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너, 이 새끼. 기억났다
타다닷!
한 인영이 수풀을 헤치며 빠른 속도로 내달렸다.
어찌나 빠른지 한 줄기 바람 같았다.
그 뒤를 쫓는 적비연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경공술이 운귀 이상이다.’
적비연은 운귀가 가진 능력 이상의 경공을 펼칠 수는 없었다.
도대체 누굴까?
처음부터 자신을 노리고 미행한 것일까?
아니면 우연히 근처에 있다가 마주친 것일까?
어느 쪽이든 목격자가 있어서 좋을 건 없다.
자신이 하기룡을 제거했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면 만검세가주의 자리는 물 건너가고 말 것이다.
-애송이! 이러다 놓치겠다. 더 빨리 달려라!
‘시끄러워.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흥! 느려터진 거북이 같으니라고!
거리가 점점 벌어지자 적비연이 품에서 암기를 꺼내 던졌다.
쒸쒸에엑!
까강!
금속성이 일어나면서 두 자루의 암기가 튕겨 나갔다.
비록 치명상을 입히진 못했지만 상대가 돌아서며 칼을 휘두르는 바람에 거리는 좁혔다.
‘한 번 더!’
쒸쒸에에엑!
다시 품에서 암기 두 자루를 꺼내 던졌다.
허공을 찢어발기며 날아간 암기가 적의 뒤통수와 등 한가운데를 노렸다.
암기가 뒤통수에 박히기 직전, 상대가 고개를 옆으로 꺾었다.
스핏!
암기가 귓불을 스치면서 핏방울이 흩날렸다.
곧이어 몸을 휘돌린 상대가 명치를 파고들려는 암기를 칼 손잡이로 쳐냈다.
따앙!
팍!
튕겨나간 암기가 옆 나무 기둥에 꽂혔다.
찰나지간,
파밧!
어느새 거리를 완전히 좁힌 적비연이 나뭇가지를 발로 차며 날아올랐다.
‘걸렸다!’
유성천검!
허공의 정점에 멈춘 적비연이 일순 공력을 끌어올리며 빠른 속도로 떨어져 내렸다.
따다앙! 콰콰가가각!
만검세가의 절초인 유성천검으로 내려찍자 상대가 아슬아슬하게 검봉을 막아내며 뒤로 물러났다.
그 바람에 적비연의 검이 그대로 바닥을 파고들었다.
쑤욱.
검을 뽑아낸 적비연이 상대를 보고는 흠칫거렸다.
복면……?
“이거 갈수록 수상해지는데. 누구냐? 너.”
적비연이 눈썹을 찌푸리고 묻자, 복면인이 냅다 몸을 돌리고 달려가려고 했다.
“어딜!”
순간 적비연이 가문절기인 섬전보를 펼쳐 복면인 앞으로 돌아가서 재빨리 일장을 내질렀다.
파박!
타닷!
하지만 과연 상대도 만만치 않았다.
금나술을 펼친 상대가 적비연의 손목을 가볍게 밀어 치면서 빠져나갔다.
이에 질세라 적비연도 얼른 금나술을 펼치면서 대응했다.
투다닷! 타닷!
두 사람의 손이 어지럽게 뒤엉켰다.
어느 한 사람이 먼저 검을 뽑을 틈도 없었다.
‘대체 누구지?’
궁금증도 잠시,
휘리릭!
순간 복면인이 몸을 회전하더니 품에서 단검을 꺼내 횡으로 그었다.
파밧!
간발의 차로 물러난 적비연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그와 동시에 복면인이 날린 단검이 검신에 맞고 튕겨 날아갔다.
차앙!
“누구냐니까.”
적비연이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복면인은 호흡만 고를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조금의 단서도 주지 않겠다는 듯.
정 그렇게 나온다면 할 수 없지.
이쪽에서도 최선을 다할 수밖에!
파밧!
적비연이 바닥을 차는 순간이었다.
쒸쒸에에엑!
등 뒤에서 파공성과 함께 기척이 느껴졌다.
쉬잇!
적비연이 돌개바람처럼 돌아서면서 그대로 검을 후려쳤다.
거의 본능에 내맡긴 움직임이었다.
따다앙!
금속성과 함께 적비연의 몸이 주르륵 미끄러졌다.
‘강궁이다!’
아직도 손아귀가 저릿저릿하게 울렸다.
튕겨 나간 화살이 나무 기둥에 박혀 부르르 떨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보니 빳빳한 철시(鐵矢)였다.
-흐음. 한 놈이 더 있었군.
극마가 멋쩍은 듯 말했다.
극마도 느끼지 못할 정도면 상당히 먼 거리에서 활을 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이 정도의 힘이라면 보통 고수가 아니다.
처음에는 복면을 쓴 후기지수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 정도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고수라면…….
‘최소 초절정에 이른 고수다.’
적비연이 어금니를 뿌득 갈고 돌아섰을 때는 이미 손을 섞었던 상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황이었다.
‘제길, 놓쳤어.’
-어우, 답답하게! 그러니까 날 사부로 모시라고 하지 않았더냐? 내가 경공술을 가르친다면 저런 놈쯤은 거뜬히…….
‘어차피 한 놈이 더 있었어. 경공술로 어떻게 할 상황이 아닌 거지.’
적비연이 대충 대답하고는 나무 기둥으로 저벅저벅 걸어가서 철시를 뽑았다.
독은 묻어 있지 않았다.
죽일 생각은 없었단 말이다.
‘우연한 목격자라는 건가?’
적비연의 생각에 극마가 팔짱을 풀고는 물었다.
-왜 그렇게 되는 거냐?
‘애초에 날 노려서 미행한 거라면 죽일 각오로 덤볐을 테지. 하지만 이 화살도 그렇고 아까 그놈도 도망가기만 바빴으니까. 어쩌면…….’
-오히려 네놈이 목격자라는 건가?
‘그럴지도. 하지만 내가 뭘 목격한 건지 모르니…….’
-이제 어떡할 거냐?
‘어떡하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해야지. 어쨌거나 나는 지금 친형을 죽인 상황이니까.’
-흐음. 뭔가 꼬여가는 것 같군.
극마가 다시 팔짱을 끼면서 중얼거렸다.
* * *
다음 날, 여섯 용봉이 비무대에 올랐다.
화산파 매화수검 현청, 개방의 만소걸, 신풍문의 장문탁, 낙양문 낙양쾌도 임송화, 벽력적가의 단휘, 그리고 적비연이었다.
그중에서도 적비연의 상대는 신풍문의 장문탁.
일전에 이차관문에서 잠깐 마주친 적이 있었기에 얼굴은 알아볼 수 있었다.
준준결승인 셈이었기에 만검세가에서는 가주 하불범뿐만 아니라 수뇌인사 다수가 서안을 찾아와 관람하게 됐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두 번만 더 비무에서 이긴다면 가주의 자리가 바뀌는 역사적인 순간이 될 테니.
첫 번째 비무는 매화수검 현청과 낙양쾌도 임송화의 대결이었다.
과연 두 사람은 명문의 후기지수답게 발군의 솜씨를 뽐냈다.
무려 백 합이 넘을 때까지도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는데, 백오십 합을 넘으면서 임송화가 변칙을 썼다.
그녀가 울퉁불퉁해진 바닥 때문에 균형을 잃고 넘어지는 척하며 가녀린 비명을 내질렀다.
현청은 화산파 도인 아니랄까 봐 일순 긴장을 풀었다.
아무래도 여인이 변수 때문에 불리한 상황이 되자 공정한 승부를 위해서 방심한 듯했다.
임송화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곧장 현청의 품으로 파고들어 일도를 날렸다.
현청이 재빨리 대응해서 가까스로 도신을 막아냈지만, 그 일격으로 검이 튕겨 날아가고 말았다.
도봉이 목에 겨눠지고 나서야 현청이 쓴웃음을 남기며 포권했다.
“기지에 제가 당했습니다. 무인이란 잠시도 방심해서는 안 되는 법. 제가 졌습니다.”
“양보해 주셔서 감사해요.”
임송화가 마주 포권하며 승리를 확인했다.
사람들의 환호성 속에서 두 사람의 비무가 끝났고, 두 번째 비무를 위해 단휘와 만소걸이 비무대에 오를 차례였다.
적비연은 오늘 마지막 순서였다.
단휘가 심호흡을 하고는 걸음을 내디디려고 하자 옆에 서 있던 예홍이 울적한 표정으로 말했다.
“장례는 성대하게 치러달라고 가주님께 부탁해 볼게.”
“허! 왜? 아예 고사를 지내지 그러냐?”
“죽더라도 한 방에 가야 한다. 그게 가장 고통스럽지 않…….”
“시끄러워! 난 이길 거다!”
단휘가 콧김을 뿜으며 성큼성큼 걸어갔다.
적비연이 그 모습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비무대에 오른 단휘는 눈앞의 만소걸을 향해 포권했다.
“만 형께 한 수 가르침을 부탁드리겠소.”
“킬킬. 잘 부탁하오.”
만소걸이 썩은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으으. 입 냄새가 여기까지 풍기는 것 같네.’
단휘가 이맛살을 찌푸리는데 마침 북소리가 둥둥 울렸다.
비무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단휘는 천천히 기수식을 취했다.
반면 만소걸은 목봉(木棒)을 휘휘 잡아 돌리면서 실없는 미소를 지었다.
“흐흐. 몽둥이 휘두르기에 좋은 날씨지 않소?”
“하하…… 그런가요?”
단휘가 어색한 웃음을 흘리고는 천천히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개방 방도를 상대할 때 가장 까다로운 점이 언제 어떤 식으로 무공을 펼칠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어떤 경우는 술에 취한 것처럼 비틀거리고, 어떤 경우는 개 쫓듯이 덮어놓고 달려들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게 그저 움직이는 게 아니다.
하나하나 모두 근거가 있는 무공이기에 더욱 조심해야 한다.
꿀꺽.
단휘가 마른침을 삼킨 순간,
타앗!
‘헛!’
먼저 움직인 쪽은 만소걸이었다.
휘적휘적!
좌우로 크게 보폭을 넓혀가며 달려드는 그 모습은 언뜻 취한 사람 같으면서도 절도가 있다.
마침내 인근에 다다랐을 때,
“하앗!”
단휘가 기합성을 터뜨리며 곧장 검을 뻗어갔다.
짜르르릉!
천둥소리와 함께 일검이 매섭게 날아갔다.
벽력가문의 독문초식 천명뇌검!
타앙!
하지만 단휘의 검신이 목봉에 힘없이 튕겨 나갔다.
‘크웃!’
단순히 가볍게 올려친 것 같은데 어깨가 찢어져 나갈 것처럼 묵직한 울림이 있다.
‘제길, 무슨 힘이……!’
단휘가 힘의 흐름을 쫓아 얼른 돌아서는데,
“카악, 퉷!”
“허억!”
걸쭉한 침이 안면을 향해 느닷없이 날아드는 게 아닌가?
화들짝 놀란 단휘가 얼른 물러나자 누런 가래침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히히힛!”
썩은 이를 드러내며 웃는 만소걸이 연이어 목봉을 내지르며 압박해 왔다.
‘뭐, 이런 예의 없는 경우가……!’
아무리 거지라지만 명색이 개방의 제자가 아닌가?
공명정대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개방이 이런 비열한 짓을 하다니!
단휘는 내심 부아가 치밀었지만 달리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정신없이 쏟아지는 목봉을 막아내는 것만도 급급했다.
타타타타탕!
“히힛!”
만소걸이 연신 약 올리듯 이죽거렸다.
‘제길! 나도 침이나 뱉어?’
한편 그러는 사이 적비연의 시선은 비무대가 아닌 다른 곳으로 향했다.
‘저 녀석…… 분명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바로 그의 비무 상대인 장문탁.
하지만 신풍문과 장문탁이라는 이름은 금시초문이다.
-어이, 네가 딴생각에 빠진 동안 네 똘마니가 질 것 같은데?
그제야 적비연이 고개를 들고 비무대를 올려다보았다.
극마의 말대로 단휘가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정말이지 이렇게 지저분한 싸움은 처음이었다.
만소걸은 연신 침을 뱉어가며 목봉을 휘둘렀다.
급기야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단휘가 목구멍 깊은 곳에 쌓인 분노를 끌어올렸다.
“카아아아악.”
그리고 입에 가득 머금은 분노를 발사하려는 순간,
슈슈슈슈슈슈슉!
하늘에서 갑자기 시커먼 그림자들이 마구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흑립을 깊이 눌러쓴 그들은 무림맹 무인들이었다.
차차차차아앙!
그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자, 단휘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외쳤다.
“아, 아, 아직 안 뱉었습니다! 전…… 꿀꺽. 안 뱉었어요!”
그런데 무림맹 무인들의 살기는 뜻밖에도 만소걸을 향하고 있었다.
“만소걸, 아니, 흑상귀(黑像鬼)! 순순히 투항하라!”
갑자기 벌어진 일에 단휘는 물론, 관람하던 모든 사람들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리고 그 순간, 적비연의 머릿속에도 하나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아, 기억났다! 저 새끼가 누군지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