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타인은 악이다
“뭐……?”
하기룡의 눈자위가 꿈틀거렸다.
순간 동생이 너무 흥분해서 미쳐 버린 건 아닌지 의심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다.
하천웅의 두 눈빛은 소름 끼치도록 착 가라앉아 있었다.
절대 광인에게서 볼 수 있는 눈빛이 아니었다.
‘높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동생이 아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것만 같다.
그 눈빛만으로 전신이 굳어버리는 듯 뻣뻣해져 왔다.
[지금…… 뭐라고 했느냐?]
적비연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표정으로 서늘하게 말했다.
“왜? 네 모습을 너무 적나라하게 까발리니 믿고 싶지 않나? 넌 어느 모로 보나 쓰. 레. 기. 야.”
“이노오오옴!”
쩌어엉!
분노로 휘두른 일검에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기운이 터져 나왔다.
뜨끈한 기풍이 사방으로 훅 퍼져 나갔고, 주변의 기왓장이 다르르 떠는 소리를 내질렀다.
쉬까앙!
한차례 검이 튕겨진 후 하기룡이 기합성을 터뜨리며 달려들었다.
“하아앗!”
쉬쉬쉬쉬쉬쉭!
“오오오!”
“눈이 부실 지경이야!”
지켜보는 자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괜히 비유하는 말이 아니었다.
하기룡이 내지르는 검초는 정말 수만 개의 빛살을 잘게 쪼개며 적비연에게 쏟아내는 듯했다.
광휘만엽(光輝萬葉)!
이 역시 화룡만검법의 절초 중 하나로 절정 구단 이상에 이르러야만 펼칠 수 있는 검초였다.
따다다다다당!
마치 기름에 콩을 볶는 듯한 소리가 연신 울렸다.
소리는 점점 빨라지더니 이내 두 자루의 검이 마구 섞이면서 불꽃이 튀어 올랐다.
광휘만엽에서 만검화린이 연환식으로 펼쳐지는 중이었다.
“와아아! 대단해!”
“장사소룡도 대단하지만 그 동생도 어마어마하다! 저걸 다 막아내고 있어!”
“대체 왜 저런 자가 내놓은 자식이라는 거지? 만검세가의 망나니는커녕 십이용봉으로 손색이 없잖아?”
“허어, 이 사람아. 원래 소문이란 부풀려지거나 허위거나 둘 중 하나라니까.”
놀란 사람들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하불범조차도 두 눈을 부릅뜨고는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웅아가 언제 저렇게까지 성장한 거지? 그간 실력을 숨기고 있었나?’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하지만 의문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옆자리에 앉은 무림오절 중 한 사람인 염능파가 수염을 쓸며 말을 걸어온 것이다.
“허허, 과연 두 아드님을 훌륭하게 키우셨소. 하 가주께서 왜 이번 비무를 통해 소가주를 정하겠다고 했는지 이해가 가는구려. 나 같아도 만천하에 알리고 싶었을 것 같소.”
“과찬이십니다.”
하불범이 겸양을 갖춰 대답했다.
“말이 나온 김에 한 번 물어봅시다.”
“말씀하시지요.”
“가주께서는 저 두 아들 중, 누가 소가주가 될 거라고 생각하시오?”
“어려운 질문이군요.”
하불범이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만약 며칠 전에 이 질문을 받았다면, 아니, 조금 전 비무가 시작되기 전만 해도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 아들이 최선을 다해 여기까지 올라온 건 대견하지만 제 형을 이기지는 못할 거라고 대답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모르겠다.
저 비무대에서 싸우는 하천웅이 정말 자신이 알던 그 둘째 아들이 맞나 싶다.
언제 저렇게 컸나?
“어려운 질문이었소?”
염능파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하불범을 돌아보았다.
하불범이 부드럽게 웃으며 되물었다.
“혹 염 전주님께서는 짐작되는 바가 있으십니까?”
“흐음. 사실대로 말해도 되겠소?”
“여부가 있겠습니까? 아직 부족한 이 하 아무개에게 가르침을 주시지요.”
“허허, 무슨 겸양의 말씀을. 아마 하 가주께서도 짐작은 하실 게요. 단지 두 아들을 공평히 대하고픈 마음에서 진실의 눈을 가리려는 것일 테지요.”
“부끄럽습니다.”
“자식 가진 부모의 마음이란 다 같은 법 아니겠소? 내 솔직히 말씀드리면…….”
꿀꺽.
왠지 모르게 긴장되는 마음에 하불범이 마른침을 삼켰다.
비무대를 바라보는 염능파의 시선이 진중해졌다.
“저 하천웅이라는 아이가 압도적으로 유리할 것 같소.”
역시……!
하불범이 시선을 돌려 비무대를 보았다.
그런 하불범을 보며 염능파가 부드럽게 웃었다.
“알고 있었지요? 하 가주.”
“글쎄요.”
하불범이 애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실 이 비무의 결과를 묻는 것이라면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낯설다.
자신의 둘째 아들이 너무 낯설다.
더 이상 사고치지 않고 제 형만큼이나 무공 정진에 힘써 일취월장하기를 바랐다.
그래, 그토록 염원하던 순간이 마침내 왔건만 몸서리쳐지도록 낯설다.
기쁨보다는 어색함이 더 크다.
이걸 어찌 말해야 할까?
아서라. 염능파가 이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웅아. 대체 네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냐? 너의 변화를 이 아비가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여도 되겠느냐?’
하불범의 시야에는 시종 담담한 표정으로 하기룡의 검세를 막아내는 하천웅이 담겼다.
그리고 내내 악에 받친 표정으로 상승무공을 연이어 펼치는 하기룡도 보였다.
“이야아악!”
비명과도 같은 기합성이 터지면서 하기룡이 만검화린의 마지막 검식을 내질렀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기운을 실었다.
따앙!
촤아아악!
튕겨 나간 검이 아슬아슬한 차이로 적비연의 옆구리를 찢으며 지나갔다.
하지만 살은 베지 못했다.
풀럭!
장삼 자락만 찢어져 나가면서 탄탄한 옆구리가 훤히 드러났다.
‘치잇!’
혀를 찬 하기룡이 뒤로 훌쩍 물러나서는 이를 갈았다.
‘어떻게…… 어떻게 네놈은……!’
손끝이 가늘게 떨려온다.
상승무공을 연이어 펼친 후유증이다.
적비연도 호흡이 조금 가빠졌다.
하기룡만큼은 아니지만 어깨를 조금씩 들먹이면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아무리 초절정에 이르렀다지만 연이은 상승무공을 아무렇지도 않게 막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다만 표정만큼은 그대로였다.
마치 비무대가 아닌 다른 곳에 있는 사람처럼 무심한 표정.
그래, 저 표정 때문일 것이다.
‘어째서 그렇게 태연한 표정을 할 수 있는 거지?’
적비연이 무심한 표정을 지을수록 하기룡의 속은 더욱 뒤집어지는 듯했다.
그동안 숨겨왔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한데 자신의 동생은 완전한 타인인 것처럼 행동한다.
저 표정은 마치 자신이 그년이 죽던 순간을 지켜볼 때처럼 무심한…….
‘가만, 설마 그런 거냐?’
그때의 나와 똑같은 표정으로 날 멸시하려는 속셈인가?
내 격정을 비웃고, 날 한심하게 여기겠다는 건가?
하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타앗!
쉬이이잇, 쩡!
바람처럼 날아간 하기룡이 적비연과 다시 맞부딪쳤다.
검을 맞댄 하기룡이 씹어 먹을 듯한 표정으로 전음을 흘렸다.
[그년이 죽을 때 무슨 생각을 떠올렸을까? 끝까지 내가 그 괴한들에게 들키지 않기를 바랐을까? 웃기지 않은가? 난 그년이 어서 죽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말이야!]
[그게 웃기오? 그럼 형님의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는 무슨 생각을 했을 것 같소?]
‘……!’
하기룡의 두 눈빛이 퀭해졌다.
“너 이 새끼……!”
“왜? 알고 있소?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아아아악!”
다시 한번 찢어질 듯한 기합성과 함께 하기룡이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렀다.
이젠 초식도 없었다.
극에 달한 분노가 춤을 추는 대로 몸을 내맡기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깡! 까강! 깡깡깡!
연신 검을 휘두르던 하기룡은 다시 적비연과 검을 맞대고는 으르렁거렸다.
[그래, 나는 알고 있다. 어머니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하나, 네놈은 알고 있느냐? 내 어머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을!]
적비연이 흠칫거렸다.
그건 몰랐다.
하천웅의 기억에 큰어머니는 시름시름 지병을 앓다가 돌아가신 것으로 되어 있었다.
어쩌면 너무 어려서 자세한 사정을 몰랐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소문이 나지 않도록 만검가에서 쉬쉬했다면 하천웅도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
‘그랬나……? 그래서 더 큰 증오와 분노를 느꼈던 건가?’
하기룡의 눈시울은 붉어져 있었다.
붉게 충혈된 눈은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나찰을 보는 듯하다.
[네놈은 아느냐! 마음의 병을 얻어 괴로움에 시달리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내 어머니의 마음을! 그 심정을! 마지막 순간 무슨 마음을 품었는지를!]
[알 리가 없지. 알아도 달라질 것도 없고.]
적비연이 차분하게 말했다.
그건 어디까지나 적비연이 타아를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마음 한구석이 시큰거렸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완벽히 타인으로서 공감하는 정도.
이걸로 확실히 알았다.
아무리 자신이 그 감정에 몰입해도, 당사자의 기분에 완벽하게 동화되는 것은 힘들다는 것을.
결국 타인은 타인이다.
그리고 그 완벽한 타인의 모습이 하기룡에게는 악마의 모습으로 비쳐졌다.
[네놈은…… 악마다!]
앞서 제 어머니의 죽음조차 남의 일처럼 대하지 않는가?
하기룡이 이를 까득 갈았다.
[너 같은 악마는 내 손으로…… 죽여야겠다!]
그래, 자신의 동생은 존재 자체가 잘못이지 않았던가?
진작 죽였어야 했다!
“이아아아악!”
분기탱천한 하기룡이 검을 크게 휘둘렀다.
하지만 울분에 취한 검공이 통할 리가 없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미쳐갔던 것처럼, 그 역시 분노와 증오로 이성을 놓고 있었다.
동작이 크게 벌어지자 적비연은 재빨리 달려들어 회심의 일장을 뻗었다.
슈웃! 꽈아아앙!
“커업!”
명치를 얻어맞은 하기룡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콰가가가각!
검을 거꾸로 세워서 바닥에 꽂은 하기룡이 간신히 비무대 끝에 멈춰 섰다.
하지만 내장은 이미 진탕이 되어 있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주체 못 한 그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울컥.
“쿠웨에에엑!”
구토를 하자 피가 한 움큼 쏟아졌다.
가만히 지켜만 보던 하불범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기룡은 다시 일어서려고 했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지나친 흥분으로 신체를 한계치까지 밀어붙인 결과였다.
저벅저벅.
적비연이 걸어왔다.
‘적어도 내가 너였다면 애꿎은 동생을 괴롭히는 대신 네 아버지와 다른 인간이 되려고 노력했을 거다.’
속내를 삼킨 적비연이 검봉으로 하기룡의 목을 겨눴다.
“패배를 시인하시겠소?”
“네놈이…… 어찌……!”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패배를 시인하시겠습니까? 형님.”
적비연이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하기룡이 표독스러운 눈길로 적비연을 노려보았다.
적비연이 손에 힘을 실었다.
순간,
“웅아!”
공력을 실은 하불범의 목소리가 장내에 쩌렁쩌렁 울렸다.
기왓장이 떨리고 몇몇 무인들은 귀를 틀어막으며 주저앉을 정도였다.
적비연이 돌아보니 하불범이 주먹을 불끈 쥐고는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네 형이다!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마라!’
왜일까?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둘째 아들이 장남을 죽일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마침 염능파가 가만히 손을 들어 하불범을 제지했다.
“아무리 저 둘이 자식이라고는 하나 비무대에 난입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
하불범이 주먹만 불끈 쥐었다.
염능파를 본 적비연이 내심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타인은…… 악마라는 건가?’
그래, 어쩌면 하기룡 말이 맞을지도.
그러니 이 순간 자신은 별 망설임 없이 검을 들어 살기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일지도.
“이런 눈빛이었나? 죽어가는 내 어머니를 보던 너의 눈빛은.”
하기룡이 자신을 무심하게 쳐다보는 동생을 올려다보았다.
울분이 차올랐다.
무력한 자신에 대한 원망이 끊이질 않는다.
그래, 그날도 이 기분과 비슷했다.
침상에서 죽어가는 어머니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날.
점점 미쳐가던 어머니는 결국 음독(飮毒)을 했다.
자신이 달려갔을 때는 이미 전신에 독기가 퍼져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죽음에 가까워진 상태였다.
그때 어머니가 야윈 손을 들어 하기룡의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너는 살아남아라. 앞으로…… 네게 어떤 고난이 닥쳐도…… 절대 운명을…… 스스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 못난 이 어미가…… 네게 남기는 마지막 당부이니라…….”
어머니……!
적비연이 든 검이 시린 빛을 뿜으며 떨어지는 순간!
스윽.
하기룡이 손을 들었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하기룡의 나직한 목소리가 장내에 스며들었다.
“내가…… 졌다.”
그 말을 끝으로 하불범이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적비연이 검을 내리고는 포권을 취했다.
“형님의 양보에 감사드립니다.”
마침내 환호성이 솟구쳐 올랐다.
포권을 푼 적비연이 냉랭하게 돌아섰다.
이걸로 소가주 자리는 넘겨받았다.
하지만 아직 더 남았다.
적비연은 열광하는 사람들 너머로 귀빈석에 앉은 하불범을 보았다.
자, 이제 그 자리를 내게 넘길 차례요. 하 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