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79화 (80/301)

79. 만검세가의 주인

“뭐요?”

만대균은 귀를 의심했다.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뭐? 처맞아야 정신을 차려?

어찌 한 가문의 수장이라는 자가 저리도 천박한 말을!

천지분간 못하는 망나니라는 사실은 진작 알고 있었지만, 눈앞에 간부들을 두고 저렇게 입을 가벼이 놀릴 줄은 몰랐다.

여기 있는 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하면 자칫 무늬만 가주가 될 수 있다는 걸 모르는 건가?

적비연의 말에 심기가 불편해진 만리전주 박효양이 성큼 나섰다.

“공자! 말이 지나치……!”

“가주.”

“뭐요?”

“가주라고. 공자가 아니라 난 이 가문의 주인이란 말이야. 그러니 가주님이라고 불러야지.”

“흥! 갑자기 지위가 변하니 기고만장하는 꼴이라니! 그간의 정을 봐서라도 눌러 참았건만. 어찌 이리도 무례하단 말이오?”

“눌러 참아? 뭘 눌러 참았는데?”

적비연이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무심코 내디딘 걸음이었지만 그 위압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만대균을 비롯한 간부들이 움찔거리고는 물러났다.

적비연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표정으로 말했다.

“참을 일도 많군. 원칙에 따라 가주의 자리를 물려받은 건데 무슨 불만이 이리들 많은지. 아니면 다들 권력욕에 눈이 멀어서 주제 파악을 못하는 건가?”

“주, 주제 파악이라니……!”

“왜 내가 틀린 말 했어?”

“공자!”

“가주라니까.”

“크익……!”

박효양이 이를 빠득 갈자, 만대균이 슬며시 나섰다.

“공자께서 아무리 가주라고 스스로 우긴다고 해도 우리는 인정할 수가 없소. 그러니 그 호칭을 강요하진…….”

“그럼 나가.”

“뭣이?”

“나가라고. 주인이 마음에 안 들면 떠나야지.”

“허어!”

만대균은 어이가 없어서 실소를 터뜨렸다.

함께 온 다른 간부들도 마찬가지.

그들 중 누구도 이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다.

이렇게 떼를 지어 찾아오면 엎드려 빌진 않더라도 최대한 자세를 낮춰 대화에 임할 줄 알았다.

한데 이건 뭐…….

‘망나니는 망나니구나. 괜히 그런 별칭이 붙은 게 아니지! 생각이라는 걸 안 하는 모양이군!’

만대균이 딱딱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리 가주가 되었기로서니 어찌 이리 무례하단 말이오? 게다가 벽력적가와 화친을 맺는 것은 그리 간단하게 결정 내릴 문제가…….”

“맹주님이 지지하신 일이고, 그 덕분에 만천하가 만검세가를 추켜세웠는데 뭐가 문제지?”

“아무리 그래도 벽력적가를 은인처럼 여길 필요까지야 없지 않소? 그리고 이건 가문끼리 해결할 문제요. 맹주님 칭찬에 헤벌쭉해서 넘길 사안이 아니란 말이오!”

“총관.”

적비연의 부름에 진서국이 다가와 고개를 조아렸다.

“예, 가주님.”

“가규(家規)가 어떻게 되오?”

“어떤…….”

“가주를 인정하지 않고 모욕했으며, 그 자리를 탐내는 자에 대한 징계.”

진서국이 적비연과 만대균의 눈치를 잠시 살피다가 이내 대답했다.

“영구 추방입니다. 경우에 따라 참수도…… 해당됩니다.”

“들었지?”

만대균이 뺨을 씰룩였다.

“나를 추방하시겠다?”

“그래.”

“그럴 수 없다면?”

만대균이 내공을 끌어냈다.

그의 장삼 자락이 부풀어 올랐다.

참을 만큼 참았다.

총관이 편을 들어주니까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가문을 궁지에 몰아넣었던 개망나니 주제에……!’

적비연이 만대균을 물끄러미 보더니 허리춤에서 검을 스르릉 뽑아 들었다.

만대균을 비롯한 세 간부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설마, 설마 했는데 정말 검을 뽑아 들 줄이야.

적비연이 차갑게 일렀다.

“추방을 거부한다면 참수할 수밖에. 나는 분명 기회를 줬다.”

“이런 미친…….”

급기야 만대균의 입에서 험악한 말이 튀어나왔다.

대놓고 자신의 목을 썰어 버리겠다는데 고운 말이 나갈 리가 없었다.

스르르릉!

만대균이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말이 통하지 않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무모할 줄은 몰랐소.”

“어느 쪽이 무모한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공자는 가주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소.”

“너는 어울리고?”

만대균이 뺨을 씰룩이더니 순간 바닥을 찼다.

타앗!

“어린 녀석이 끝까지 무례하구나!”

이제는 예의고 뭐고 없었다.

이미 서로에게 검을 겨눈 이상 사생결단을 내야 했다.

만대균은 자신 있었다.

하기룡의 패배가 뜻밖이긴 했지만, 분명 하천웅이 어떤 꼼수를 썼으리라 판단했다.

하천웅을 어디 하루 이틀 보며 살았던가?

하루아침에 득도를 했다고 쳐도 사람이 강해지는 데에는 한계가…….

쩌엉!

검과 검이 부딪치면서 강맹한 기운이 만대균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헛!’

그의 눈동자가 커졌다.

한계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한데 이래서야 마치…….

‘전혀 다른 사람이잖아?’

검을 맞댄 적비연이 한쪽 입매를 치켜 올렸다.

“사람이 한 번 충성하기로 했으면 신의를 지켜야지. 너는 나를 두 번 배신했다.”

“어찌 이런……!”

팍!

적비연이 물러나면서 만대균의 복부를 걷어찼다.

“큽!”

만대균이 비틀거리며 물러나자 적비연이 그대로 몸을 회전했다.

따다다당!

어찌나 빠르게 회전하는지 연이어 금속성이 울리면서 만대균이 튕기듯 물러났다.

적비연 주변으로 붉은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선풍만엽(旋風萬葉)!

만검세가에서 으뜸으로 치는 화룡만검법의 초식이었다.

상승무공을 아무렇지도 않게 펼치자, 만대균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그 망나니가 어떻게 화룡만검법을……?’

화룡만검법은 최소 절정 구단을 넘어야 사용할 수 있지 않던가?

하면 소가주가 당한 게 운이나 꼼수가 아니었단 말인가?

그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헝클어져 있을 때, 적비연은 곧바로 화룡만검법의 광휘만엽 초식을 연환식으로 펼쳤다.

수만 개의 빛살이 마구잡이로 날아들며 만대균의 요혈을 노려왔다.

“치잇!”

타타당! 까가가강!

불꽃이 터지기 시작했다.

적비연은 그 기세를 그대로 끌어올리면서 내공을 한껏 발출했다.

쉭쉭쉭쉭쉭쉭!

적비연을 중심으로 붉게 물든 기운은 이제 타오르는 불길처럼 뜨겁기까지 했다.

거기에 수천 가닥의 검기가 만대균에게 날아드니 지켜보는 자들이 절로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

“저, 저건…… 만검화린이 아닌가?”

박효양의 말에 심원평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군요. 틀림없이 만검화린입니다. 이 공자의 무공이 상승해서 천검화린의 벽을 깬 모양입니다.”

“어찌 이리 단 시간에…….”

박효양을 비롯한 심원평과 안철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들이 이 공자의 가주 승계를 반대한 이유는 딱 하나였다.

하천웅의 미덥지 못한 무공 실력.

무예로 일가를 이룬 만검세가의 주인이 겨우 절정 초단에 머물러 있다면 누가 명문이라고 하겠는가?

한데 저 수준이라면…….

“초절정을 넘어선 것 같습니다.”

꿀꺽.

심원평의 말에 박효양이 마른침을 삼켰다.

물론 지금 당장 박효양이 칼을 뽑아 들고 적비연과 싸운다면 그 결과는 알 수 없다.

그 역시 초절정을 넘어선 고수였으니까.

하지만 장래성을 따진다면 하천웅은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약관을 지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이 공자가 벌써 초절정의 경지에 들어선 것이다.

‘괜히 십이용봉에 든 게 아니란 건가?’

그가 침음을 흘리며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적비연은 그야말로 정신없이 공격을 이어갔다.

‘어떤가? 이만하면 인정할 만한가?’

적비연이 박효양과 다른 간부들을 슬쩍 보았다.

확실히 좀 전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적비연은 일부러 상승무공만 연환식으로 펼치고 있었다.

만검세가의 검법은 기본적으로 모두 화려한 특징이 있었는데, 적비연이 지금 펼치는 것은 그중에서도 유독 현란한 검식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눈으로 보이는 효과를 무시할 수 없기에.

한편 만대균은 시간이 흐를수록 식은땀이 흘렀다.

‘어째서……?’

확실히 이 공자가 빠른 성장을 이루었다는 건 인정한다.

약관을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천재적인 초절정고수?

그래, 그것도 인정한다.

하지만 자신은 초절정 이 단이다.

한 단 차이가 뭔 대수겠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고수의 영역으로 갈수록 한 단계의 격차가 심한 법이다.

하천웅의 무공을 가늠해 볼 때 초절정 일 단 정도로 보이는데, 왜 이렇게 자신이 밀리는지 알 수가 없다.

틈을 보고 공격하면, 상대는 기가 막히게 그곳을 차단하면서 역으로 치고 들어온다.

다시 다른 틈을 노려도 어김없이 막힌다.

마치 자신의 속내를 훤히 꿰뚫어보는 것만 같다.

‘뭐지? 어째서 내 움직임을 다 파악하는 거지?’

언젠가 목숨 걸고 싸워보기라도 했던 사람 같지 않나?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적비연은 이미 운귀의 몸으로 만대균을 상대한 적이 있었으니.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불태(百戰不殆)라지 않던가?

하지만 그런 사실을 까마득하게 모르는 만대균은 점점 조급해지고 있었다.

‘제길! 답답하군!’

만대균이 이를 뿌득 갈고는 기합성을 내질렀다.

“흐아압!”

순간 그가 오른발을 뒤로 내밀면서 포탄처럼 튕기듯 날아갔다.

적비연이 정면에서 검을 내질렀다.

만대균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내 그럴 줄 알았다!’

그가 몸을 오른쪽으로 기울면서 그대로 초풍일검 초식을 펼쳤다.

‘걸렸다!’

쒸에에엑!

검봉이 옆구리를 뚫으려는 순간,

팟!

마치 신기루처럼 상대의 몸이 사라졌다.

만대균의 눈동자가 커졌다.

‘이 무슨……?’

어느새 적비연이 바로 옆에 서 있는 게 아닌가?

‘이게 어떻게 된……?’

이런 보법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생소할 테지.’

적비연이 내심 웃었다.

이 보법은 본가의 섬전보와 만검세가의 만검보를 절묘하게 섞어서 만든 것이니까.

이름은 섬검보(閃劍步)라고 지었다.

특히 만검세가 무인들을 상대할 때 매우 효과적인 보법이다.

언젠가 만대균과 이렇게 결판낼 날이 올 것이라 짐작했기에 준비해 둔 것이기도 했다.

만약 싸움이 조금 더 길어졌다면 불리해졌을 것이다.

한 번 싸워본 경험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만대균 정도의 고수라면 차츰 적응해 갈 터.

그러다 보면 무공 수위가 더 강한 만대균이 상황을 역전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싸우기 전부터 계획을 세웠다.

화려한 상승무공으로 혼을 빼놓은 다음 섣불리 회심의 일격을 유도한다.

그때 섬검보를 이용해 취약점을 파고들어 역공을 가한다!

쉬컥!

“크아아악!”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만대균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적비연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만검파랑 초식을 펼쳤다.

천검파랑이 진화한 초식.

“크읍!”

따다다다다당!

만대균이 이를 악물고는 쏟아지는 검기를 악착같이 막아냈다.

[네놈에게 두 번 죽을 수는 없지!]

‘두 번……? 그 무슨?’

하지만 생각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그가 만검보를 밟으며 훌쩍 물러난 순간,

쒸아아아앙!

적비연이 선천지기까지 쏟아내며 만검합일초식을 펼쳤다.

만대균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이, 이대로는 죽는다……!’

그가 기합성을 내지르며 온 힘을 다해 검을 앞세웠다.

“흐아아아압!”

투까아앙!

이후의 과정이 만대균의 눈에는 느릿하게 그려졌다.

균열이 가면서 부러진 검신, 그 사이를 날카롭게 파고드는 적비연의 검봉, 몰 줄기에 닿은 차디 찬 금속.

푸욱!

그리고 시선이 붕 떠올랐다.

이어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툭, 데굴데굴…….

검기에 싹둑 잘려 나간 만대균의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츄아아아!

피를 분수처럼 터뜨린 만대균의 몸이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

박효양을 비롯한 간부들이 입을 딱 벌리고 꿈쩍도 못했다.

촤악!

검을 한차례 휘둘러 묻은 피를 털어낸 적비연이 간부들을 돌아보았다.

“가규를 어기실 분, 또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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