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69화 (70/301)

69. 타인은 악이다

그날 적비연은 창가에 서서 달이 뜬 하늘을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정말 지난 며칠은 정신없이 지나온 것 같다.

-긴장이라도 한 거냐?

극마가 빈정거리듯 묻는 말에 적비연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좀 생각할 게 있을 뿐.’

-무슨 생각을 그렇게 각 잡고 하는 건가? 아! 혹시 이 몸의 제자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고.’

-흥!

‘그보다 날 주인으로 모실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당연히 없다! 절대 없다!

‘그럼 더 생각해 봐.’

-생각하고 말 것도 없다!

적비연이 피식 웃고는 다시 달을 올려다보았다.

‘아버지라…….’

-아버지? 갑자기 아빠 보고 싶은 애새끼가 된 거냐?

‘거참 말 곱게 한다.’

-새파랗게 어린놈이 조상에게 반말을 찍찍 해대는 네놈보다는 낫다고 본다만.

‘너 솔직히 말해봐. 별호가 극마지존이 아니라 설순지존(舌脣至尊)이었지?’

-설순지존?

‘입술과 혀만 나불거리는 지존 말이야.’

-노오옴! 무엄하다!

극마가 잔뜩 성난 표정을 지었지만 적비연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대신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하불범을 구했던 순간.

어디까지나 하불범은 자신에게 있어서 원수였다.

한데 매홍립이 검을 내질러 왔던 그 순간 적비연은 분명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사실 하불범이 죽으면 자신의 입지가 곤란해진다는 것은 뒤늦게 떠오른 변명이었다.

‘왜 먼저 움직인 걸까?’

적비연이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하불범을 감정적으로 대했던 것 같다.

아마도 하천웅의 기억을 그대로 흡수했기 때문이리라.

게다가 지금 현재 하천웅의 몸으로 살아가는 중이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형인 하기룡의 핍박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하불범의 영향도 컸다.

그만큼은 하천웅을 각별히 대했기 때문이다.

세간에는 내놓은 자식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하불범은 하천웅에게 단 한 번도 단호했던 적이 없다.

숱한 실수를 저질러도 결국은 용서를 해주었다.

그래서 오히려 엇나간 막내가 되었지만, 그 사랑마저 없었더라면 하천웅은 훨씬 더 망가졌을지도 몰랐다.

그런 미묘하고도 복잡한 감정들…….

’기억을 공유하기 때문인지 그것들을 항시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복수고 나발이고 다 포기하고 싶어졌냐? 뭐, 우리 모두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이러고 싶은 거냐?

적비연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다.

다만 이렇게 지내다 보면 정체성의 혼란이 생기는 건 아닐지 걱정된다.

그때 마침 문이 열리면서 은하란이 들어섰다.

적비연이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물었다.

“어제 오늘 날 찾는 사람들이 많군. 무슨 일이지?”

“걱정 마요. 누구도 날 보진 못했으니까.”

하긴.

은하란이 술법을 사용했다면 무인이라고 할지라도 그녀를 발견하는 건 어려울 터다.

은하란이 적비연을 빤히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결국 그렇게 됐군요?”

“무슨 말이지?”

“거기 있는 아저씨요.”

그 말에 극마와 적비연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은하란을 보았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극마였다.

-설마 날 보는 건가?

“네. 아주 잘 보여요.”

-호오! 영을 보는 눈을 가졌다니. 혹시 너는 신녀인가? 아니, 그나저나 아저씨라니! 이 몸은 한 시대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극마…….

“뭐, 정확히 말하면 신녀는 아니죠.”

-이봐! 내 말 듣고 있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신녀의 피가 흐른다고 봐야죠.”

-신녀의 피가 흐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신녀는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아는가?

“보통은 그렇죠. 보통은.”

은하란이 어딘지 씁쓸한 표정으로 미소를 그러고는 적비연을 보았다.

적비연은 잠시 눈을 끔뻑이다가 극마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정말 여기 늙은 덩치가 보인다고?”

-노옴! 늙은 덩치라니!

극마가 곧장 발끈했지만 은하란이 풋 웃으며 대꾸했다.

“네, 보여요. 보다시피 대화도 나눌 수 있고요. 다만 이런 식의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네요. 역시 영혼은 하나로 뒤섞일 수 없는 거군요.”

“하나로 뒤섞이다니…….”

“그렇게 되면 완전히 새로운 인격체가 탄생하려나 기대했거든요.”

“별로 상상하고 싶진 않은데. 하긴 뭐 지금 내 상태가 완전히 다르다고 할 수도 없지만.”

“무슨 말이에요?”

“흐음.”

적비연이 잠시 침음을 흘리다가 조금 전까지 생각하던 것을 전부 말했다.

어차피 이런 고민은 은하란이 아니라면 그 누군가와 나눌 수도 없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은하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을까 봐 염려하셨군요?”

“염려라기보다는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잠깐 생각만…….”

-크크큭. 완전히 쫄았지. 나 정체성 잃으면 어쩌지? 그것만은 안 돼! 하면서…….

“그건 아니고.”

-아니긴. 오늘 하루 종일 창밖을 보면서 그 생각만…….

“저런 늙은이 말은 들어볼 것도 없고. 어때? 가능성이 있긴 해?”

적비연이 말을 가로지르자 극마가 으르렁거리는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고개만 휙 돌리고 말았다.

은하란이 빙그레 웃었다.

“의외로 잘 어울리네요. 두 분.”

“헛소리.”

-개소리!

“그것 봐요. 잘 어울린다니까.”

“시끄러워.”

-닥쳐라!

결국 은하란이 풋 웃으며 말했다.

“일단 말씀하신 대로 타인의 기억이 계속 쌓이면서 조금 혼란스러울 수는 있어요. 하지만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되지는 않을 거예요.”

“확실한가?”

“네. 지금은 그저 타아(他我)를 가졌을 뿐이에요. 하지만 그렇다고 자아(自我)가 훼손되는 건 아니죠. 다른 이들보다야 더 깊이 공감하게 되겠지만, 단지 그뿐.”

“문제는 없단 말이군.”

“인간에 대한 이해는 더 넓어지겠죠. 그렇다고 정체성에 문제가 생기진 않아요. 말하자면 강줄기 같은 거죠. 내 기억으로 인한 감정을 본류라고 하면 타인의 기억으로 생긴 감정은 지류 같은 개념이에요. 지류가 아무리 세차게 흘러도 본류의 흐름을 바꿀 수는 없는 법이죠.”

“그렇다면 밀려드는 감정을 억지로 거부할 필요도 없다는 건가?”

“네. 본류가 다소 탁해질 수는 있지만 결국 정화 작용을 거치게 될 거고, 도도한 강물의 흐름은 바뀌지 않으니까요.”

“그렇군. 도움이 됐어.”

사실 도움이 된 정도가 아니다.

지금 은하란의 말에서 적비연은 모종의 깨달음까지 얻었다.

뭐라고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여러 명의 기억과 그로 인해 밀려드는 다양한 감정들.

그리고 이를 해석하는 은하란의 시각이 더해지니 신묘한 깨달음이 있었다.

이 감각을 잊지 않기 위해서 적비연은 가만히 속으로 되뇌었다.

‘지류는 본류의 흐름을 바꿀 수 없다.’

하면 자신에게 새로 유입되는 이 기억들과 감정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리라.

아마 그것만으로도 많은 깨달음을 얻고 무학에서 성취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무공은 인간이 만드는 것이고, 그 인간의 경험과 기억을 토대로 발전하는 것이니까.

그 누가 타인의 기억을 이처럼 완벽히 공유할 수 있겠나?

저항하지 말고 일단 받아들이고 흐름에 맡기는 것.

그렇다고 자아가 가진 의지마저 흔들리지는 않는다는 점.

이것만 해도 훌륭한 깨우침이었다.

대략 정리를 한 적비연이 은하란을 보았다.

“그래서 오늘 날 찾아온 이유는?”

“그간의 상황을 말씀드리려고요.”

“천상원?”

“네. 지금 현재 수익이 완전히 흑자로 전환되었어요. 천상원을 세우면서 진 빚도 전부 변제되었고, 오히려 초과 수익이 연일 발생하면서 본가의 자산이 크게 늘었어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

대략 예상은 했지만 수익이 어느 정도인지는 아직 짐작하지 못했다.

‘하긴 중원 각지에서 난치병 환자들이 몰려든다고 하니.’

확실히 중원 유일의 종합의원인 천상원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무림 역사, 아니, 중원 역사에 한 획을 그을 만했다.

‘내가 생각해 냈지만 참 괜찮은 구조란 말이지.’

각 분야마다 전문 의원이 있어서 거의 모든 환자들을 진료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의원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정보와 지식을 교류하니 의술이 확장될 수밖에 없다.

은하란이 말을 이었다.

“멀리서 천상원을 찾아오는 환자들이 줄을 잇고 있어요. 이미 천상원은 팔 할을 예약제로 운영하고 있고요. 곧 병실도 모자랄 거예요. 조만간 큰 장원을 구입해서 확장 이전을 해야 해요.”

“그 정도로?”

“사실 부수입이 상당해요.”

“부수입이라면 영단을 판매해서 얻은 수익인가?”

“네. 현재 제약실에서 끊임없이 신약을 만들고 있어요. 각 분야의 전문 의원들이 모이고, 만초단원들도 배치해서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다 보니 계속해서 신약이 나오는 실정이죠. 물론 지원자들에게 동의를 받아서 실험도 하고요.”

“확실하지 않은 영단으로 생체실험을 한단 말이야?”

은하란이 눈썹을 곱게 찡그렸다.

“생체실험이라는 말은 어감이 별로 좋지 않네요. 임상시험 정도로 해두죠. 하지만 걱정 마세요. 최대한 동물실험으로 안전성을 확보했으니까요.”

“다행히 대부분 결과가 좋은 모양이네.”

“네. 천하단만큼도 아니어도, 제법 수준급 영단을 만들어냈죠. 약재는 꾸준히 만초단에서 제공받으니 걱정 없고요.”

한마디로 완벽한 구조라는 거네.

그동안 고생한 나를 다독거려 주고 싶다.

“그래서 현재 흑자 전환해서 수입이 어느 정도지?”

“이천만 냥이 조금 넘었어요.”

순간 적비연은 저도 모르게 입을 딱 벌렸다.

“이천만 냥……?”

“네.”

맙소사.

이천만 냥이면 만검세가 자산의 두 배 수준이 아닌가?

거기다가 백룡문에게서 오백만 냥을 받으면 단숨에 이천오백만 냥이 된다.

이런 식이라면…….

“일억 냥도 금방이겠는데?”

“여러 변수가 있을 수 있겠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죠.”

“이러다가 중원 최고 부자가 되겠군.”

적비연은 가슴 한편이 뿌듯해졌다.

‘아버지, 보셨습니까? 몰락해 가던 벽력가문이 기지개를 켜고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크게 말이지요!’

은하란이 적비연을 보며 물었다.

“그런데 중원 최고 부자가 되어서 뭐 하실 건가요?”

“무림일통.”

“네?”

은하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적비연이 그런 그녀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무림일통을 이루려면 자금이 많이 필요할 거야.”

“무림을 통일한다는 게 말처럼 쉽진 않을 텐데요.”

“그렇겠지. 하지만 하나씩 이뤄가다 보면 언젠간 가능할 거야.”

“그다음에는요?”

“뭐, 그다음은 그때 생각해 보면 되고. 일단은 무림일통을 이루고 그 정점에 내가 서는 게 목표야. 이보다 확실히 가문을 부흥시킬 방법도 없지. 안 그런가?”

적비연의 말에 은하란이 어딘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 그땐 또 다른 목적이 생기겠죠. 세상이 당신을 가만히 두지 않을 테니까.’

적비연이 말했다.

“천상원 확장 이전에 대한 건은 전부 맡기지. 묵검과 논의해서 진행하도록 해.”

“네, 확장 이전하게 되면 조직도 확장 개편을 해야 할 거예요.”

“그것도 맡겨두지.”

“이젠 절 믿나요?”

“아니, 아직이야.”

“의심이 많은 분이군요?”

“그게 강호에서 살아남는 법이니까.”

“그런데 저도 안전장치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무슨 말이야?”

“가주님이 아기로 환생했을 때처럼 만약 한 달 이내로 돌아오지 못할 상황이 발생하면 저는 꼼짝없이 죽어야 하잖아요? 저번에는 운이 좋았기에 망정이지, 까딱하면 몇 년간 본가로 돌아오지 못할 뻔하셨죠. 그럼 저는 죽었을 테고, 가주님의 본체는 관리되지 못해서 영영 돌아갈 수 없게 되었을지도요.”

생각해 보니 그렇다.

그때는 본체에 대한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다.

어떻게든 아기의 몸에서 벗어날 생각만 하고.

만약 자신이 빨리 돌아가지 못했다면 은하란은 죽었을 테고, 관리받지 못한 본체는 썩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뭐, 사실 그렇다고 해도…….

“별로 문제 될 건 없어.”

“왜죠?”

“사활침의 침술을 묵검에게도 알려주었거든. 내가 돌아가지 못하면 묵검이 잘 해결해 줄 거야.”

뜻밖의 대답에 은하란이 잠깐 멍한 표정을 짓다가 피식 웃었다.

“의외로 꼼꼼하시군요.”

“강호에서 살아남는 법이지.”

적비연이 희미하게 웃었다.

* * *

다음 날, 무림맹 대연무장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무림맹에서도 맹주를 위시한 오절이 귀빈석에 자리했고, 하불범을 포함한 각 문파 수장들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이미 세간에는 소문이 자자했다.

한 가문에서 두 사람이나 십이용봉에 든 것이다.

한데 그 형제끼리 대진운이 짜여 졌으니 관심이 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게다가 하불범이 용봉비무의 성적에 따라 소가주를 정하겠다고 공표한 것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사실 하불범이 일부러 낸 소문이었다.

한 가문에서 십이용봉이 두 사람이나 배출되었다는 것을 알리려는 목적과 아들들이 승부를 조작하지 않고 정당하게 비무할 것이라는 걸 간접적으로 홍보하기 위함이었다.

‘확실히 그런 걸 보면 약은 사람이라니까.’

비무대에 오른 적비연은 귀빈석에 앉은 하불범을 가만히 보았다.

마침 하기룡이 무대에 오르자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하기룡이 사람 좋은 미소를 그려 보이며 말했다.

“사랑하는 아우야, 너와 이렇게 십이용봉이 되어서 만나니 참으로 기쁘구나.”

입에 침이나 바르시지.

하지만 물론 속내와 다른 대꾸를 했다.

“저도 기쁩니다, 형님. 후회가 남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좋은 자세다. 나 또한 무인으로서 최선을 다하겠다.”

적비연이 포권을 하며 고개를 숙이고는 씨익 웃었다.

‘다행히 저놈에게는 일말의 좋은 감정도 생기지 않는다니까.’

자, 그럼 그간의 분풀이 좀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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