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84화 (85/301)

84. 말은 씨가 되게 마련

적비연은 사절단을 이끌고 장사의 부두로 향했다.

우선은 육로보다는 배를 타고 이동하면서 최대한 체력을 비축해 둘 생각이었다.

부두에는 봇짐장수와 상인들, 표국 사람들 등으로 분주했다.

인파에 섞여서 어수선한 분위기를 둘러보니 단휘는 그제야 먼 길을 떠난다는 게 조금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배를 타고 이렇게 멀리 가보는 건 처음입니다.”

단휘가 조금 설레는 표정으로 말했다.

적진 깊숙한 곳에 들어가야 한다는 부담감은 있었지만, 당장은 모험을 앞두고 들뜬 기분이 더 컸다.

어쩌면 가주 적비연이 함께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적비연은 정말 많이 변한 것 같다.

무공 수준이 자신과 큰 차이가 나지 않았었는데, 언제 저렇게 강해졌을까?

비단 무공만 강해진 것 같진 않다.

사고의 깊이와 넓이가 달라졌다.

하긴 수백 년의 삶을 기억하고 있다면 자신은 상상도 하지 못할 노회함이 생길 수도 있으리라.

게다가 지난 열흘간 적비연은 또 다른 힘을 쌓은 게 틀림없다.

뭐라고 말로 표현하기 힘들지만 적비연은 뭔가 달라졌다.

그 다름이 지금 단휘에게는 무조건적인 신뢰로 다가온 것이다.

적비연이 한 번씩 달라질 때마다 기적 같은 일을 이루었으니까.

누가 알았겠나?

기울어져 가던 가문이 이렇게 빨리 모든 빚을 청산하고 무림맹에서도 떠받치는 문파로 거듭날 줄.

다만…….

‘갑자기 너무 많은 변화들이 한꺼번에 일어나니까 살짝 불안하긴 하단 말이지.’

아서라, 먼 길 떠나는 마당에 불길한 생각은 무슨!

좋은 생각만 하자, 좋은 생각만!

지금까지 무탈하게 잘해왔으니까.

사람은 긍정적으로 살아야지, 암!

그런 단휘의 눈에 저만치 뱃머리에 올라선 예홍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런.’

하필 긍정적으로 마음먹자마자 부정의 화신이 눈에 들어오다니!

단휘가 구시렁거리면서 얼른 반대편 뱃머리 쪽으로 걸어갔다.

한편 먼저 배에 올라섰던 예홍은 뱃머리에서 강 아래를 내려다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마침 그녀 곁으로 임송화가 다가왔다.

임송화는 그래도 예홍이 사절단으로 포함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예홍마저 없었더라면 일행 중에서 여자는 자기 혼자였을 테니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있었으리라.

임송화가 바로 곁에 다가온 것도 모르는지 예홍은 계속해서 강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상당히 예쁜 얼굴이네. 왠지 모르게 친해지기 어려운 성격 같지만.’

임송화가 예홍을 빤히 보며 생각했다.

아마 웃는 얼굴을 본 적이 없어서 그럴 것이다.

하지만 임송화는 사교성만큼은 자신 있었다.

그녀도 외모라면 어디 가서 빠지지 않을 정도는 됐고, 특유의 활달함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먼저 다가오기도 했다.

자, 그럼 친해져 볼까?

어차피 긴 여행이 될 텐데 마음 터놓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 한 명 생겨서 나쁠 건 없을 테니.

무엇보다 시종 시큰둥한 표정인 걸 보면 아마 그녀도 이번 작전에 투입되는 것에 불만이 많은 것이리라.

임송화가 짐짓 밝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안녕. 난 낙양문 임송화.”

“…….”

“벽력가문 예홍. 맞지?”

끄덕.

“몇 살? 내가 조금 더 많거나 비슷해 보이는데.”

그제야 예홍이 살짝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역시나 단답이었다.

“동갑.”

“아, 나랑 동갑?”

끄덕.

‘흐음. 진짜 친해지기 어려운 성격이네. 그나저나 나에 대해 조사는 좀 했나 보네. 나이도 아는 걸 보니.’

피식 웃어넘긴 임송화가 다시 말을 붙였다.

“우리 말 놓자? 어차피 나이도 같은데.”

“이미 말은 놓지 않았나?”

“뭐, 그렇지. 그런데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저 아래에 뭐가 있어?”

“없다.”

“그럼?”

“단지…… 어떻게 하면 고통스럽게 죽지 않을까, 하는 생각 중.”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배가 침몰하면 십중팔구 물에 빠져 죽을 테니까.”

임송화가 이맛살을 슬쩍 찌푸렸다.

“왜…… 배가 침몰하는데?”

“이유는 많다. 오래된 바닥이 삭아서 물이 샌다거나, 도적을 만나서 부서진다거나, 선장이 멍청해서 바위에 부딪친다거나, 폭풍을 만나서…….”

아니, 그러니까 그런 일이 왜 일어나냐고.

임송화는 배가 침몰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끝없이 늘어놓는 예홍을 보며 슬쩍 한 걸음 물러났다.

생각을 바꿨다.

이 애, 친해지기 어려운 부류가 아니라, 친해지고 싶지 않은 부류였어.

그렇게 천천히 뒷걸음질 치며 멀어지는 임송화였다.

* * *

장사를 떠난 배는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을 따라 유유히 흘러갔다.

언뜻 느려 보이지만 땅에서 말을 타고 달리는 것보다는 훨씬 빠른 속도였다.

해가 저물고 밤이 되었을 때, 현청은 쉬이 잠을 청하지 못하고 갑판으로 나왔다.

마침 저만치 적비연이 뱃머리 쪽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흐음. 아직도 안 주무시고? 아무래도 사절단을 이끄는 입장으로서 어깨가 무거울 테지.’

현청이 헛기침을 하고는 적비연에게 다가갔다.

“주무시지 않으십니까?”

“아, 잠시 생각할 게 있소.”

적비연이 뱃머리 쪽에서 눈을 떼지도 않은 채 말했다.

‘저쪽에 뭐가 있나?’

현청이 뱃머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마주쳐오는 바람만 시원하게 불 뿐이었다.

‘아무래도 마음의 짐이 무거운 모양이구나.’

현청은 내심 적비연에게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을 느꼈다.

하지만 사실 적비연이 잠을 자지 않는 것은 전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이것도 꽤 편한데?’

적비연은 지금 뱃머리에서 구천혈마검을 펼치는 극마의 모습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검을 쥘 수 없는 극마는 희미한 기운을 검의 모습으로 형상화했는데, 과연 마선의 경지에 오른 자답게 검세가 무척 섬세하면서도 패도적인 힘이 느껴졌다.

그야말로 경이롭다는 표현이 절로 떠오를 정도.

극마가 대단한 이유도 있었지만, 구천혈마검 자체가 대단하기도 했다.

마침내 검의 기운을 와해시킨 극마가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적비연을 돌아보았다.

-구천혈마공이 사성에 오른 너는 여기까지 펼칠 수 있을 거다. 이다음 초식은 오성에 이르러야 가능하다.

‘과연 왜 당대 최고의 검법이라고 하는지 알 만하네.’

-그래, 그런 검법을 주인 놈이 홀라당 태워먹을 뻔했지.

‘뭐, 그때는 몰랐으니까. 아무튼 빨리 다음 경지로 올라서야겠군.’

-서두르지 마라. 급히 먹는 밥이 체하는 법. 너는 지금도 내 예상을 깨고 엄청난 성과를 이뤘다.

진심이었다.

사실 적비연이 지난 열흘간 구천혈마심법을 익혀봐야 이 성에도 이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한데 적비연은 삼 성을 넘어 사 성까지 이뤘다.

정공과 사공을 제 것처럼 익힌 탓일까?

적비연은 마공에 대한 적응력도 무척 빨랐다.

덕분에 적비연의 몸에는 정사마의 기운이 모두 내재되어 있었다.

극마도 이런 경우는 처음 보았다.

다만 정공과 사공은 서로 성질을 바꿀 수 있었는데, 마공만큼은 변환이 불가능했다.

아마도 정공과 사공은 애초에 기억을 고스란히 흡수하면서 완벽하게 소화했을 것이고, 마공은 이제 막 익히기 시작하는 것이기에 출발점이 다르기 때문이리라.

또 하나 특이점은 마공을 익히고 나서 극마의 기운도 더 강해졌다는 것이다.

극마가 구천혈마검을 익혔기 때문이 아니다.

이미 그 전에 적비연이 구천혈마심법을 익히자마자 극마의 기운이 강해지기 시작했으니까.

적비연이 극마를 소환한 만큼 둘의 관계는 어느 정도 이어져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뭐, 오늘은 이쯤하고 내일은 오초식을 보여줘.’

-알겠다.

마침내 적비연이 몸을 돌렸다.

한편 곁에서 계속 적비연을 살피던 현청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꼬박 반 시진을 꼼짝도 하지 않고 생각에만 잠기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을 그리 하셨을까?

아마도 앞으로의 계획이리라.

단단히 오해한 현청이 적비연에게 포권하며 말했다.

“하 형의 깊은 고뇌를 다 이해할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혹여 마음을 어지럽히는 문제가 있다면 소제에게도 말씀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미약하나마 힘을 보태어 마음의 짐을 덜어드리고 싶습니다.”

“음? 아직도 여기 계셨소?”

아아, 얼마나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으면…….

역시나 오해한 현청이 진심 어린 존경의 눈빛으로 적비연을 보았다.

“예, 잠이 오지 않아서 바람 좀 쐬러 나와 보았더니…….”

“아, 그럼 바람 좀 쐬시오. 시원하니 좋더이다. 나는 이만 들어가 보겠소.”

“혹여 신경 쓰이는 문제라도 있다면…….”

“아니, 그런 건 아니오. 문제 될 건 없소.”

적비연이 손을 저으며 걸어가자 현청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연신 감탄했다.

그가 화산 쪽 하늘을 올려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사부님, 세상은 넓고 어진 사람은 너무나 많습니다. 제자가 심히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모든 짐을 홀로 짊어지겠다는 저 책임감…… 제자의 도량이 아직 한참 부족하다는 걸 새삼 느낍니다.”

바람이 불었다.

그렇게 각자의 생각에 빠진 사람들을 싣고 배는 부지런히 북동쪽으로 나아갔다.

* * *

극마가 시범을 보여주고, 적비연이 심상 수련으로 연결하는 방법은 생각보다 좋은 효과를 가져왔다.

일단 장소의 구애를 받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편했다.

사람이 바글바글한 곳이라도 극마는 적비연 앞에서 구천혈마검을 펼쳐 보였다.

물론 그 모습이 적비연에게만 보이니 전혀 문제 될 건 없었다.

게다가 모종의 기운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인지, 극마가 펼치는 검법을 뚫어지게 보고 있노라면 마치 직접 검술을 펼치는 듯한 감각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 매일 심상수련을 거듭하며 배를 타고 이동하다가 마침내 무혈현(武穴縣)에 다다랐을 때였다.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우르르 내리기 시작했다.

하선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허리춤에 칼을 찬 무인들이었다.

상당수의 무인들이 하선하고 나자 선상에는 봇짐장수를 비롯한 상인들만 소규모로 남게 됐다.

단휘가 긴장한 듯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종점이군요.”

“그런 셈이지.”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배는 더 나아간다.

하지만 적어도 정도 무림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에겐 이곳이 종점이다.

여기서 뱃길을 따라 몇 리만 더 나아가면 안휘와 강서의 경계로 흘러들어가게 되고, 거기부터는 사파의 영역이 된다.

물론 현 무림사절단은 공식 방문에 해당했으므로 아무리 사파 무인이라도 다짜고짜 칼부터 뽑아 들고 덤벼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흑천련의 율법에 구애되지 않는 사파인들이 있다.

표면적으로는 사파에 속하지만, 실제론 정사 어디에서도 함부로 다루지 못하는 독립적인 조직.

바로 장강수로십팔채(長江水路十八寨)다.

물 위에서만큼은 두려울 것이 없는 자들.

원래 동정호에 총채를 두고 있었으나, 호남성이 무림맹 영역이 되면서 자연스레 동쪽으로 밀려났다.

물 위에서만큼은 두려울 것이 없지만, 그들 역시 아예 땅을 밟지 않고서는 살 수 없기에.

특히 장사에 터를 둔 벽력적가와 만검세가는 당시 동정호에서 수로십팔채를 밀어내는 데 큰 공을 세운 가문이었다.

그런 만큼 수로십팔채가 두 가문에 가진 원한은 상상 이상이었다.

“설마 수로십팔채와 마주치진 않겠죠?”

단휘의 말에 예홍이 무심하게 대꾸했다.

“마주칠걸? 그때 넌 죽을지도.”

“너 언제 옆에 온 거냐?”

“그래도 한솥밥 먹은 식구니까 네가 물고기 밥이 되면 생선은 끊도록 하지.”

순간 단휘가 발끈했지만 곧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아, 무시하자. 무시.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지금껏 악운은 피해가는 편이었잖아?’

하지만 단휘는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그 악운이 이번만큼은 비껴가지 않는다는 것을.

그렇게 적비연 일행을 태운 배는 악운을 향해 조금씩 다가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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