요! 그러니 우리의 비무에 흥을 돋우기 위해 내기를 합시다!”

“무슨 내기를 말하는 거요?”

매삼랑이 손가락을 쫙 펼치며 소리쳤다.

“오백만 냥!”

다짜고짜 거금을 읊자 장내에 모인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적비연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물었다.

“오백만 냥을 어쩌자는 거요?”

“진 사람이 이긴 사람에게 내는 거요.”

“오백만 냥이나 가지고 있소?”

그러자 매삼랑이 기다렸다는 듯 몸을 돌려 매홍립을 보았다.

매홍립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내 아들이 진다면 오백만 냥을 내어드리겠소.”

그가 일부러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내공을 실어 답했다.

이는 하불범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반면 하불범은 갑자기 진행되는 이야기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매삼랑이 다시 소리쳐 물었다.

“어떻소? 내기를 받아들이겠소? 정 겁난다면 응하지 않아도 좋소.”

그가 일부러 자극하는 단어를 골라서 말했다.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마침 누군가 소리쳤다.

“내기해라!”

“무인답게 물러서지 마라!”

몇몇이 소리치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너도나도 내기하라고 외쳐댔다.

처음 소리친 사람들은 백룡문이 심어둔 바람잡이들이었다.

-저놈이 미끼를 제대로 물었군.

극마의 말을 무시한 채 적비연이 큰 소리로 외쳤다.

“좋소! 그 내기 받아들이겠소!”

그러자 지켜만 보던 하불범이 벌떡 일어났다.

“불가!”

그의 외침에 모든 이의 시선이 하불범에게 향했다.

“뭐야? 만검세가가 꼬리를 내린 거야? 지금?”

“그러게. 만검세가가 백룡문의 기세에 완전히 눌렸나 본데?”

“하긴 오백만 냥이면 웬만한 중소문파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금액이긴 하지.”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에 하불범이 뺨을 씰룩였다.

‘매 문주……! 이럴 속셈이었나?’

그가 옆에서 미소 짓는 매홍립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때 적비연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아버지! 내기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대체 무슨 생각이냐? 천도미룡은 네 생각처럼 호락호락한 녀석이 아니다! 게다가 오백만 냥이면 본가 자산의 절반에 가깝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이기겠습니다! 여기서 물러난다면 세간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겁니다.]

[대체 백룡문이 왜 이렇게 나오는 것이냐? 혹 백룡문을 건드린 적이 있느냐?]

적비연이 객잔에서 있었던 일을 짤막하게 언급해 주었다.

이후 매소약을 찾아가 손을 봐줬다는 이야기를 적당히 거짓말을 섞어서 둘러댔다.

[끄음. 그런 일이 있었다니…… 어째서 객잔에서 바로 대처하지 않았던 것이냐?]

[남해상단을 건드리기가 어려웠습니다.]

하불범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런 사연이 있었다니.

이제야 백룡문이 왜 이렇게 시비를 거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여산 기슭에 있었던 흑풍대 전멸 사건에 대해서는 여전히 까맣게 몰랐지만.

하불범이 망설이고 있자, 여기저기에서 야유하는 목소리가 쏟아졌다.

“뭐 하는 거냐? 만검세가는 겁쟁이냐?”

“허장성세구나! 만검세가 꼬리를 내릴 거면 그냥 패배 시인부터 해라!”

만약 이 상황에서 내기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만검세가의 명예가 실추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그렇다고 오백만 냥이나 되는 돈을 걸고 섣불리 도박을 할 수도 없는 노릇.

백룡문주 매홍립이 내공을 실으며 외쳤다.

“다들 조용히 해주시오. 누구도 내기를 강권할 수는 없소. 본가는 여유가 있어 내기에 응했으나, 각 문파마다 저마다의 사정이 있는 법 아니겠소? 무작정 비난만 하고 볼 일은 아니오. 우리 모두 너른 마음을 가집시다. 본가는 만검세가가 내기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도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소.”

수려한 외모를 가진 중년인의 말에 모두가 감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백룡문이라는 찬사가 여기저기에서 쏟아져 나왔다.

만검세가로서는 그야말로 난감한 상황.

‘과연 저 비무대에 선 자가 웅아가 아니라 룡아였어도 이랬을까?’

분이 차올랐다.

그때 다시 적비연이 소리쳤다.

“아버지! 내기를 허락해 주십시오!”

이제 장내는 고요해졌다.

모두가 하불범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기를 받아들일 것인가, 수치를 감수하고 물러날 것인가?

하불범이 슬며시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일전에 둘째 아들이 잠결에 날린 발길질에 맞은 곳.

그리고 자신의 일권을 받아냈던 둘째 아들의 모습.

‘그래, 어쩌면…… 아니,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하불범이 표정을 굳히고는 적비연에게 전음을 보냈다.

[자신 있느냐?]

[예, 아버지! 믿어주십시오! 제게 기회를 준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흐음…… 좋다. 단, 반드시 이겨야 한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불범이 딱딱한 표정으로 공력을 실어 말했다.

“내기를 받아들이겠소.”

“와아아아!”

사람들이 다시 환호성을 터뜨렸다.

매홍립이 씨익 웃었다.

“큰 결단을 내리셨구려.”

“흥!”

하불범이 콧방귀를 뀌고는 자리에 털썩 앉았다.

이제 칼은 아들의 손에 쥐어진 셈.

매삼랑이 야비한 미소를 지으며 포권했다.

“그럼 내기를 받아들였으니 최선을 다해 자웅을 겨루도록 합시다. 헛?”

자세를 바로하기가 무섭게,

슈슈슈슉!

갑자기 날아드는 가느다란 무언가를 발견한 매삼랑이 바닥을 차고는 물러났다.

‘침?’

띠디디디딩!

다급하게 침을 쳐내는데,

스팟!

‘헉! 어느 틈에!’

놀랍게도 바로 앞에 적비연이 나타난 게 아닌가?

[잘 받으마. 오백만 냥.]

입매를 비튼 적비연이 일순 검을 뽑아냈다.

쒸아아아악!

성만일검식(成萬一劍式)!

만검세가의 발검 기술로, 적을 찌르는 용도라기보다는 이어질 초식을 위한 주춧돌 같은 개념이다.

하지만 초절정에 이른 적비연의 발검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위력적이었다.

슈컥!

시퍼런 검기가 지나치자 섬뜩한 파육음에 이어 도를 쥔 매삼랑의 팔이 허공으로 솟아오른다.

츄아아아아!

피분수가 터졌다.

잘려 나간 매삼랑의 팔이 피분수와 함께 바닥에 떨어진다.

털썩!

챙그랑!

사람들은 넋을 놓은 채 그 광경을 쳐다보았다.

뒤늦게 매삼랑의 비명이 솟구쳤다.

“끄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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