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만검세가의 주인
“만, 만검세가주가…… 맹주님을 구했어.”
“용봉대회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만약 벽력적가와 만검세가가 아니었다면 어찌 됐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사람들이 잔뜩 상기된 얼굴로 술렁거렸다.
한편 만검세가의 수뇌인사들은 참담한 표정이 되어서는 적비연 근처로 몰려들었다.
“가주님!”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치며 하불범의 시신 앞에 무릎을 털썩 꿇었다.
특히 가주를 지키지 못한 영신은 자괴감에 빠져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한편 뜻밖의 상황이 벌어지자 만대균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가주가 이렇게 어이없이 죽을 줄이야.
이렇게 되면 이 자리에서 하천웅이 가주가 되는 게 아닌가?
그럼 자신은 그야말로 홀로 동떨어져 천애지각(天涯地角) 신세가 되고 말리라.
‘그럴 수는 없지!’
어떻게든 하천웅이 가주가 되는 걸 막아야 한다.
게다가 지금 돌아가는 사정을 봐서는 하천웅이 벽력적가와 손을 잡고 무슨 작당을 하는지 알 수가 없는 상황.
‘젠장! 하필 이럴 때 소가주는 어딜 간 거야!’
이 자리에 하기룡이 있었더라면 어떻게든 상황을 비틀어볼 만도 하건만!
“커험!”
헛기침을 내뱉은 그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가주님께서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셨소. 어서 하기룡 소가주님을 모셔 와서 차후의 일을 논의해 봐야 할 것이오.”
그러자 몇몇 수뇌인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들 모두 하천웅보다는 하기룡에게 우호적인 자들이었다.
하지만 총관 진서국이 성큼 나섰다.
“만 당주께서 말실수를 하셨습니다. 현재 본가의 소가주님은 여기 계십니다.”
진서국이 공손한 자세로 적비연을 가리켰다.
만대균이 짐짓 실수인 척 손을 들어 보였다.
“아, 그렇군. 하나 지금은 워낙 갑작스러운 상황이니 아무래도 경험이 많고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는 일 공자님께…….”
“그만.”
적비연이 손을 들어 제지하자 만대균이 이맛살을 슬쩍 구기고는 돌아보았다.
적비연이 장내를 힐끔 둘러보고는 말했다.
“지금 형님이 어디에 계신 줄 알고 모셔온단 말이오? 어서 수습을 해야 할 상황인데. 설마 형님을 찾아올 때까지 아버지를 여기 이렇게 내버려 두겠단 생각이오?”
적비연이 날카롭게 따져들자 만대균이 침음을 흘리고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진서국이 적비연에게 물었다.
“가주님께서 전음으로 말씀을 남기시는 것 같던데…… 무슨 내용이었는지요?”
“개인적인 유언을 제외하면, 아버지께서는…….”
적비연이 다시 한번 만검세가 무인들을 훑어보았다.
만검세가 무인뿐만 아니라 장내의 모든 이들이 적비연을 지켜보고 있었다.
적비연은 잠시 갈등했다.
만인이 모인 자리에서 조금 더 강하게 나갈 것인가?
아니면 한번 만검세가의 분위기를 지켜볼 것인가?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래, 이들에게 시간을 주면 오히려 내분이 더 일어나거나 패가 갈릴 것이다. 차라리 모두 모인 자리에서 강하게 밀어붙이자!’
전자를 선택한 적비연이 목청을 높이고 외쳤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소! 저 악랄한 사파 무리의 음모가 만천하에 공개된 이상, 본가는 사사로운 감정으로 힘을 낭비할 수 없다! 또한 벽력적가 무인이 본가의 소가주를 비호하면서까지 힘을 더해주었으니, 이전의 은원관계는 정리된 것이나 마찬가지라 하겠다! 그런 만큼 앞으로는 해묵은 갈등을 씻어내고 벽력적가와 협력하여 새로운 시대를 열라!”
적비연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자 장내는 잠시 침묵에 휩싸였다.
모두가 예상하지 못한 발언이었다.
만대균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니, 이게 뭔 개소리야! 가주님이 그러셨을 리가 없잖아!’
그가 발끈하며 나섰다.
“이 공자…… 아니, 소가주님! 대체 그게 무슨……!”
짝짝짝.
느닷없는 박수 소리에 만대균이 멈칫거리고는 돌아보았다.
점잖게 손을 마주치며 웃는 사람은 바로 맹주 허위청이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과연 만검세가주는 마지막까지 나를 놀라게 하는구려. 원한을 씻어내는 것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닐진대. 만검세가주가 목숨을 내던져가면서까지 보여준 충정과 지금의 의로운 결정은 만인의 본보기가 될 거요.”
맹주의 말에 사람들이 상기된 표정으로 떠들어댔다.
“정말 대단하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더니. 만검세가가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 줄이야.”
“만검세가주는 이 시대의 진정한 영웅이다!”
“만검세가와 벽력적가가 화해했으니 장사에 새로운 시대가 열리겠구나.”
여론이 형성되니 만대균도 더 이상은 큰소리를 칠 수가 없었다.
만약 여기서 끝까지 벽력적가를 원수로 여겨야 한다고 주장했다간 졸지에 옹졸한 인간으로 내몰릴 판이었다.
적비연이 만대균을 보며 내심 조소를 지었다.
‘짜증 나 죽겠단 표정이군.’
사실 하불범이 전음으로 남긴 내용은 전혀 달랐다.
벽력적가와 관련된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없었다.
그때 무림맹 총군사 가후가 다가와 물었다.
“하 공자…… 아니, 하 가주. 조금 이르긴 하지만 아까 얘기했던 부분에 대해 다시 물어봐도 되겠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정말로 강동칠괴에게 의뢰를 한 배후가 혈조야귀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강동칠괴를 섬멸한 것은 본가였지만, 그 배후를 밝힌 것은 벽력적가주였습니다. 당시 아상 어르신을 마중 나갔던 무인들이 전멸하면서 벽력적가주가 크게 노했지요. 이후 벽력적가주는 강동칠괴의 행적을 면밀히 조사해서 그 배후에 혈조야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혈조야귀는 교패의 심복이며, 교패는 오래전부터 신풍문을 만들어 오늘 일을 계획했지요. 그 신풍문에서 남몰래 키운 살수가 바로…….”
적비연의 눈이 쓰러져 있는 장문탁에게 향했다.
“저 녀석입니다.”
“하면 벽력적가주는 지금 어디에 있소?”
“최근 흑천련의 움직임이 수상하다고 여기고는 조사차 강서성으로 가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허어!”
총군사는 물론 모여 있던 많은 사람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강서 지역은 흑천련의 영역이었다.
정파 무인들이라면 절대 발을 들이지 않는 곳.
만약 발을 들인다면 일절 무공을 드러내지 않아야만 한다.
정도의 ‘정’ 자만 꺼내도 다짜고짜 칼부터 휘두르는 곳이기에.
맹주가 신음처럼 목소리를 흘렸다.
“세력 다툼을 하는 와중에도 흑천련을 상대로는 그렇게 공조하고 있었다니…… 이는 모든 문파가 배워 마땅할 일일세.”
“모든 건 벽력적가주님의 뜻이었습니다.”
“허어, 내 언젠가 적 가주를 만나게 되면 감사 인사라도 꼭 해야겠군.”
맹주가 총군사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벽력적가와 만검세가 무인들에게 편히 쉴 수 있는 숙소를 제공하고, 하불범 가주의 장례를 준비해 주게. 최고의 대우를 해주도록.”
“즉시 조치하겠습니다.”
가후가 고개를 숙이며 대꾸했다.
마침 염능파가 비무대 위로 올라가서 소리쳤다.
“돌발 상황이 발생한 만큼 규정에 따라 천하용봉대회는 무기한 중단할 것을 선언하겠소!”
그렇게 상황이 대략 정리되자, 적비연 곁에 머문 극마가 빈정거리듯 말했다.
-네놈은 어째 갈수록 무공이 느는 게 아니라 거짓말만 기가 막히게 느는구나.
* * *
무림맹은 하불범의 장례를 지극 정성으로 치러주었다.
하불범의 사망 소식은 삽시간에 무림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수많은 강호 명인들이 찾아와 애도의 시간을 가졌다.
비록 하불범은 의도하지 않았던 희생이었지만, 강호인들은 저마다 그의 헌신을 높이 샀다.
물론 적비연은 자칫 만검세가의 위상만 드높아지지 않도록 틈만 나면 그 공을 벽력적가에게 돌렸다.
덕분에 벽력적가주는 정의를 위해서 혈혈단신으로 적지에 뛰어든 젊은 호협으로 이름을 드날리게 됐다.
뿐만 아니라 적비연은 시종 벽력적가를 은인처럼 여긴다는 말을 흘리고 다녔다.
물론 만대균을 비롯한 몇몇 수뇌부들이 그런 적비연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때가 때인지라 차마 나서지는 못하는 눈치였다.
그렇게 장례를 마친 적비연은 무림맹에서 마련해 준 숙소에 머물며 잠시 생각할 시간을 가졌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적비연은 숙소 후원의 정자에서 가부좌를 틀고는 운기행공을 하다가 서서히 눈을 떴다.
‘확실히 선천지기를 운기만으로 회복할 수 있게 됐구나.’
적비연은 아기의 몸으로 환생했을 때 대천문이 열린 상태를 경험했다.
그때 운기를 통해서 선천지기를 확장할 수 있었다.
다만 어른의 경우에는 머리뼈가 완전히 닫히게 되기 때문에 더 이상 선천지기를 확장할 수가 없었다.
다만 소모한 것을 그대로 회복하는 것은 가능했는데, 그게 바로 아기였을 때 익힌 운기 방식이었다.
적비연은 이 운공방식을 선천회기공(先天回氣功)이라고 이름 지었다.
보통 선천지기는 한 번 소모하면 끝이다.
다시 회복하는 게 불가능하다.
하지만 선천회기공을 사용하면 선천지기가 확장하진 않더라도 소모한 공력을 회복하는 게 가능했다.
이건 정말 대단한 성과였다.
보통의 선천지기가 일반적인 내공보다도 강한 기운을 갖기 때문에 비상시에 이 선천지기를 사용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터였다.
“후우우.”
길게 숨을 내쉰 적비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극마가 툴툴거리듯 물었다.
-거긴 언제 갈 거냐?
‘아직 몰라.’
-거참, 답답하군! 어서 가서 확인해봐야 할 것 아냐!
‘급할 건 없지. 어차피 나만 알고 있으니.’
적비연이 여유롭게 웃었다.
극마가 말하는 건 하불범이 죽으면서 유언으로 남긴 전음 내용과 관련된 것이었다.
하불범은 적비연에게 가주만 드나들 수 있는 비동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사실 이건 그리 놀라운 말도 아니었다.
벽력적가에도 비동이 존재했으니까.
한데 놀라운 건 그다음에 이어진 말이었다.
[그곳에 마공서 한 권이 있다. 이 아비는 네가 혹여나 그 마공서를 익힌 게 아닌가 노심초사했다. 생각해 보면 네가 절대 들어갈 수 없는 곳인데도 말이지. 어쨌거나 내가 죽거든 그 마공서를 태워서 없애도록 해라. 그 마공서는 네 증조부가 정마대전에서 전리품으로 챙겨두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혹여나 괜한 생각은 말고 반드시 그 마공서를 없애도록 해라.]
‘마공서라…….’
마공을 익힌 극마가 이렇게 호기심을 가지고 안달복달할 만도 하다.
물론 적비연은 그 마공서를 태워 없애 버릴 생각은 없다.
쓸 만한 무공이라면 마공이라도 개의치 않고 익힐 생각이다.
다만 지금은 장사로 돌아갈 때가 아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맹주는 육용봉에 오른 자들을 모두 맹 내에 남아달라고 했다.
‘뭐, 조만간 이유를 알게 되겠지.’
마침 기척을 느낀 적비연이 전각 모퉁이를 돌아보자, 총관 진서국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이오?”
“만 당주를 비롯한 몇몇 무인들의 반감이 심상치 않습니다.”
“반감이라면 나에 대해서?”
“예, 현재 가주님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이 보이고 있습니다.”
“그럼 어쩌겠다는 거요? 형님마저 실종된 상황에서 가주의 자리를 마냥 비워둘 수도 없는…….”
그때 모퉁이에서 우렁찬 소리가 들려왔다.
“가주의 자리를 꼭 비워둘 필요는 없지요!”
성큼성큼 걸으며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만대균이었다.
그의 뒤로 수뇌인사 세 명이 더 있었다.
만리전주(萬鯉殿主) 박효양(朴曉陽), 팔룡당주(八龍堂主) 심원평(審沅平), 만파당주(萬波堂主) 안철주(安鐵週)였다.
그들 모두 하기룡을 지지하던 자들이었다.
‘일찍도 움직였네.’
물론 만대균이 가만히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장사로 돌아갈 때까지는 참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한데 맹내에서 벌써 세를 이루고 찾아와?
어지간히 급했나 보군.
아마 장사로 돌아가면 때를 놓칠 수도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긴.
아무리 맹 내라고 할지라도 집안일에 무림맹이 끼어들 수는 없을 테니.
적비연이 입매를 비틀며 물었다.
“나를 가주로 인정할 수도 없고, 가주의 자리를 비워두지도 않겠다면 대체 어쩌자는 거요?”
만대균의 입에서 뜻밖의 대답이 튀어나왔다.
“본가의 가주 자리를 굳이 세습제로 유지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깜짝 놀란 진서국이 성큼 나섰다.
“만 당주! 그 무슨……!”
“아아, 총관께서는 잠시 물러나 계시오. 나는 지금 공자와 이야기를 하는 중이니까.”
만대균이 입매를 비틀었다.
적비연이 피식 웃었다.
“하여튼 이놈이나 저놈이나 처맞아야 정신을 차린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