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83화 (84/301)

83. 구천혈마검(九天血魔劍)

적비연이 멈칫하고는 극마를 돌아보았다.

어딘지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응? 안 된다고? 왜 안 될까?’

그제야 극마는 뺨을 씰룩이며 적비연을 노려보았다.

아뿔싸. 이놈이 연기 천재라는 사실을 깜빡하고 말았다.

애초에 태울 생각이 없었던 거냐?

그저 내 반응을 보려고 일부러?

자존심이 상한 극마가 곧바로 대답하지 않자, 적비연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했다.

“뭐, 딱히 이유가 없는 것 같으니 태워 버릴게.”

하불범이 구천혈마검을 모셔만 두고 따로 익히지 않은 것도 아마 구천혈마심법이 없기 때문이리라.

괜히 이런 위험한 서책을 놔두는 것보다 태우는 게 어쩌면 더 나은 선택일 수도 있었다.

화르륵!

적비연의 손끝에서 화기가 맺히자 정말로 비서 끝부분이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야, 야이! 미친놈아! 그만하라니까! 그게 어떤 물건인 줄 알고!

치이익.

곧이어진 한기에 타들어 가던 비서가 연기를 뿜어내며 연소를 멈췄다.

극마가 타다 만 마공서를 입으로 후후 불어댔다.

물론 그런다고 정말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니었지만.

‘자, 이유를 말해봐. 이 마공서에 대해서. 마침 네가 마선이니 모를 것도 없을 테지?’

-마선이라고 해서 모든 마공을 다 아는 게 아니다. 너희 정공이 그렇듯이 마공도 시간이 흐르면서 퇴화하기도 하고 발전하기도 하지.

‘그런데 구천혈마검에 대해서는 아는군.’

-뭐 그런 셈이지.

‘그런 셈?’

-나도 구천혈마검을 직접 익혀보진 않았으니까.

‘아…….’

-하지만 구천혈마검은 그 어떤 무공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

‘그 정도인가……?’

적비연이 다시 무공서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아까와는 달리 시간을 들여 정독했다.

과연 극마의 말대로 상승의 무리가 담겨 있었다.

그런 만큼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고, 언뜻 봐도 감탄이 나올 만한 부분도 있었다.

확실히 초식만이라도 익혀보고 싶을 만큼 훌륭한 검법서인 것만은 틀림없다.

하지만 마공서답게 무척 패도적이었고, 검식 하나하나가 수호보다는 적을 확실히 처치하는 것에만 초점을 둔 게 여실히 느껴진다.

‘그래도 역시 구천혈마심법이 없다면 반쪽짜리에 불과해. 마인들이 꽁꽁 숨어 버린 이 시점에 구천혈마심법을 어디서 어떻게 찾겠어?’

-모르는 소리를 하는군.

‘뭘 모른다는 거야? 설마 구천혈마심법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건가?’

-아니.

‘그럼?’

-네 말대로 그건 구천혈마심법과 한 쌍을 이루는 검법이지. 하지만 구천혈마심법은 이 시대에 전해져 내려오지 않는다. 그러니 어디에도 없다.

‘뭐? 그럼 더 문제잖아? 그나저나 천 년이나 잠들었던 주제에 그건 어떻게 알아?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을 수도 있지.’

-당연히 알 수밖에. 구천혈마심법 비급서를 없애 버린 게 바로 나니까.

‘뭐라고?’

이번엔 적비연도 놀란 표정으로 극마를 돌아보았다.

-구천혈마심법은 당대 최고의 마공이었다. 정사를 막론하고 구천혈마심법을 뛰어넘을 내공심법은 없다고 봐야 하지. 하나, 그 구천혈마공을 제대로 써먹기 위해서는 구천혈마검을 익혀야 했다. 그런데…….

그걸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이야.

마교 복판도 아니고, 명문정파의 비동에서.

극마가 어금니를 꾹 깨물고는 구천혈마검법서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틀림없다.

이건 진품이다.

구천혈마검법서를 찾으려고 강호 곳곳을 들쑤시고 다녔다.

어딘가에 조그마한 소문이라도 귀에 들어오면 절대로 흘려 넘기지 않았다.

무조건 찾아가서 다 뒤집어놓았다.

그럼에도 찾지 못했다.

우화등선하는 순간에도 구천혈마검을 익히지 못한 게 두고두고 아쉬울 정도였다.

생각에 잠겨 있던 극마에게 적비연이 툭 던지듯 물었다.

‘그럼 네가 구천혈마심법을 익혔다는 거야? 아, 그럴 리는 없겠지. 그렇게 대단한 무공이라면.’

-무슨 소리! 본좌가 익힌 게 맞다. 나는 구천혈마심법을 익힌 후에 곧바로 그 마공서를 폐기해 버렸다. 나 이외에 누구도 익히지 못하도록. 내 직전제자에게 구두로만 전할 생각이었지.

다만 직전제자로 삼을 재목을 찾지 못했다는 게 불운이라면 불운이랄까?

무엇보다 구천혈마검을 사용하지 못하니 구천혈마심법 역시 반쪽짜리에 지나지 않았다.

‘과연 그렇게 된 거군.’

적비연이 이제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극마가 흠칫거렸다.

아차, 이놈이 날 이용하려고 할 텐데 너무 다 까발려 줬구나!

하지만 이미 후회해 봐야 늦은 상황.

적비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극마를 보았다.

‘이게 그렇게 익히고 싶었던 검법서란 말이지?’

-그, 그만큼 대단한 무공이라는 거다.

‘자, 그럼 이제 다시 얘기해볼 까?’

-뭘 말이냐?

‘나를 주인으로 섬기는 것에 대해서.’

-뭣, 뭣이?

‘생각 없으면 이대로 태워 버리고.’

-야, 이 미친놈아! 그게 뭔 줄 알고 태워? 못 들었느냐? 그 검법은 천하제일의 무공이라고…….

‘그래 봐야 반쪽짜리잖아?’

-그러니까 네놈이 날 사부로 모시면 구천혈마심법의 구결을 알려주겠다.

‘그럼 협상결렬이군. 태워 버리지.’

아무리 그래도 귀신을 사부로 모실 수야 없지.

화르르륵.

-잠, 잠깐! 이 미친놈! 넌 당대 최고의 무공을 익히고 싶지도 않은 것이냐?

‘익히고야 싶지. 하지만 사실 내 입장에서는 그게 별로 감이 안 오거든.’

-아무리 그래도 구천혈마검법은 역대 최고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아아,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와닿지 않아. 천하일미 요리가 눈앞에 있어도 먹어보지 않은 이상 그 맛의 진가를 모르는 법 아니겠어? 반면에 한 술이라도 떠먹은 자는 미련이 더 남겠지만.’

적비연이 싱긋 웃었다.

한 술이라도 떠본 자.

그게 바로 극마였다.

극마는 이대로 구천혈마검의 비서를 태워 버리는 걸 절대 용납할 수 없으리라.

누구보다 그가 이 마공서의 진가를 잘 알고 있었다.

구천혈마심법을 익혔으니.

구천혈마공을 완성하고 싶으리라.

게다가 그는 평생 마공을 익히다가 우화등선까지 한 마선이지 않은가?

사실 적비연으로서는 정말 태워도 그만이었다.

마공이라는 것이 양날의 검이 될 수 있기에.

익혀두면 좋겠지만, 만에 하나 지난번처럼 오해를 받게 되면 무림공적이 될 수도 있다.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

‘뭐, 너의 그 지조를 존중해 주지. 그럼 구천혈마검법은 이 세상에 없는 걸로. 너무 아쉬워하지 마. 이 세상에서 실전되는 무공이 이것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니.’

허어, 이 미친놈. 진짜 태워 버릴 작정이잖아?

극마는 혀를 내둘렀다.

뭐, 이렇게 말이 안 통하는 놈이 다 있는지.

화르르륵!

다시 적비연이 화기를 피워 올리자, 극마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좋다! 좋아! 멈춰라!

‘음? 날 주인으로 모시기로 마음먹은 건가?’

-일단 그 화기부터 없애고 말하자.

‘뭐, 정 원한다면.’

적비연이 다시 공력을 와해하자 손을 휘감던 뜨거운 기운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자, 이제 말해봐. 네 각오를.’

-끄음.

극마가 침음을 흘리더니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날 사부로 모시라는 말은 하지 않으마.

‘그건 당연한 거고.’

-끄응. 좋아, 동료로 하자. 이 정도면 나도 많이 양보했다! 천 살이나 차이나는 후학에게 대등한 동료를 제안한 거다!

‘너는 천 년 동안 봉인되어 있었을 뿐이고, 나는 수백 년의 기억을 가진 유일무이한 인간이야. 딱히 내가 덕을 보는 것도, 네가 손해를 보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이 망할 놈아! 그럼 어쩌자는 거냐!

‘말했잖아. 날 주인으로 모시…….’

-불가! 절대 불가!

‘그럼 태우고.’

화르륵.

-야, 야! 잠깐!

‘아, 왜 자꾸!’

적비연이 짜증스럽게 돌아보자, 극마가 안절부절못하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알, 알겠다. 네 말을 따르도록 하지.

‘호오? 그 말은 날 주인으로 모시겠다는 건가?’

-그, 그래. 널 주인으로 인정하마.

‘그럼 불러봐.’

-주, 주인…….

‘주인님.’

-차라리 날 소멸시켜라! 그건 절대 안 돼! 주인이면 됐지, 뭘 ‘님’ 자까지 붙이라고 지랄이야!

극마가 길길이 날뛰었다.

정말이지 구천혈마검법을 쥐고 협박해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니,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무인이라면 응당 상승무공을 익히고 싶어서 혈안이 되어 있어야 할 게 아닌가?

아니지. 모두가 같은 욕망을 가지고 있진 않을 터.

그래, 적비연은 자신보다 강함에 대한 집착이 적어서 그러리라.

아니면 뼛속까지 정도인이거나.

그래도 하는 짓을 보면 그렇진 않은 것 같은데…….

물론 적비연의 속내는 조금 달랐다.

그라고 왜 상승무공을 익히고 싶지 않겠는가?

다만 구천혈마검에 대한 극마의 집착을 좀 더 확실히 눈치챘을 뿐이다.

하긴 당대 최고의 무학을 반쪽만 익히다 말았으니 그 미련이 오죽하랴.

일단은 뭐, 이 정도로 넘어갈까?

적비연이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좋아. 그럼 구천혈마심법의 요결부터 알려줘. 그걸 다 듣고 나면 검법을 익히도록 하지. 구천혈마공을 익히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오의를 깨우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하지만 네놈…… 아니, 주인은 몇백 년의 기억을 가졌으니 남들보다 빨리 깨우칠 가능성이 크다. 그걸 감안하면…… 일 년 정도?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군.’

-뭣이? 천하절세의 심법은 평생을 들여서 익혀도 대성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일 년이 오래라고? 그것도 엄청 짧게 잡은 것이다!

‘난 타고난 자질이 있어.’

-보통 자기 입으로 그걸 말하나?

‘사실은 사실이니까. 그리고 네 말대로 난 수백 년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 보통 내 나이 때에는 가지지 못한 노회함이 있단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그 기억들 때문에 정사를 구분하지 않고 무공에 대한 이해도는 높아. 이왕이면 그보다 짧았으면 좋겠군. 뭐가 됐든 일단 익혀야겠지. 읊어봐. 그 구결.’

-흥! 잘난 척은! 딱 한 번만 읊어준다. 그러니 놓치지 말고 잘 들어라!

‘됐어. 관둬. 그렇게 까다로울 것 같으면 안 익히고 태워 버리…….’

-알았다! 알았어! 몇 번이고 읊어줄 테니 기억이나 잘 해라! 이 망할 주인아!

‘넌 좀 더 고분고분해질 필요가 있어.’

적비연이 씩 웃으며 생각을 전하자, 극마는 연신 콧김을 뿜으며 가슴을 두드렸다.

* * *

“날씨 참 좋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단휘가 고개를 꺾어 들고는 감탄을 터뜨렸다.

단휘와 예홍은 만검세가 가주전 안마당에 도착해 있었다.

오늘로 장사에 돌아온 지 정확히 열흘 째였다.

그리고 흑천련으로 떠나기로 계획한 날이기도 했다.

만검세가로 들어간 적비연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흑천련으로 출발하는 날짜를 열흘만 미루자고 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그동안 흑천련 쪽 지도를 구해서 지리를 파악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단휘와 예홍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적비연은 지금 강동칠괴의 기억 덕분에 흑천련 영역의 지리를 빠삭하게 알고 있을 테니까.

사실 강동칠괴는 강호 어디든 돌아다니며 온갖 돈 되는 의뢰는 다 도맡았던 자들이었기에 적비연이 모르는 지리는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단휘가 하늘을 올려다보는 예홍에게 물었다.

“무슨 생각해?”

“뭐, 그냥…… 죽기 딱 좋은 날씨라는 생각.”

‘역시 괜히 물었어.’

단휘가 내심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는 사이 임송화와 현청도 안마당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하 가주님은 아직 안 나오셨나요?”

“예, 저희도 기다리는 중입니다.”

단휘가 대답하자, 임송화가 팔짱을 끼며 볼멘소리를 했다.

“정말 너무 제멋대로네. 출발 날짜도 일방적으로 미루더니 이젠 지각까지. 이래서 사절단의 대표를 맡아도 될…….”

벌컥.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가주전 문이 열리면서 적비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돌아본 네 사람은 저마다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라고 딱 찍어서 설명하긴 어렵지만 분명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마치 대장간에서 벌겋게 익은 쇠날 같다고나 할까?

적비연의 전신에서 미묘한 아지랑이까지 피어올랐다.

분명한 건 이전의 적비연보다 훨씬 강해 보인다는 것.

네 사람의 머릿속에 같은 의문이 떠올랐다.

‘도대체 지난 열흘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런 네 사람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적비연이 입매를 치켜 올리며 말했다.

“그럼 갑시다. 이제 흑천련 지리는 이미 가본 것처럼 빠삭하게 알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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