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77화 (78/301)

77. 다 계획이 있어

장문탁이 덜덜 떨면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의 표정은 완전히 공포에 질려 있었다.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방금 뭐라는 거야? 정말 마공을 익혔다고 했지?”

“설마…… 마기를 느꼈다는 건가?”

“말도 안 돼. 정말 만검세가 이 공자가 마공을 익혔다고?”

마기를 발산했던 극마는 적비연의 몸에서 떨어져 나와 주저앉을 듯 숨을 헐떡였다.

-헉, 헉, 헉……! 아이고, 죽겠다. 기운을 좀 발산한 걸로 이 지경이라니.

한편 적비연은 넋이 나간 채 떨고 있는 장문탁에게 다가가 검을 치켜들었다.

“감히 맹주님의 목숨을 노린 죄, 죽음으로 갚아라.”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려는 순간,

“잠깐.”

묵직한 음성이 장내에 울렸다.

크게 소리친 것은 아니었지만 웅혼한 내력이 담겨 있었기에 모든 이의 귀에 그 목소리가 또렷이 박혀들었다.

여태까지 지켜만 보던 맹주 허위청이 드디어 나선 것이다.

‘저 엉덩이 무거운 영감탱이가 이제야 일어났군.’

적비연이 이런 생각을 자연스럽게 떠올린 이유는 아상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상은 늘 맹주를 영감탱이라고 불렀으니까.

어쨌거나 맹주가 직접 나서게 되자 모든 이의 이목이 귀빈석으로 집중됐다.

휙!

순간 맹주가 바닥을 툭 찍어 차더니 마치 고고한 학처럼 훨훨 날아서 적비연 곁으로 부드럽게 내려섰다.

그러는 사이 비천대가 얼른 다가와 맹주를 에워싸듯 호위 태세를 갖췄다.

허위청이 손을 들어 보이자 비천대가 조금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여차하면 맹주를 지키기 위해 저마다 암기를 뽑아 들고는 적비연과 장문탁을 경계했다.

적비연이 돌아서서는 포권을 취했다.

“하 아무개가 맹주님을 뵙습니다!”

“거추장스러운 예는 접어두게.”

“송구합니다.”

적비연이 깍듯하게 대꾸하자 허위청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묵검을 비롯한 단휘와 예홍을 둘러보았다.

“두 가문은 앙숙으로 들었는데, 하 공자의 말이 모두 사실인가?”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묵검과 단휘, 예홍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두 가문이 입을 모으니 자연히 장문탁의 입장이 불리해질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 역시 조금씩 장문탁을 수상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그럼 그렇지. 그래도 만검세가인데. 마공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그러게 말일세. 하지만 대회 내내 이변을 일으킨 건 사실이니…….”

그때 장문탁이 손가락으로 적비연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저자는 마공을 익혔습니다! 만약 거짓이라면 제가 죽어도 좋습니다!”

장문탁이 두 눈이 벌겋게 충혈이 되어서는 외쳤다.

그 절박함이 예사로워 보이진 않았다.

허위청이 잠시 생각을 하다가 적비연에게 다가갔다.

“정황으로 본다면 자네 말을 믿고 싶지만, 지금 그 누구도 쉽게 믿을 수 없는 상황일세. 잠시 자네에게 무례를 범해도 되겠나?”

“무례라 하시면…….”

“확실히 해두는 게 좋지 않겠는가? 괜찮다면 진맥을 해보고 싶네만.”

적비연이 난색을 표했다.

“어찌 저를 못 믿으십니까?”

사실 무인으로서 타인에게 진맥을 허락하는 건 굉장히 위험한 행동이었다.

당연히 강호예절에도 어긋나는 일.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이 자리의 그 누구도 맹주를 나무라는 사람은 없었다.

허위청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말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직접 진맥을 하려고 하네. 그래도 안 되겠는가?”

“죄송합니다, 맹주님. 맹주님이 절 믿으실 수 없다면, 저 또한 어찌 맹주님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적비연이 완강하게 거부하자 허위청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이런 반응은 충분히 예상했던 바였다.

아무리 맹주라고 해도 무인이 손목을 내어주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기에.

그때 귀빈석에서 하불범이 벌떡 일어났다.

[영신은 따라붙지 마라. 예민한 상황이다.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호신위에게 전음을 남긴 그가 단숨에 경공을 펼쳐 적비연 곁으로 내려섰다.

“부족한 아들 녀석이 신경 쓰이게 해서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맹주님. 하나, 이 녀석 또한 강호에 발을 들인 무인입니다. 아무래도 손목을 내맡기는 게 어려운 듯하니 아비로서 직접 진맥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자 적비연이 짐짓 서운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아버지! 설마 아버지마저 절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 저는 마공을 익히지 않았습니다!”

“알고 있다. 하지만 너의 급격한 성장을 의심하는 이들도 많지 않느냐? 이 아비조차도 놀랄 정도니 다른 사람은 오죽하겠느냐? 그러니 이 정도에서 너도 양보하거라. 설마 아비에게도 손목을 내밀지 못하겠다는 것이냐? 그렇다면 이 아비도 너를 마냥 감쌀 수만은 없다.”

하불범이 딱딱한 표정으로 대꾸하자, 적비연이 마지못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던 맹주에게 총군사 가후가 전음을 보냈다.

[우선 지켜보시는 게 어떨지요?]

맹주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좋소. 일단 하 가주께서 직접 진맥하고 내게 솔직히 말해주시오.”

“맹주님의 신뢰와 배려에 무한히 감사드립니다.”

하불범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적비연에게 돌아섰다.

“손목을 내밀어 보아라.”

적비연이 짐짓 망설이는 척 슬쩍 물러났다.

“정녕 이렇게까지 하셔야겠습니까?”

“이게 최선이다.”

적비연이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다가와 팔을 내밀었다.

“알겠습니다.”

하불범이 아들의 손목을 내려다보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말로는 믿는다 하였지만, 이 망나니 같은 둘째 아들이 정말 마공에 손을 댄 것이라면?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완전한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만약 네가 정말 마공에 손을 댄 것이라면 이 아비도 구제할 수 없다. 마공을 익힌 자식을 집안에 두는 것은 멸문의 길을 걷는 것과 마찬가지!’

두근두근.

마침내 하불범이 적비연의 손목을 잡고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심각하게 일그러져 있던 그의 표정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편안해졌다.

‘다행이다! 마공을 익히진 않았구나.’

당연한 반응이었다.

조금 전 장문탁이 느꼈던 마기는 적비연의 체내에 머물러 있는 기운이 아니었으니까.

마기를 발산했던 극마는 저만치 물러나서 아직도 숨을 헐떡이는 중이었다.

또한 적비연은 여러 사람의 무공을 흡수하면서 정공과 사공을 모두 제 것처럼 다룰 수 있었다.

사공으로 얻어진 기운을 정순하게 바꾸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손목을 놓고 물러난 하불범이 한결 편안한 표정으로 맹주를 돌아보았다.

“제 아들은 마공을 익히지 않았습니다. 제가 보증할 수 있습니다. 부디 이 하 아무개를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가문의 명예를 걸고 맹세합니다.”

그러자 장문탁이 입에 거품을 물며 소리쳤다.

“거짓말! 자식이나 아비나 똑같구나! 제 자식을 감싸려고 저런 뻔뻔한 거짓말을 하다니! 당신들은 모두 한통속……!”

“닥쳐라! 내 아들은 마공을 익히지 않았다! 네놈이야말로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 내 아들을 몰아세운 것이 아니더냐!”

“흥! 부자지간이 작당을 하고선 그런 말을……!”

“허튼소리! 본가는 마공을 받아들일 만큼 무모하지 않다! 그러는 네놈은 어째서 문파 사람들이 너 이외에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것이냐!”

이쯤 되자 정말 마기를 느꼈던 장문탁은 단단히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들이 전부 한통속이다. 분위기로 보니 맹주도 만검세가를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게로구나!’

그렇다면 결국 무리수를 둬야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해지는 것은 자신이다.

마침 지금은 맹주가 지척에 있다.

그래, 이 거리라면……!

어차피 맹주를 살해하고 나서 생환할 가능성은 거의 없으리라.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맹주를 제거한다.

그것이 자신의 사명이었고, 자신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였다.

생각을 마친 장문탁은 최후의 수단을 실행했다.

투둑. 툭툭.

그의 전신 근육이 뚝뚝 끊어지는 소리를 내질렀다.

물론 그만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사부인 교패가 알려준 필살의 비기.

생전 딱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는 금기의 무공.

파천혈기공(破天血氣功)!

모든 생기를 일순간에 끌어모아 단 한 번에 격발시키는 방법이다.

찰나,

“크아아압!”

비명 같은 외침이 터져 나오면서 장문탁의 신형이 날았다.

“엇!”

비천대가 뒤늦게 암기를 날렸다.

쉬쉬쉬쉭!

푸푸푸푹!

수십 자루의 암기가 장문탁의 몸에 박혔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맹주 곁에 선 하불범이 반사적으로 돌아서며 검을 뽑아 들었다.

“어딜!”

쩌어어엉!

검신이 서로 부딪치면서 요란한 금속성이 울렸다.

강한 충격에 모든 생기를 끌어올렸던 장문탁이 시커먼 피를 토해냈다.

“쿠웨엑!”

하지만 하불범이 받은 충격도 만만치 않았다.

‘뭐 이렇게나 강한 힘이……!’

“크윽!”

츠츠츠츳!

하불범이 신음을 터뜨리며 한참이나 뒤로 밀려났다.

‘젠장, 내상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줄 알았다.

게다가 적은 몸에 암기를 수십 자루나 박아놓은 상태가 아닌가?

하지만 파천혈기공은 그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목숨을 내던진 최후의 필살무공답게 그 파괴력은 어마어마했다.

장문탁의 공격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흑도천하…… 만세!”

그가 탁한 음성을 뱉어내더니 왼손으로 검두를 잡아 돌렸다.

끼릭.

“음……?”

하불범의 눈썹이 성큼 치켜 올라간 순간,

쉭쉭쉭쉭!

검파에서 발사된 세침(細針) 수십 개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 그대로 하불범의 전신에 박혀들었다.

푸푸푸푹!

피하기에는 너무나 가까운 거리였다.

게다가 조금 전의 일격으로 내상까지 입어 운신이 여의치 않았다.

“커억!”

정말이지 허를 찌르는 공격!

멀리 떨어져 있는 호신위 영신이 나서려고 했을 때는 이미 하불범이 피를 왈칵 토하며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장문탁도 쿵, 쓰러졌다.

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아버지!”

“하 가주!”

적비연과 맹주가 동시에 소리치며 하불범에게 달려갔다.

하불범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가고 있었다.

“크읍……! 놈이…… 독을……!”

적비연이 얼른 진맥했다.

‘맹독이다. 가망이 없어.’

그 짧은 순간 하불범은 어이없게도 죽음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한편 숨이 꺼져가는 하불범은 자신의 죽음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맹주를 대신해서 죽을 줄이야.

애초에 그 정도의 충정심이 있는 것도 아니건만.

그가 적비연을 향해 힘겹게 말했다.

“웅아, 이젠 네가…… 본가를 이끌어야 한다…… 네게 궁금한 것이 많거늘…… 부디…… 본가를…….”

“아버지, 말씀을 너무 많이 하지 마세요!”

“이미…… 난 틀렸다. 방심한 대가다.”

말을 마친 하불범이 잠시 숨을 고르더니 적비연에게 전음을 전했다.

잠시 후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이제 하불범은 맹주 허위청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의 눈동자에는 생명의 빛이 거의 꺼져가고 있었다.

“맹주…… 내 아들은 마인이 아니…….”

“이를 말이겠소? 이미 그대가 확인해준 바 아니오? 내 그대의 충정을 어찌 의심하겠소? 하 가주! 하 가주!”

하불범은 더 이상 미동이 없었다.

장사를 호령하고 무림맹에서도 나름 중요한 위치에 올랐던 한 가주가 그렇게 생을 마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는 사이 비천대에 사로잡혀 만신창이가 된 장문탁이 적비연에게 이죽거리며 전음을 보내왔다.

[어떠냐? 내 비록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했지만, 네게서 소중한 것을 빼앗았다. 날 방해한 대가다.]

적비연이 천천히 고개를 들고는 장문탁을 보았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입매를 슬쩍 틀었다.

[소중한 것? 정말 그럴까? 내 입장에서는 오히려 감사인사라도 해야 할 판인데?]

그 모습을 본 장문탁은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뭐, 뭐야? 저 녀석……! 저놈은 진짜 마인……! 커억!”

결국 그는 비천대주의 일격을 받고 완전히 의식을 잃고 말았다.

비천대주가 쓰러진 그를 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어디서 되도 않는 모함을 하고 있어? 이 버러지 같은 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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