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85화 (86/301)

85. 말은 씨가 되게 마련

장강의 도도한 물결을 따라 배는 부지런히 나아갔다.

해가 저물고 밤이 깊었을 무렵, 적비연은 여전히 심상수련에 열중하다가 문득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네가 펼치는 검술을 보는 것도 도움이 되지만 누군가와 비무하는 모습을 본다면 더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러려면 그 몸을 나한테 양보해야지. 내가 그 몸을 차지하면 아무라도 베어 버리는 모습을 보여 주지.

극마의 말에 적비연이 피식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네가 육신을 차지하면 다시 물러나려고 하지 않겠지.’

-흥! 주인 놈이 눈치는 빠르구나.

‘뭐, 일단은 그조차도 내 의지로 가능한 게 아냐. 그것보다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어.’

-무슨 말이냐?

적비연이 대답대신 선실로 들어가 누군가를 데리고 나왔다.

단휘였다.

“야밤에 무슨 일입니까? 가주님.”

단휘가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싶어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적비연이 갑판 한쪽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네 무공이 얼마나 늘어났는지 확인해보려고. 앞으로 사파의 영역에 들어서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으니 최종점검이라고 생각해.”

“아, 알겠습니다!”

단휘가 기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그는 적비연의 성장을 보면서 내심 부러워하고 있었다.

애초에 가주가 무공에 뛰어난 재능이 있긴 했지만, 자신과 그 차이가 크진 않았다.

한데 최근 적비연의 성장세는 무서울 정도였다.

물론 적비연이 여러 명의 몸에 빙의하면서 그 기억을 흡수한 덕분에 성장이 수월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다만 그 과정에서 깨달은 비결 같은 게 있다면, 한 수 배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터였다.

그런데 이렇게 직접 봐주겠다고 하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어떤 검법을 펼칠까요?”

“벽력검법(霹靂劍法).”

단휘가 잠깐 흠칫했다가 곧 포권했다.

“알겠습니다.”

벽력검법은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벽력적가의 정체성이나 다름없는 검법이었다.

그런 만큼 가문절기 중에서도 가장 고절한 무공이었다.

벽력적가가 처음 무가를 세웠을 때는 벽력검법을 가주만 익힐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적비연의 아버지 적금산은 그 전례를 깨버리고 가문의 모든 무인이 익힐 수 있도록 했다.

-왜 그런 거냐?

극마의 물음에 적비연이 대꾸했다.

‘글쎄. 배신이 두려워서 강한 무공을 혼자 독차지하려는 마음 자체가 이미 지고 들어가는 것이라나?’

-호오. 주인의 아버지는 의외로 깊은 생각을 가졌군.

‘의외라는 건 무슨 뜻이야?’

적비연이 날 선 표정으로 대꾸하자 극마가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단휘가 갑판 가장자리로 걸어가 이쪽을 돌아보며 섰다.

혹여 갑판으로 누군가 나오면 언제든지 검을 거두기 위해서 방향을 선실 쪽으로 잡은 것이다.

극마가 팔짱을 낀 채 단휘를 보며 중얼거렸다.

-어디 한번 주인 가문의 절기를 볼까?

‘붙어.’

-뭐라고?

극마가 눈살을 찌푸리고는 적비연을 돌아보았다.

적비연이 단휘를 보며 일렀다.

‘단 대주와 붙어보라고. 벽력검법과 구천혈마검이 맞붙는 모습을 보고 싶다.’

-재미있는 생각이라는 게 그거였냐?

‘왜? 쫄려?’

-하! 본좌를 뭐로 보는 것이냐!

‘그럼 어서 해봐.’

-흥! 가소롭군.

극마가 투덜거리면서도 천천히 걸어가더니 단휘와 마주 섰다.

꽤 흥미진진한 구도였다.

만약 단휘의 눈에 저 덩치 큰 극마가 보였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아마 길길이 날뛰었겠지.

하지만 지금 단휘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단휘가 적비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휘는 천천히 검을 뽑아 들고는 기수식을 취했다.

벽력검법은 구천혈마검법과 마찬가지로 모두 아홉 초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에서도 첫 번째 초식, 뇌운섬광(雷雲閃光)이 펼쳐졌다.

타닷!

쒸이이잇!

순식간에 바람처럼 달려드는 단휘를 보며 극마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호오.

그야말로 단휘는 번쩍하는 사이에 목전에 다다라 있었다.

단휘가 뻗어내는 것이 검이 아니라 마치 화살 같았다.

극마가 재빨리 보법을 밟으며 몸을 비틀자 단휘의 검이 아슬아슬하게 극마의 가슴 앞섶을 스쳐 지나갔다.

정말이지 머리카락 한 올 차이였다.

물론 극마는 유체인 만큼 몸을 비틀지 않아도 검상을 당할 일은 없었다.

하지만 적비연이 원하는 건 제대로 된 비무였다.

그런 만큼 극마도 실전이라 생각하며 단휘를 상대하고 있었다.

파밧!

극마가 구천혈마검법의 일환인 구천활보(九天闊步)를 펼치며 순식간에 옆으로 이동하더니 그대로 구천혈마검법의 제이 초식 구천단혼전(九天斷魂電)을 펼쳐 보였다.

쒸아아아앙!

극마가 만들어낸 유형의 기운이 날카롭게 뻗어 나가며 단휘의 목을 단숨에 베어냈다.

한편 뇌운섬광을 펼쳤던 단휘는 눈을 부릅뜨고는 멈칫했다.

‘아…… 조금 전…… 뭐지?’

아주 잠깐이었지만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저도 모르게 팔뚝을 따라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지금까지 벽력검법을 펼치면서 이런 기분이 든 건 처음이었다.

설마 가주님이……?

단휘가 돌아보자 적비연이 모르쇠하며 물었다.

“왜 그래?”

“아, 아닙니다.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이상한 기분?”

“뭔가…… 기분 나쁜……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아니. 그만 봐도 될 것 같다.”

“예? 혹시 화나신…… 겁니까? 제대로 집중해서 다시 해보겠습니다!”

“그런 것 아냐. 단지 생각해 볼 게 좀 있어서 그래.”

고개를 갸웃거리는 단휘를 보며 적비연이 내심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차이가 날 줄이야.

그래도 벽력검법은 벽력적가를 명문가문으로 만든 고절한 무공이었는데.

단 일검에 당하다니.

물론, 단휘는 극마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제대로 된 비무라고 할 순 없다.

하지만 그런 걸 감안하더라도 너무 허무하게 끝났다.

만약 단휘가 극마를 볼 수 있었다고 해도 결과는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막상 가문절기가 마공보다 못한 것을 보니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확실히 차원이 다르군.’

-크하하. 그걸 이제 알았냐? 애송이 주인아.

‘너 말이야. 계속 호칭만 주인으로 붙일 뿐이고 계속 예우를 갖추지 않네. 자꾸 이러면 소멸시킬 방법부터 알아보고…….’

-쳇, 말실수였다.

‘말실수가 너무 구체적이잖아.’

-주의…… 하겠다.

‘흐음. 네가 보기에 어때? 조금 전 초식에서 뭐가 문제였지?’

-그야 뻔하지. 초식명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전 저 애송이가 펼친 검초는 빠른 속도가 생명이었다. 한데 보법이 그 검초의 절기를 따라가지 못한다. 그러니 모든 검공이 반의반 박자 느려질 수밖에 없지.

‘과연.’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뇌운섬광은 초식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빠른 속도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벽력검법의 모든 초식이 빠르고 절도 있는 편이지만, 첫 초식인 뇌운섬광만큼은 속도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데 보법이 따라가지 못한다라…….

섬전보로는 한계가 있다는 뜻.

섬전보도 빠르기가 특기인 보법인데, 그보다 더 빨라야 한단 말이다.

‘만약 섬검보를 쓴다면 어떨까?’

-흐음. 조금은 더 나아질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역시 모자랄 거다.

‘그럼 구천활보는?’

그러자 극마가 흠칫거리고는 적비연을 돌아보았다.

-모름지기 명문정파의 검법에 마공인 구천활보를 섞겠다는 건가?

‘안 될 이유라도 있나? 내공심법도 아니고, 보법이라면 더 나은 걸 써먹어도 상관없지.’

-하여튼 너란 주인은 정말 웃긴 놈이군. 보통의 인간이라면 상상조차 하지 못할 텐데.

‘돼? 안 돼? 그것만 말해봐.’

-흐음.

극마가 잠시 침음을 흘리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속도는 대략 따라갈 수 있겠지. 하지만 구천활보와 저 검법이 따로 놀 게다. 그러니 무용지물이지.

‘그렇군. 구천활보를 좀 더 연구해 볼 필요가 있겠네.’

-설마 구천활보를 응용해서 새로운 보법이라도 만들 생각인가?

‘안 될 건 없잖아?’

-그렇긴 하다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천 년을 존재한 자신도 새로운 무공 창안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한데 저 새파란 애송이가…….

하긴 저 녀석에겐 보통 인간의 삶을 뛰어넘는 기억이 있지.

수백 년의 삶.

하긴 그 정도의 삶을 살아간다면 무공에 대한 이해도가 남다를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삶을 각각 다른 사람의 몸으로 겪은 것이 아닌가?

하면 현 시대의 무공에 대한 이해도는 천 년을 존재한 자신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을 지도 모른다.

같은 시대를 반복적으로 수백 년을 산 것이나 다름없다.

그것도 각각 다른 자의 시선으로.

그렇게 따져보면 자신은 천 년 동안 말 그대로 존재했을 뿐이지, 시간을 ‘겪은’ 것은 아니니까.

-어쩌면…… 주인은 해낼지도 모르겠군.

처음으로 인정했다.

적비연이 보통 인간과 다르다는 것을.

한편 검초를 고작 일초식만 펼쳐 보인 단휘는 시시각각 표정이 변하는 적비연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무슨 생각을 저리 하시는 거지? 내 검법이 그 정도로 형편없었나?’

하긴, 수많은 삶을 반복적으로 산 것이나 다름없는 적비연이다.

그가 이해하는 수준으로 볼 때 빈틈투성이리라.

“가주님. 저어…… 그럼 부족한 점만이라도…….”

“네가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야. 좀 더 생각해 보고 알려줄게.”

“알겠습니다.”

단휘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 * *

적비연이 탄 배는 이제 안휘성으로 완전히 들어서서 안경(安慶)을 지나고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배에서 내릴 동릉현(銅陵縣)이 나타날 터였다.

“다행히 장강은 무사히 벗어날 수 있겠네요.”

단휘의 말에 옆에 선 예홍이 불쑥 끼어들었다.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지. 부두에 정박한 다음 장강에서 일 리 이상 떨어지기 전까지는 방심하지 마.”

“아이고, 어련하시겠어요?”

단휘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빈정거렸다.

하지만 적비연도 예홍과 별로 다르지 않은 생각이었다.

적어도 부두에 정박할 때까지는 긴장을 풀어선 안 된다.

과거에는 수로십팔채라고 해봐야 겨우 수적 떼에 지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최근 수로십팔채는 격이 다르다.

오 년 전 새로 부임한 총채주 수황(水皇) 무자강(武滋剛).

무림맹주와 흑천련주도 물 위에서만큼은 수황 앞에서 겸손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 떠돌 정도다.

어느 정도 부풀어진 소문일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그런데 한 시진 정도 더 나아갔을 때였다.

빠른 속도로 달리던 배가 조금씩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적비연 일행은 갑판으로 올라와 상황을 살폈다.

“무슨 일이죠?”

단휘의 물음에 예홍이 까칠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말했잖아.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고. 네놈이 설레발을 치는 바람에 최악의 상태가 되어버렸어.”

예홍의 눈이 저만치에서 다가오는 배 한 척을 가리켰다.

비교적 작은 크기의 배였는데 무척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단휘의 눈동자가 커졌다.

“수, 수로십팔채잖아. 젠장! 역시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네가 번번이 재수 없는 소리만 하니까 말이 씨가 됐잖아!”

“흥! 네놈의 설레발 때문에 부정을 탄 거겠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네 재수 없는 그 입방정 때문에…….”

“다들 조용!”

적비연이 나서자 그제야 두 사람이 입을 다물었다.

현청도 조금 심각한 표정이 되어서는 적비연에게 다가왔다.

“어쩌죠? 아무래도 이 배를 노리는 것 같습니다.”

“일단 부딪치는 수밖에 없소. 혹시라도 무림맹을 상징하는 게 있다면 철저히 감추시오. 다들 환복은 하셨소?”

“예, 물론입니다.”

“최대한 사파처럼 보이도록 입었어요.”

임송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파처럼 보이는 의상이 무엇인지 딱 집어 말하기는 애매하지만, 그녀의 의상은 확실히 사파처럼 보였다.

어두운 색감에 핏자국 같은 얼룩이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마침 수적들이 탄 작은 배가 가까이 다가오자, 무인 십여 명이 일제히 수면을 박차며 큰 배 위로 솟구쳐 올라왔다.

과연 장강의 수귀(水鬼)라는 별명답게 모두들 물 위에서 날렵한 모습을 보였다.

처처척!

갑판 위로 올라선 무인들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사람들을 훑었다.

몇몇 상인들은 두려움에 떨며 그들의 눈을 피했다.

‘저자는…… 하필 수혼단주(水魂團主) 동추추(董鄒鄒)군.’

적비연이 상대의 우두머리를 바로 알아보았다.

정사막론하고 돌아다닌 강동칠괴의 기억 덕분이었다.

수혼단은 수로십팔채 총채주의 직속 조직이었다.

무려 초절정 삼 단에 이른 자.

마침 동추추의 눈이 적비연과 정확히 마주쳤다.

그 순간 동추추가 눈살을 찌푸렸다.

‘쳇, 그냥 넘어가긴 틀린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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