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72화 (73/301)

72. 악을 만드는 짐승

세상이 떠들썩했다.

오늘 하루 총 여섯 번의 비무 중에서도 사람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받은 것은 단연 적비연과 하기룡의 비무였다.

형제의 비무.

게다가 그 결과는 다수의 예상을 뒤엎고 내놓은 자식이라던 동생의 승리.

그러니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객점이나 주루마다 삼삼오오 모이기만 하면 온통 그 이야기뿐이었다.

하지만 객실 창가에 서서 달을 올려다보는 적비연은 그런 세상과 동떨어진 것 마냥 고요했다.

그 자존심 강한 하기룡이 패배를 시인할 줄은 몰랐다.

물론 하기룡을 아예 죽일 생각은 없었다.

만약 그랬다간 아무리 정당한 비무라도 만검세가의 무인들이 강한 비난을 쏟아부었을 테니까.

하불범 역시 그런 둘째 아들에게 쉽사리 가주의 자리를 넘겨주지 않았을 테고.

단지 깊은 부상을 입히려고 했다.

실수인 척 단전을 아예 파괴할 생각도 해보았다.

어쨌거나 누가 보더라도 승패가 분명하도록.

하지만 뜻밖에도 하기룡은 패배를 시인했다.

덕분에 무리할 필요는 없어졌지만 마음 한구석이 석연치 않다.

-왜? 널 악마라고 불러서 아직도 신경 쓰이냐?

‘전혀. 단지 하기룡이 이대로 물러날 인간은 아닐 거라는 생각에.’

-이대로 찌그러져 있지 않으면?

‘다시 기회를 노리겠지. 적어도 내가 겪은, 아니, 하천웅이 겪은 하기룡이라는 인간은 그런 놈이니까.’

-허어, 너도 참 어지간한 독종이구나.

‘무슨 뜻이지?’

-오늘만큼은 승리에 취해도 되지 않겠냐?

적비연이 고개를 저었다.

‘적은 그렇게 방심하는 틈을 노리는 법이야. 그 어느 때보다도 오늘 가장 조심해야지.’

-설마 너한테 묵사발 난 녀석이 곧바로 널 치겠냐?

‘묵사발이 났으니까 치려고 하겠지. 인간은 네 생각보다 훨씬 독하니까.’

그렇다. 인간은 독하다.

어쩌면 악하다는 표현보다는 독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그 독함 속에서 악이 피어나는 것이고.

-불안한 것도 병이니라.

‘불안이 아니라 준비를 하는 거다. 뭐, 우화등선도 하다 만 네가 이해하긴 어렵겠지만.’

-뭐, 뭣이? 본좌는 우화등선해서 마선도 되었던 몸이다!

‘되었던 몸이지 된 몸은 아니잖아?’

-그, 그야 내가 스스로 내려왔으니…….

‘그걸 추방당했다고 말하는 거지.’

-노옴! 닥쳐라! 네깟 놈이 뭘 안다고 씨불이는 것이냐?

‘눼눼, 어련하시겠습니까?’

-이놈! 내 언젠간 네놈의 본체를 차지하고 말 것이다! 그땐 네놈이 울며불며 빌어도 절대 봐주지 않을 것이다!

‘극마야. 세상 일이 항상 계획대로 되진 않는단다.’

-저, 저 새파랗게 어린 새끼가……!

극마는 이제 뒷목 잡고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적비연은 다시 창밖을 올려다보았다.

잠깐 성질을 부리던 극마가 조금은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놈이 바로 치고 온다면 어쩔 생각이냐?

‘끌고 갈 수 없다면 부술 수밖에.’

-크크크. 확실히 그런 면은 마음에 든다니까. 그나저나 용봉대회는 이제 여섯 명이 남았으니, 내일은 세 명이 남게 될 텐데 그다음에는 세 명이 동시에 싸우는 거냐?

‘아니. 그땐 패자부활전을 통해서 한 명이 더 올라와. 그렇게 준결승을 치르게 되지.’

-한마디로 대진운 나쁜 놈을 구제하겠다는 거군.

‘그런 셈이지.’

-그럼 그 하기룡과 다시 만날 수도 있는 건가?

‘가능성이 없진 않겠…….’

쒸에엑!

적비연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허공을 가르며 뭔가가 날아들었다.

적비연이 재빨리 몸을 뒤틀자 아슬아슬하게 스친 화살 한 대가 창을 통해 날아 들어와 벽에 박혔다.

화살대에는 서신이 묶여 있었다.

적비연이 서신을 펼쳐보자 짤막한 글귀가 적혀 있었다.

네 어미를 죽인 괴한들이 누군지 알려주겠다. 여산으로 와라.

적비연이 보란 듯이 극마를 돌아보았다.

‘어때? 내 말이 맞지?’

-끄음.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인간 놈들이 많이 조급해졌군.

‘네가 인간에 대해 잊고 있었던 건 아니고?’

-시끄럽다! 그나저나…… 갈 거냐?

‘글쎄…….’

적비연이 침음을 흘리며 생각에 잠겼다.

사실 적비연으로서는 굳이 갈 필요가 없었다.

하천웅의 친모를 누가 죽였는지 별로 궁금하지도 않다.

게다가 서신의 내용을 보면 하기룡이 분명해 보이는데, 그가 어떤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는 것일지 알 수도 없다.

‘그냥 무시할까?’

* * *

이차관문인 임적탐관이 치러졌던 곳.

휘이이잉!

스산한 바람이 주변을 한차례 휩쓸고 지나갔다.

달빛 아래에 우두커니 버티고 선 커다란 문은 어딘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저벅저벅.

활짝 열린 정문으로 들어선 적비연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말이지 귀신이라도 나올 것만 같은 분위기.

적비연은 결국 하기룡을 만나러 왔다.

딱히 하기룡이 말한 내용이 궁금해서 온 것은 아니다.

단지 이러한 내막들을 알아두면 차후 만검세가를 장악할 때 중요한 정보가 될 수도 있겠다는 판단 때문에 왔다.

그런데…….

-역시 그 애송이가 함정을 판 거군.

적비연 뒤에 부유하고 있는 극마가 팔짱을 낀 채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기다리고 있어야 할 하기룡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희미한 기척이 느껴진다.

모두 다섯 명이다.

적비연은 그들이 누군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내게 할 말이 있던 것 아니었습니까?”

적비연이 목청을 높여 외치자, 나무 뒤와 목책 위, 정문 위에서 속속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예상대로 그들은 하기룡의 복심인 사군자였다.

마지막으로 하기룡이 달빛을 등진 채 나무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하기룡의 표정은 무섭게 일그러져 있었다.

“과연 겁도 없이 찾아왔구나. 두렵지는 않더냐?”

적비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형님이 이런 함정을 파놓을 거라는 건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그래도 인간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으로 와봤소.”

“뚫린 입으로 잘도 지껄이는군.”

“내 입 사정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이제 말해보시오. 누구요? 어머니를 죽인 놈들이?”

적비연이 묻자 하기룡이 이맛살을 슬쩍 찌푸렸다.

“너는 정말 알고 싶은 것이냐?”

“왜 묻소? 그러니 여기 왔겠지.”

“아니. 지금 네 태도를 보면 별로 상관없다는 듯이 느껴져.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내가 비무 중에도 여러 번 네 어미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지만 너는 마치 전혀 상관없는 사람처럼 굴더군. 하나만 묻자, 그년이 네 친모인 건 확실하냐?”

적비연이 하기룡을 빤히 바라보았다.

확실히 자아가 아닌 타아로서는 공감의 한계가 분명한 모양이다.

아니면 하기룡이 무척 예민한 성격이거나.

이렇게까지 구체적으로 파고들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하지만 어차피 증거도 없는 의심이다.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이제 말해보시오. 누가 내 어머니를 죽였소?”

“굳이 말로 할 필요가 있을까? 난 이미 너에게 그 괴한들에 대해 알려주었다고 생각하는데.”

적비연의 이맛살이 슬쩍 구겨졌다.

“뭔 소리요? 언제 나한테 괴한들에 대해서 알려줬다고……!”

말을 뱉던 적비연이 순간 흠칫거리고는 주변을 살폈다.

옆단이 길게 찢어진 치마를 입은 매.

그녀는 아까부터 붉은 입술을 비틀며 비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초췌해 보이는 난은 녹색 혀로 입술을 핥으며 연신 피식거렸다.

서리라도 맞은 듯 머리가 새하얀 국은 시종 냉소를 지었고, 기다란 창을 든 죽은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을 차례로 둘러본 적비연이 속에서 피어오르는 의문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설마…… 너희들이냐?”

적비연의 서늘한 목소리에 하기룡이 차갑게 조소를 지었다.

“감이 늦구나.”

“이런 쓰레기 같은 것들이…….”

적비연이 어금니를 빠득 갈았다.

이건 자아와 타아를 떠나서 이들의 행동에 순수한 분노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한 여인을 잔혹하게 살해한 것으로도 모자라서, 지금 저들은 그 아들에게 그 사실을 재미있다는 듯이 까발리고 있지 않나?

‘극마. 네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무공의 정사 구분이 무슨 의미인가? 인간이 그저 악할 뿐인 것을!’

-그걸 이제야 깨달았냐? 애송아.

극마가 보란 듯이 팔짱을 끼며 턱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적비연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분노하고 있었다.

어쩐지 인간에 대해 깊이 알아갈수록 가슴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솟구치는 것만 같았다.

확실히 하천웅은 약아빠진 놈이었다.

악한 인간이었다.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지나쳐 비틀린 심성을 소유한 자였다.

적비연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하천웅은 ‘악’ 그 자체였다.

그런데…….

“그런 악을 만든 건 네놈들이다.”

“뭐라는 거야?”

하기룡이 빈정거렸지만, 적비연은 싸늘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네놈이 시킨 짓이냐?”

하기룡이 눈살을 찌푸렸다.

“네놈? 비무에서 날 이겼다고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구나. 네가 어찌 단시간에 그 정도의 무공 성취를 이룬 것인지 모르겠지만 지금도…….”

“너희들 중 어머니의 목숨을 끊은 놈은 누구냐?”

적비연이 말을 끊으며 물었다.

하기룡이 뺨을 씰룩였지만 더 이상 화를 내진 않았다.

어차피 자신의 동생은 이제 곧 죽을 것이다.

죽기 전에 퍼덕거리는 물고기 따위야 아무렴 어떤가?

잠깐 지켜보다가 배를 갈라 버리면 그만이다.

“나였소.”

국이 한 걸음 나섰다.

국은 기도를 끌어올려 전신을 팽팽한 긴장 상태로 만들었다.

그는 일전에 하천웅과 대적한 적이 있었다.

운귀가 죽던 날, 국이 하천웅을 맡았다.

당연히 하천웅의 발을 묶어둘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실패했다.

하천웅이 범 새끼인 것만은 확실했다.

그런 만큼 오늘은 절대 방심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적비연이 허리춤에서 검을 스르릉 뽑아 들었다.

긴 말은 필요 없다.

알 건 전부 알았다.

딱히 만검세가를 장악하기 위해 도움되는 정보는 없었다.

다만, 이들이 자신에게 이토록 지독한 살기를 드러낸 이상 살려둘 생각은 사라졌다.

이왕이면 이들까지 품어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구제가 안 되는군.”

말을 마친 적비연이 내공을 끌어올렸다.

후우웅!

사방으로 뜨끈한 기풍이 훅 불어나갔다.

적비연이 검을 앞세우고는 국을 가리켰다.

“거기. 너부터 제일 먼저 죽인다. 그리고…….”

이번엔 검봉이 하기룡을 가리켰다.

“넌 마지막에 죽여주마.”

하기룡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순간,

파앗!

“주제를 알고 지껄이시오!”

국이 한기를 풀풀 휘날리면서 순식간에 적비연에게 파고들었다.

일격필살의 각오로 달려든 것이었기에 그의 움직임은 군더더기가 없었다.

하지만 적비연은 여유가 있었다.

이미 그는 국과 싸웠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초절정에 이른 그에게 이미 싸워본 적도 있는 절정 수준의 국은 상대가 될 수 없었다.

휘리리릭!

눈 깜빡할 사이에 몸을 회전한 적비연이 그대로 검을 거꾸로 쥐면서 내려찍었다.

쉬잇, 푸욱!

“커억!”

국이 입을 딱 벌렸다.

그가 눈을 내리깔고는 자신의 목을 꿰뚫고 튀어나온 검신을 바라보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파악할 수도 없었다.

상대의 심장을 뚫었다고 생각한 순간, 오히려 차가운 검신이 자신의 목을 뚫고 튀어나왔다.

촤아아악!

적비연이 검을 옆으로 그으며 뽑아내자 목이 절반이나 찢어진 국이 피분수를 터뜨리며 그 자리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뜻밖의 상황에 매, 난, 죽의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저도 모르게 흠칫거리며 물러난 세 사람을 보며 적비연이 고개를 우두둑 꺾고는 말했다.

“귀찮으니까 한꺼번에 덤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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