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너, 이 새끼. 기억났다
“이, 이게 무슨 일이지?”
“만소걸이 아니라 흑상귀라니? 흑상귀는 또 누구야?”
구경하던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술렁거렸다.
단휘는 영문을 모른 채 슬금슬금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그러는 사이 흑립을 눌러쓴 무림맹 무인들은 천천히 만소걸을 향해 포위망을 좁혔다.
만소걸, 아니, 흑상귀는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다가 가볍게 혀를 찼다.
“칫.”
한편 비무를 지켜보던 맹주 허위청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중얼거렸다.
“저자인가?”
“예, 맹주님.”
옆에 선 무림맹 총군사 가후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본맹은 물론, 개방 자체적으로도 조사해서 흑천련이 심은 살수라는 것을 한 번 더 확인했습니다.”
“흐음. 흑상귀라…… 처음 듣는 별호군.”
“흑천련이 오랫동안 키운 고수입니다.”
허위청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총군사가 아니었다면 저런 미꾸라지가 들어와 있는 줄도 몰랐을 것이다.
가후는 이번 천하용봉대회에서 흑천련이 반드시 비열한 수를 쓸 것이라고 내다봤다.
최근 흑천련의 움직임을 미루어 보건대 이런 기회를 그냥 흘려보낼 리는 없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쪽에서 그 위기를 역으로 이용하려는 속셈이었다.
과연 흑천련은 치밀하게 준비했다.
개방조차도 만소걸이 흑천련의 살수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정도였으니.
허위청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도 참 어지간하군. 이 한순간을 위해서 무려 오 년을 준비했다니.”
“준비 기간이 길었던 만큼 흑천련은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움직일 겁니다.”
“감히…….”
허위청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흑상귀를 바라보았다.
내뱉는 말과는 달리 그의 표정에서는 어떠한 분노도 느껴지지 않았다.
경지에 오른 고수답게 감정을 철저히 다스리고 있었다.
한편 갑자기 포위를 당한 흑상귀는 자신의 정체가 발각됐다는 것을 알고 나서 자세를 바꿨다.
지금까지는 술 취한 거지처럼 어딘지 느슨하게 굴었다면, 이젠 흡사 관병을 보는 것처럼 절도 있는 모습이었다.
그의 전신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가 피식 웃었다.
“참 용하네. 어찌 알아냈을까?”
흑상귀가 천천히 목봉을 양손으로 쥐고는 각각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끼릭.
목봉이 갈라지면서 그 안에서 날카로운 검신이 드러났다.
무림맹 무인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미간을 좁혔다.
“투항할 생각이 없나 보군.”
흑상귀가 히죽 웃었다.
“너 같으면 적의 말에 순순히 따르겠느냐!”
버럭 고함을 친 흑상귀가 바닥을 차며 몸을 날렸다.
“쳐랏!”
무림맹 무인들도 일제히 흑상귀에게 달려들며 맹공을 퍼부었다.
따다다당! 까강!
과연 흑천련에서 작정하고 심은 살수답게 흑상귀의 무공은 만만치 않았다.
쏟아지는 검공을 이리저리 피하면서 번개처럼 몸을 날려 무림맹 무인들을 베어갔다.
“커억!”
“크악!”
무림맹 무인들이 하나둘 쓰러지자 단휘가 입을 딱 벌렸다.
‘내가 저런 놈하고 싸웠단 말이야?’
얼핏 보아도 초절정에 오른 수준이 아닌가?
그때 다시 갈색 무복을 입은 자들이 비무대를 에워싸듯 일제히 떨어져 내렸다.
곧이어,
처처처척!
무인들이 일제히 석궁을 꺼내 들고는 흑상귀를 겨눴다.
“단 대협, 물러나시오!”
궁수를 이끄는 대주가 단휘에게 소리쳤다.
“아, 네, 네!”
단휘가 후다닥 비무대 아래로 내려서자 궁수들이 일제히 기운을 끌어올리면서 흑상귀에게 빈틈이 생기기만을 노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 무림맹 검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졌을 때,
투투투퉁!
궁수들이 일제히 석궁을 발사했다.
쒸쒸에에엑!
강맹한 기운을 머금은 석궁이 맹렬한 기세로 날아갔다.
“흐아아압!”
흑상귀가 기합성을 내지르면서 검과 막대를 휘둘렀다.
따다다다당!
푸푹!
“크읏!”
제아무리 강맹한 무인이더라도 이 정도 근거리에서 발사되는 모든 석궁을 막아낼 수는 없는 법.
두 대의 화살이 옆구리와 허벅지에 하나씩 박혔다.
단휘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 적비연에게 달려갔다.
[가주님!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역시 사파 놈이었다.]
[그러게요. 음? 그런데 역시라는 건…… 가주님도 만소걸이 사파가 심은 첩자라는 걸 알고 계셨던 겁니까?]
[아니. 그놈 말고 저놈 말하는 거야.]
[네?]
그제야 단휘는 적비연이 전혀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적비연의 시선은 웅성거리는 인파 속에서 묵묵히 지금의 상황을 관망하고 있는 장문탁에게 향해 있었다.
단휘가 장문탁과 적비연을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가주님, 어딜 보시는 겁니까? 지금 비무대 위에서 난리가…….]
콰앙!
순간 비무대에서 폭음과 함께 자욱한 연무가 피어올랐다.
“우웁! 독무다! 모두 피해!”
“젠장, 이게 무슨 일이람?”
관람하던 무인들이 저마다 소리치며 물러났다.
뒤이어 임의로 마련된 귀빈석 건물 위에서 서른 명의 고수들이 경공을 펼쳐 나타나더니 일제히 연무를 향해 장풍을 날렸다.
파파파앙!
귀빈석으로 밀려들던 독무가 반대방향으로 날아가며 흩어졌다.
단휘가 소매로 얼굴을 가리며 전음을 보냈다.
[가주님! 아무래도 위험하니 피해 계시는 게…… 어? 가주님?]
단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로 옆에 있던 적비연이 온데간데없어진 것이다.
뒤늦게 저만치 성큼성큼 걸어가는 적비연의 뒷모습이 보였다.
[엇! 가주님!]
단휘가 얼른 뒤쫓아 가며 불렀지만 적비연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적비연은 점점 빠르게 걸어서 장문탁에게 접근해 갔다.
장문탁은 사람들에게 떠밀려서 귀빈석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저놈이 누군데 그러냐?
옆에서 극마가 미간을 찌푸리고는 물었다.
‘이름은 몰라.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놈도 사파라는 거지.’
-그럼 저놈도 살수라는 말이냐?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아직 확실하진 않다.
조금 더 지켜볼 생각이다.
다만 여차하면 장문탁을 저지할 생각이다.
-넌 저놈이 사파라는 걸 어떻게 알고?
‘칠괴의 기억이 떠올랐거든. 분명 만난 적이 있었지. 당시엔 지금 모습보다 더 어려서 쉽게 떠오르지 않았던 거고.’
대략 십 년 정도 전이었을 거다.
강동칠괴는 흑천련의 청부를 받기 위해 흑천사왕(黑天四王) 중 한 명인 교패(喬覇)를 만난 적이 있었다.
교패는 당시 흑천련의 주요 간부였는데, 대외비로 어떤 업무에 몰두하던 중이었다.
-그럼 그때 교패라는 놈을 만나면서 저놈을 봤단 거냐?
극마의 말에 적비연이 피식 웃었다.
만약 극마의 목소리를 사파 무인들이 들었다면 기겁을 했으리라.
아니면, 칼을 뽑아 들고 죽이겠다며 달려들거나.
교패는 흑천사왕 중 한 사람이다.
흑천사왕은 사파 무인들에게 있어서 거의 신앙적인 존재라고 봐야 했다.
무림오절과 흑천사왕이 한바탕 붙으면 흑천사왕이 무조건 이긴다는 말이 공공연히 떠돌 정도였으니.
확실히 칠괴의 기억을 되새겨 보면 교패는 범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흑천사왕이라는 무시무시한 별칭과 달리 서생처럼 하얀 피부에 단아해 보이는 인상.
하지만 전신에서 우러나오는 모종의 기운은 그를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도록 만들었다.
적비연이 기억을 더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보다 어렸지만 교패 뒤에 얌전히 서 있던 녀석이 바로 저놈이야.’
당시 교패가 맡은 임무는 아마도 암암리에 살수를 양성하는 것이었으리라.
그 살수 중 한 사람이 바로 장문탁이고.
단지 스치듯 보고도 기억하는 이유는, 당시 저 녀석에게서 느껴진 지독한 살기 때문이었다.
‘한데도 그 넘쳐나던 살기를 잘도 갈무리했구나.’
하긴 세월이 그만큼 흘렀으니.
가만, 저놈이 신풍문이라고 했던가?
[단휘. 신풍문이 어디에 있는 문파인지 아느냐?]
적비연을 쫓아 헐레벌떡 달려온 단휘가 숨을 말아 쉬고는 대답했다.
[지금 이 지경이 됐는데 이제 와서 대전 상대 뒷조사입니까?]
[알면 대답이나 해.]
[그렇잖아도 예홍이 가주님 상대에 대해서 꼼꼼히 조사했었죠. 신풍문은 광동성 광주(廣州)에 있는 문파라더군요. 신생문파인데 두각을 드러낸 건 한 오 년 정도 됐다나?]
‘역시……!’
적비연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극마가 물었다.
-뭐 짚이는 거라도 있냐?
‘당시 강동칠괴가 맡은 임무는 광주를 대표하는 칠성문(七星門)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결국 그때부터 교패는…….’
-이걸 노렸다는 거군. 지독하게 오랜 시간 준비했네.
‘무림맹 본단에서 멀면서도 사파의 영역에서 멀지 않아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곳. 역시 광주가 제격이었겠지. 육로가 막히면 배를 이용하기도 좋았을 테고.’
-흐음. 정파의 영역에서는 비교적 변두리 지역이니 세를 갖춰가기도 나쁘지 않았겠군.
‘그래. 유일하게 견제할 수 있는 문파가 칠성문이었을 테니 애초에 제거한 것이겠지. 칠성문이 제거되자마자 신풍문이 기지개를 켰을 거야.’
-과연. 만소걸로도 모자라서 저 녀석까지 준비했단 거군.
‘어쩌면 만소걸보다 이쪽이…… 진짜일지도.’
적비연이 장문탁을 빤히 노려보았다.
확실히 장문탁의 움직임은 수상쩍었다.
계속해서 비무대의 상황을 지켜보면서도 귀빈석 쪽을 자꾸만 힐끔거렸다.
‘맹주를 노리는구나!’
비무대의 격투는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탓!
장문탁이 귀빈석을 향해 달렸다. 아니, 달리려고 했다.
찰나,
“장 대협! 어딜 가시오?”
적비연이 큰 목소리로 장문탁을 불러 세웠다.
공력을 담아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쳤기에 주변 사람들은 물론 귀빈석에 있던 무인들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멈칫거린 장문탁이 난감한 표정으로 적비연을 돌아보았다.
“뭐요?”
적비연이 내심 혀를 찼다.
노골적인 적대감인데?
간자처럼 활동하려면 좀 더 살가워야 할 텐데.
그러거나 말거나 장문탁이 툭 쏘듯 물었다.
“내가 어딜 가든 무슨 상관이오?”
허, 너무 까칠하게 나오니까 살수인지 아닌지 헷갈릴 정도다.
그래도 확인은 해야겠지.
이야기를 길게 끌 필요도 없다.
단 한마디만 하면 되니까.
“교 선생은 잘 지내고 계시오?”
이번에도 사자후처럼 우렁차게 외쳤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비무대에서 난투를 벌이던 만소걸과 무림맹 무인들이 흠칫거리며 돌아볼 정도였다.
반면 장문탁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주변의 시선을 의식했다.
교 선생이란, 사파인들 사이에서 교패를 부를 때 사용하는 말이었다.
[네놈 정체가 뭐냐?]
장문탁이 전음을 날렸다.
적비연이 입매를 비틀었다.
역시 틀림없구나!
게다가 저 찢어진 귓불의 상처.
지난밤에 자신이 쫓았던 복면인이 바로 장문탁일 가능성이 컸다.
확신을 가진 적비연이 전음 대신 이번에도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누구긴 누구겠어? 당신이 흑천련에서 온 살수라는 걸 아는 사람이지!”
“……!”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화들짝 놀랐다.
물론 그중에는 맹주와 총군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도 만소걸 이외에 또 다른 살수가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지켜보던 염능파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하 대협! 그게 무슨 말인가? 그자는 신풍문의 장문탁…….”
“가짜 신분입니다. 아마 신풍문 전체가 거짓일 겁니다.”
“뭐라? 자네가 어떻게 그걸…….”
“지금 그 내막을 모두 말씀드리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분명한 건 이놈이 교패가 키운 살…….”
그 순간 장문탁이 일갈을 터뜨리며 달려들었다.
“노옴! 어디서 헛소리냐!”
쉬이이잇!
눈 깜빡할 사이에 달려간 장문탁이 적비연을 향해 일검을 내질렀다.
쩌어엉!
후우웅!
두 기운이 충돌하면서 뜨끈한 바람이 사방으로 불었다.
장문탁이 두 눈을 부릅떴다.
놀랍게도 적비연 앞에 시커먼 무복을 입은 중년 사내가 서 있는 게 아닌가?
묵검이었다.
바람처럼 나타나 검격을 받아낸 묵검이 맹수처럼 시린 눈빛으로 장문탁을 노려보았다.
“사파 나부랭이 주제에 감히…… 죽고 싶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