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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무적-68화 (69/301)

68. 풍비박산(風飛雹散)

매홍립의 절규 어린 외침을 끝으로 장내는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사람들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연신 눈만 끔뻑였다.

적비연도 조금 놀란 표정으로 하불범을 보았다.

검을 내던진 하불범은 어깨를 들먹일 정도로 씨근거리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공력을 쏟아부어서 그런가 싶었지만 그건 아닌 듯했다.

아마도 자신의 아들이 기습을 받아 죽을 뻔했다는 사실 때문에 흥분한 모양이었다.

‘뱀도 자기 새끼만큼은 끔찍이 아낀다는 건가?’

저 간악한 자가 자식을 위해 저리도 흥분하는 것을 보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단숨에 죽여 버릴 줄이야.’

반신불수쯤은 만들어놓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한데 단칼에 저리 죽여 버릴 줄은 몰랐다.

-미안한 마음이라도 든 것이냐?

‘천만에.’

적비연이 내심 고개를 저었다.

매삼랑은 자신을 죽이려던 놈이다.

그것도 온갖 비열한 수단을 써가면서 몇 차례나.

동정심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단지 하불범의 행동에 약간 놀랐을 뿐이다.

뭐, 오히려 잘된 면도 있다.

자신은 손도 쓰지 않고 골치 아픈 가문 하나를 정리한 셈이니까.

다만 하불범도 애초에 매삼랑을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던 모양이지만.

“후우. 이건 어디까지나 당신의 아들이 자초한…….”

“이노오오옴!”

한숨을 내쉬며 돌아서던 하불범을 향해 매홍립이 필살의 기세로 날아들었다.

쒸아아아악!

쩌어어엉!

파공성에 이어 금속성이 폭발음처럼 들려왔다.

뜨끈한 기풍이 사방으로 훅 불어나가는 것과 동시에 하불범이 주르륵 밀려났다.

콰가가각!

하불범이 얼른 검을 거꾸로 세워 비무대에 박아 넣으면서 간신히 밀리는 것을 멈췄다.

“죽이겠다앗!”

눈이 뒤집힌 매홍립이 그대로 하불범을 향해 검을 내질러 갔다.

하불범이 검을 뽑아내기도 전에 매홍립의 검봉이 심장을 찌를 기세였다.

“아버지!”

적비연이 얼른 천검합일 초식을 펼치면서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쩌어엉!

촤아아악!

하불범의 가슴팍까지 다다랐던 검은 적비연이 내지른 검봉에 의해 옆으로 튕겨 나갔다.

그 바람에 하불범의 가슴께 장삼 자락이 횡으로 길게 찢어져 나갔다.

펄럭!

찢어진 장삼 자락 사이로 탄탄한 상체의 근육이 여실히 드러났다.

“웅아!”

“괜찮으십니까? 아버지!”

적비연이 다급히 돌아보며 묻자, 하불범이 감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둘째 아들이 재빨리 대응해 주지 않았다면 이번 공격으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을 만큼 치명상을 입었으리라.

고수들 간의 싸움에서는 한순간의 방심으로 목숨을 잃는 법.

적비연이 내심 안도했다.

‘큰일 날 뻔했네.’

-네 친부도 아닐 텐데?

‘알아. 하지만 지금 죽으면 곤란하지.’

만약 이대로 하불범이 죽으면 가주의 자리는 하기룡이 차지하고 만다.

어쨌거나 현재로서는 그가 소가주니까.

물론 그뿐만 아니라 몸이 반사적으로 반응한 것도 있다.

한편 하불범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돌아서며 말하는 와중에 기습을 해?’

물론 자식을 잃은 충격으로 눈이 뒤집혔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어느 정도 이해도 된다.

그래도 한순간 목숨이 날아갈 뻔했다는 사실에 분이 차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매 문주! 맹의 율법을 어긴 것도 모자라서 내 목숨까지 위협하다니!”

“닥쳐라! 네놈이 내 아들을 죽여놓고도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이 비열한 놈들!”

“당최 누가 비열하다는 건지 모르겠군! 당신이 비무대에 난입한 틈을 타서 우리 아들의 배후를 노린 당신 아들이야말로 비열한 것이 아닌가!”

“이익! 시끄럽다!”

매홍립은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쾅!

그가 진각을 밟으면서 튕기듯이 몸을 날리는 순간,

휘리리리릭!

무림맹 무인들이 병풍처럼 나타나며 매홍립의 앞을 가로막았다.

까앙!

“크읏!”

검을 부딪친 매홍립이 신음을 터뜨리며 물러났다.

무림맹 무인 중 한 명이 싸늘하게 식은 눈빛으로 일렀다.

“매홍립 문주, 더 이상 난동을 부린다면 율법에 따라 처단하겠소!”

“이익……!”

매홍립의 눈이 흔들렸다.

챙그랑!

이내 그가 검을 놓더니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내 아들…… 내 아들을…… 살려내…….”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적비연이 그런 매홍립을 물끄러미 보았다.

‘저 간악한 위선자도 슬픔을 느끼는 모양이군.’

-그것이 인간을 강하게도 만들지만 약하게도 만들지.

때론 독하게도 만들고.

매홍립이 비틀거리며 걸음을 돌리더니 비무대 아래에 쓰러진 매삼랑에게 다가갔다.

“랑아……! 랑아아아!”

쓰러지듯 주저앉은 매홍립이 고개를 들고 절규했다.

그가 부들부들 떠는 손으로 매삼랑의 가슴에 박힌 검의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그렇게 한참을 흐느끼는가 싶더니,

“으아아아아!”

순간 매홍립이 검을 쥐고 돌아서며 그대로 하불범에게 내던졌다. 아니, 내던지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쒸쒸쒸엑!

푸푸푸푹!

어디선가 날아든 화살들이 그의 전신을 꿰뚫고 말았다.

비무대 주변에 배치된 궁수들이었다.

“커억……!”

매홍립이 입을 딱 벌리고는 부들부들 떨더니 이내 매삼랑의 몸 위에 그대로 엎어졌다.

챙그랑!

아들의 몸에서 뽑아낸 검이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온몸이 고슴도치가 된 매홍립은 그렇게 피를 울컥울컥 쏟아내면서 서서히 숨을 거두었다.

“꺄아악!”

마침 인파 사이에서 자지러질 듯한 비명이 솟구쳐 올랐다.

사람들이 돌아보니 귀주일봉 매소약이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 오열하고 있었다.

그 곁에서는 새파랗게 질린 표정의 묘청운이 안절부절못했다.

정말이지 하루아침에 무림명가 하나가 풍비박산 난 것이다.

불과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그들은 다른 가문을 몰락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가 되고 말았다.

무림맹 무인 중 한 명이 공력을 실어 외쳤다.

“백룡문주 매홍립은 본맹이 주최한 정당한 용봉비무에 무단으로 난입하여 난동을 부린 결과, 맹의 율법에 따라 처단되었음을 알려 드리오! 모쪼록 대회 규율을 준수하여 다시는 이 같은 불상사가 없길 바라겠소!”

이로써 두 번째 비무대회도 끝이 났다.

* * *

그날 밤, 묵검이 다급한 표정으로 적비연을 찾아왔다.

“잠시 와보셔야겠습니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필요하면 내가 찾아가겠다고 했는데.”

사실 이곳에서 왕래가 잦으면 자칫 주변의 의심을 살 수도 있었다.

때문에 필요한 일이 생기면 적비연이 직접 수하들을 찾아가기로 했다.

물론 묵검 정도의 은신술을 사용한다면 문제 될 건 없겠지만.

어쨌거나 묵검이 직접 찾아와서 말할 정도면 꽤나 심각한 문제리라.

더구나 용건을 전하고 돌아가는 게 아니라, 자신이 직접 가봐야 한다니.

묵검이 난처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게…… 직접 가서 보시는 게 상황 파악이 빠르실 것 같습니다.”

결국 적비연은 묵검을 따라 수하들이 머물고 있는 숙소로 향했다.

두 사람 모두 은신술 하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니 이동 중 들킬 위험은 별로 없었다.

적비연이 방문을 열고 나타나자 단휘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왔다.

“아, 가주님! 오셨습니까?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제가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도대체 무슨 일이야?”

“말도 마십시오. 예홍 때문에 아주 미치겠습니다! 제가 정말 그 녀석만은 안 된다고 누누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믿을 사람이 없어도…… 하아.”

단휘가 얼굴이 시뻘게져서 씨근거렸다.

적비연이 눈살을 슬쩍 구겼다.

“설마 너희들 다툼에 날 부른 건 아닐 테고.”

“저희야 매일 다투죠. 그게 문제가 아니라, 일단 이쪽으로 오시죠.”

단휘가 앞장서더니 문을 열고 옆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의 광경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마치 태풍이라도 휩쓸고 지나간 듯 온갖 잡기가 부서져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는 밧줄로 꽁꽁 묶여 있는 예홍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적비연이 이맛살을 잔뜩 구겼다.

“너네…… 이런 취미였냐?”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저 녀석이 저 지경이 된 건 다 가주님 때문이라고요.”

“나? 왜?”

그러자 묵검이 슬며시 나섰다.

“내일 비무 상대가 정해졌습니다.”

“그게 누군데? 강한 놈이야?”

“아주 강한 놈…… 아니, 분이시죠. 절대 이길 수 없는.”

“그게 누구…… 설마?”

적비연의 말에 단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주님이십니다.”

아, 그렇게 된 건가?

그런데 그것과 지금 저 상황이 무슨 상관이라는 거지?

그런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 묵검이 한숨을 내쉬었다.

“가서 들어보시죠.”

적비연이 다가가니 예홍은 언제나처럼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끊임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다 끝났어. 나는 십이용봉에 들라는 가주님의 명령을 완수하지 못할 거야. 비무 상대가 가주님이라니. 가주님께 칼을 겨누는 불경스러운 짓을 할 수는 없어. 기권해야 해. 하지만 그럼 십이용봉에 들 수가 없어. 그렇다고 가주님을 이기고 십이용봉에 드는 건 절대 안 돼. 이길 수도 없어. 다 끝이야. 내 운명은 여기까지인 거야. 결국 난 쓸모없는 인간이었어. 역시 나 같은 건 죽어야 해. 그냥 콱 죽어야 해…….”

“뭐, 계속 이런 상태입니다. 아무래도 모순된 상황에서 혼돈이 온 것 같습니다.”

결국 예홍은 그 압박을 못 이겨서 또 자결 소동을 벌였고, 묵검과 단휘가 이를 막기 위해 그녀를 묶어놓은 것이었다.

적비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냥 기권하면 되잖아. 차라리 잘됐네. 나도 하루 정도는 쉬면서 생각도 정리할 수 있으니.”

그러자 예홍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정말인가요? 기권을 허락해 주시는 건가요?”

“뭐, 적당히 비무를 하다가 져줘도 되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어찌 제가 감히 가주님께 검을 들이밀겠어요? 그럴 거면 차라리 제 목을 치세요!”

아아, 이래서 예홍과는 지금껏 대련도 해본 적이 없다.

적비연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는 말했다.

“그래, 그럼 그냥 기권해. 그걸로 충분하다.”

“……라고 하신다. 이제 됐지?”

단휘의 말에 예홍이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묵검이 밧줄을 풀어주자 예홍이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더니 이마를 바닥에 쿵 찧었다.

“불충을 용서하신 은혜! 평생 이 한 몸 희생하여 충성하겠습니다!”

아니, 지금도 충분히 과하다.

애초에 이렇게 심각할 것도 없는 문제잖아!

하지만 그렇게 말했다간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 죄로 할복하겠다고 할지도 모른다.

적비연은 대충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 * *

다음 날, 적비연은 예홍의 기권으로 무난하게 십이용봉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제 남은 일은 십이용봉 중에서도 우열을 가리는 것.

드디어 수많은 무인들 중 열두 명이 최종심까지 오른 것이다.

그리고 적비연의 첫 상대는…….

“나구나.”

옆에 선 하기룡이 벽에 붙은 대진표를 보며 씨익 웃었다.

“용케도 운이 좋아 십이용봉에 들었구나. 첫 비무는 운이 좋아서 이기고, 두 번째는 꼼수를 써서 기습으로, 세 번째는 기권이라…… 확실히 천운이 따랐구나.”

적비연이 빙그레 웃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내일도 천운이 따르길 바라야지요.”

“훗, 나한테도 그런 운을 바라는 건 욕심이다.”

“뭐, 이왕 이리 된 것 욕심 좀 부려보지요.”

하기룡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는 적비연을 돌아보았다.

“지금이라도 기권한다면 내 너를 좋게 포장해 주도록 하마.”

아이고, 비단결 같은 마음 씀씀이에 눈물이 다 나겠네.

적비연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지금이라도 기권하신다면 내일 망신당하지는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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