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80화 (81/301)

80. 만검세가의 주인

휘이이잉.

썰렁한 바람이 후원을 한차례 휩쓸고 지나갔다.

이파리 하나가 바람에 날려 만대균의 머리에 달라붙었다가 이내 허공으로 떠올랐다.

만대균과 함께 왔던 세 사람은 경악한 표정으로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만 당주가…… 죽다니……!’

머리가 잘린 시신이 눈앞에 있건만 쉬이 믿어지지 않는다.

마치 꿈을 꾸는 기분이다.

박효양이 고개를 들고 적비연을 보았다.

적비연은 여전히 차가운 표정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얼떨떨하기만 하다.

정말로 저자가 그 망나니 하천웅이 맞나?

기도가 달라서 그런 걸까?

완전히 다른 사람이 서 있는 것만 같다.

게다가 정확한 무공 수위가 짐작도 되지 않는다.

느껴지는 기운만 보면 이제 막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것 같은데, 만대균을 너무 쉽게 가지고 놀았다.

어쩌면 실력을 전부 드러내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살아갈 날이 창창한 젊은이인데, 마치 산전수전을 다 겪어본 것만 같은 표정.

그럴 수밖에.

적비연은 이미 수백 년에 해당하는 삶을 기억하고 있으니.

적비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 말을 듣지 못했소?”

“아……!”

박효양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래도 반응은 그가 제일 빨랐다.

쿠웅!

그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으며 고개 숙이고 포권을 취했다.

“노부가 어리석어 가주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셋 중에서도 가장 어른이자 고위직인 박효양이 이렇게 나오자, 나머지 두 사람도 얼른 무릎을 꿇으며 포권했다.

쿵, 쿵!

“용, 용서해 주십시오!”

세 사람이 나란히 무릎을 꿇자, 적비연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진서국을 돌아보았다.

“총관, 어떻게 할까요?”

“저어…… 세 분도 마음을 바꾸신 듯하니 이 정도로 넘어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가주가 바뀌자마자 피를 너무 많이 보면 문도들이 혼란스러워할 수도 있습니다.”

“흐음. 총관의 뜻이 그렇다면 이쯤 하겠소.”

그러자 세 사람이 동시에 이마를 바닥에 찧으며 소리쳤다.

“가주님의 은혜, 충성을 다해 갚도록 하겠습니다!”

“박 전주.”

“예, 가주님.”

적비연이 바닥에 떨어진 만대균의 머리를 검으로 푹 찍어 들었다.

휙!

그가 검을 휘두르자 검봉에 박혀 있던 만대균의 머리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 박효양의 품에 안겼다.

박효양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적비연이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했다.

“장사로 먼저 돌아가시오. 그곳에서 만 당주가 왜 죽었는지 직접 설명하고 정문에 효시하도록 하시오.”

박효양은 그래도 머리가 좋은 편이었다.

그는 가주가 자신에게 기회를 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애초에 줄을 잘못 서긴 했지만, 그걸 무마시킬 수 있다면?

새로 맞이한 시대를 최전선에서 나란히 설 수만 있다면 불구덩이라도 못 뛰어들겠는가?

박효양이 충심을 담은 목소리로 답했다.

“가주님의 명 받들겠습니다!”

“그럼 가도 좋소.”

“저어…… 한 가지 여쭤도 될는지요?”

“무엇이오?”

적비연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돌아보자, 박효양이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보기에는 가주님의 무공 수위가 노화순청(爐火純靑)의 경지에 이른 듯한데 어찌 적가를 대하실 때는 그리 스스로를 낮추시는 건지요?”

그야 내가 적비연이니까 그렇지.

물론 속에서 떠오른 말은 꿀꺽 삼켰다.

대신 눈살을 찌푸리고는 은근히 질책하듯 물었다.

“벌써 아부하는 거요?”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입니다. 그저 느낀 대로 말씀드린 것일 뿐입니다.”

“흐음. 벽력적가주를 최근 본 적이 있소?”

“최근에는 기회가 되지 않아 본 적은 없습니다.”

“나는 일전에 적가장을 찾아갔을 때 잠깐이나마 본 적이 있소.”

“어떠셨는지요?”

“내가 갑자기 무공이 상승해서 많이 놀라지 않았소?”

“…….”

“괜찮소. 사실은 사실이니까. 모두들 나를 망나니라고 불러댄 것도 알고 있소.”

“송, 송구합니다.”

“송구할 것까지야. 나는 정말 망나니였소. 아주 쓰레기였지. 앞에서는 안 그런 척하면서 남 뒤통수나 치는 비열한 인간이었소. 정말 치졸하기 짝이 없었소. 내가 만약 적 가주였다면 나 같은 인간은 입에 넣어 잘근잘근 씹어 삼키고 싶을 정도로…….”

아, 말하다 보니까 또 열받네.

순간 자아가 타아와 완전히 분리되면서 화가 일어났다.

박효양을 비롯한 세 사람이 새파랗게 질려서는 손사래를 쳤다.

“가, 가주님이 과거에 자유분방하시긴 했으나…… 그,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아니오! 난 정말 개망나니였소! 나란 인간은 아무에게라도 뒤통수를 쳐 맞고 그 자리에서 뒈져도 할 말 없는 천하의 악랄한……!”

“가, 가주님. 고정하십시오. 저희들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적비연이 분노한 이유에 대해 단단히 오해한 세 사람이 다시 한번 바닥에 이마를 쿵쿵 찧어댔다.

“후우.”

적비연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과거 하천웅이 한 짓을 떠올리자 자신도 모르게 흥분하고 말았다.

잠시 마음을 가다듬은 적비연이 세 사람을 향해 말했다.

“어쨌든 하던 말을 마저 잇자면…… 과거의 나는 개망나니, 개쓰레기, 개병신이었지만…….”

“그, 그 정도는…….”

“말대꾸하지 마시오!”

“죄, 죄송합니다!”

“흐음. 지금은 이렇게 사람 구실을 하고 있소. 그 이유가 바로 적 가주 때문이오.”

사실은 사실이지.

내가 이 몸을 차지했으니 그나마 사람처럼 구는 게 아니겠나?

그래도 그걸 그대로 말할 수는 없는 법.

“적 가주 때문이라 하심은……?”

박효양의 물음에 적비연이 대꾸했다.

“그날 적 가주는 내게 무공에 대한 조언을 해주었소. 그 한마디에 나는 큰 깨우침을 얻었소.”

“단 한마디에……!”

“그렇소. 단 한마디에.”

“대체 무슨 말씀을 해주셨기에…….”

뭐, 내가 하천웅을 만났다면 쌍욕밖에 더 했겠어?

하지만 그대로 말할 순 없으니…….

“그건 알려 드릴 수 없소. 적 가주와 나만의 약조요. 그러니 내가 적 가주를 은인으로 섬길 수밖에 없는 거요.”

“하면 적 가주의 무공 수위는 어느 정도나 되는지요?”

“흐음. 그 옛날 서서가 제갈량을 가리켜 이렇게 말했지. 자신이 반딧불이라면, 제갈량은 보름달이라고. 그와 같소. 내 재능이 반딧불이라면 적 가주는 보름달과 같소. 그야말로 찬란하게 빛나는 보름달 말이오. 너무 눈부셔서 마주보기도 힘들 만큼!”

“그런……!”

박효양과 심원평, 안철주가 서로를 번갈아 보며 입을 딱 벌렸다.

‘흠흠, 너무 띄웠나?’

아니나 다를까, 옆에서 내내 지켜보던 극마가 실소를 금치 못했다.

-네놈은 반딧불도 됐다가 보름달도 됐다가 아주 제멋대로구나?

‘시끄러워. 어디 보름달뿐이겠어? 장차 태양처럼 빛날 거다!’

-너의 그 거짓말 능력이 태양처럼 눈부시긴 하다.

극마가 빈정거렸지만 적비연은 반응하지 않았다.

박효양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꾸했다.

“그, 그런 경지에 이른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적 가주의 무공이 대단한 수준이었군요.”

“그뿐만이 아니오. 적 가주는 나의 무례함에도 불구하고 내게 천상단을 주었소. 그것도 아무 조건 없이.”

“천상단까지!”

“내 살아생전 그리 배포가 큰 분을 뵌 적이 없었소. 자, 이래도 내가 적 가주를 은인으로 여기는 게 이해되지 않소?”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였지만, 적 가주를 원수처럼 여겼던 하천웅이 직접 하는 말이다.

그러니 믿지 않을 수도 없다.

실제로 하천웅의 무공이 이 정도로 단기간에 발전하려면 천상단 같은 영약을 복용해야 할 테니.

마침내 박효양이 고개를 깊이 숙이며 답했다.

“가주님의 은인이라면, 본가의 은인이지요!”

“좋은 말씀이오. 지금 그 생각을 장사로 돌아가서 모두에게 전하도록 하시오. 혹여 내가 돌아갔을 때 벽력적가와 불필요한 마찰이 일어났다면…….”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좋소. 받으시오.”

적비연이 품에서 둥근 단환을 꺼내 세 사람에게 하나씩 던졌다.

“이, 이건…… 천상단!”

“그렇소. 특등품은 아니지만, 그 또한 강호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영단이오. 적 가주님이 내게 준 것이지. 뭐, 삼등품을 사십오만 냥에 구입한 것에 대한 보상이기도 하지만. 마침 딱 세 개가 남았었는데, 세 분께 선물로 드리겠소.”

“가, 가주님의 은혜, 목숨으로 갚겠습니다!”

“목숨으로 갚겠습니다!”

세 사람이 감격에 차서 외쳤다.

옆에서 보던 극마가 손뼉을 짝 쳤다.

-캬아! 잘 굴린다, 잘 굴려. 채찍과 당근인가? 어디서 그렇게 사람 구워삶는 법을 배웠느냐?

‘저절로 학습된 거지. 이래 봬도 내가 수백 년을 산 경험이 있으니까.’

-수백 년?

‘그래, 이 사람, 저 사람 기억을 다 합치면 그 정도 되거든. 누구처럼 천 년 동안 봉인돼서 기억이라곤 없는 것과 차원이 다르지.’

-뭣이? 지금 그건 날 보고 하는 말이냐!

‘눈치는 있네. 자, 어때? 이제라도 주인으로 섬겨볼 생각은?’

-시끄럽다! 절대 그럴 일은 없다!

‘뭐, 두고 보자고.’

적비연이 빙글 웃고는 고개 숙인 세 사람에게 명했다.

“그럼 장사로 돌아가 보시오.”

“예, 가주님.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세 사람이 허리를 꾸벅 숙이고는 돌아갔다.

박효양은 한 손에 만대균의 머리를, 다른 한 손에는 천상단을 든 채였다.

그 모습을 본 총관 진서국은 내심 감탄했다.

보통 사람들은 채찍을 휘두르거나 당근을 내주거나 둘 중 하나만 하기 마련이다.

감정의 관성 때문이다.

한 번 괘씸한 마음이 들면 좀처럼 풀리지 않는 법이고, 반대로 한 번 고마움을 느끼면 어지간한 잘못도 덮어두기 마련이니까.

한데 적비연은 한자리에서 채찍과 당근을 자연스럽게 건넸다.

골치 아픈 한 사람을 본보기로 처리하면서 세 사람을 충복으로 만든 것이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이제 저 세 사람은 절대로 가주님을 등지지 못할 겁니다.”

이렇게 상벌이 확실한데 굳이 위험을 감수하며 반기를 들 이유가 있겠는가?

적비연이 조금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총관께도 뭔가 드리면 좋을 텐데 미안하게도 지금 내게 남은 게 없소. 나중에라도 총관께는 따로 마음을 전하도록 하겠소.”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이미 저는 무엇보다 소중한 걸 받았으니까요.”

진서국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 소중한 걸 사실은 내가 죽일 뻔했다는 걸 꿈에도 모르겠지.’

적비연이 쓴웃음을 짓고 있을 때, 마침 염능파가 후원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곧 후원 한가운데에 목을 잃은 만대균의 시체를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죄송합니다. 집안 문제로 조금 손을 쓰게 됐습니다. 뒤처리는 깔끔하게 해두겠습니다.”

적비연의 대답에 염능파가 잠깐 한숨을 내쉬었다.

집안일이라는데 맹이 나서서 왈가왈부할 수도 없는 법.

“그래도 맹 내에서는 자중해 주게.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겠네만.”

“네,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절 찾으신 이유는……?”

“맹주님께서 부르시네. 자네를 비롯한 육용봉,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사룡봉 모두 맹주전으로 모이라 하셨네. 자세한 이야기는 그곳에 가면 알 수 있을 게야.”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 * *

“예? 지금 뭐라고…….”

깜짝 놀란 임송화가 되묻자 총군사 가후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들으신 대로입니다. 네 분이 흑천련으로 가주셔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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