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86화 (87/301)

86. 말은 씨가 되게 마련

눈살을 잔뜩 구긴 동추추가 이상한 낌새를 챈 것인지 적비연에게 성큼 걸어왔다.

적비연이 얼른 시선을 돌렸지만 동추추는 적비연에게 곧장 다가오고 있었다.

‘낭패군.’

-뭘 그리 쫄고 그러냐?

‘동추추는 초절정 삼 단에 이르는 고수야. 게다가 그가 이끄는 수혼단의 부단주 역시 초절정에 이른 고수지. 그리고 각 대주들이 전부 절정의 끝자락이야.’

만약 이곳에서 칼부림이라도 일어난다면 백전필패다.

미리 단언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게 현실이다.

절정에만 이르러도 한 단의 차이가 큰데, 초절정의 영역에서는 말해 뭐하랴.

게다가 여긴 선상이다.

물 위에서만큼은 절대로 싸움을 피해야 한다.

여차하면 달아날 수도 없다.

이러니 식은땀이 날 수밖에.

-아무리 그래도 흑천련으로 가는 공식 사절단을 마음대로 건드려도 되는 거냐?

‘말했잖아. 이놈들에게는 정사가 무관하다. 적어도 물 위에서만큼은.’

-흐음. 한마디로 엿 같은 상황이라는 거군.

적비연은 부정하지 않았다.

정말이지 마른침이 꼴깍 넘어갔다.

날카로운 인상의 동추추가 적비연에게 거의 다다랐을 때였다.

마침 노선장이 불쑥 나타나더니 그 앞을 막아서며 말을 걸었다.

“아이고, 동 단주님. 오랜만이십니다.”

“으음? 아, 난 또 누구시라고. 황씨 영감이었군. 요즘은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소?”

“덕분에 굶지는 않습니다요.”

“허허, 무슨 엄살을 그리 떠시오? 누가 보면 우리가 다 약탈하는 줄 알겠소?”

“그럴 리가요. 그래도 사정을 많이 봐주시는 덕분에 그럭저럭 입에 풀칠은 하고 있습지요.”

“뭐, 그렇다면 다행이오. 혹시 어려운 일 있으면 언제든 우리에게 알려주시오.”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그리고 여기…….”

노선장이 품에서 돈주머니를 꺼내 건네주었다.

일종의 통행세였다.

제법 묵직한 돈주머니를 받아 든 동추추가 희미한 웃음을 머금고는 노선장의 어깨를 두드렸다.

“늘 이렇게 알아서 챙겨줘서 고맙소.”

“별말씀을요. 신세 지는 것에 대한 보답이지요.”

노선장이 넉살 좋게 대꾸했다.

한편 이 과정을 가만히 지켜보던 단휘는 표정이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서로 좋은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이건 엄연한 노략질이 아닌가?

게다가 저 돈주머니는 꽤 무거워 보인다.

모르긴 해도 어지간한 민초들이 최소 몇 달은 일해야 벌 수 있을 정도의 금액으로 보인다.

[안휘성으로 들어서면서 왜 뱃삯이 비싸지는가 했더니 저런 이유였군요.]

[통행료를 내지 않았다간 다 잃는 수가 생기니까.]

적비연의 대답에 단휘가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그가 무공을 익히기 시작한 이유는 정의롭지 못한 인간들을 혼내주기 위해서였다.

한데 지금 불의가 눈앞에 버젓이 보이고 있음에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다니.

그런 자신이 한심하고 이런 상황에 은근한 분노마저 일어났다.

그런 단휘의 감정을 눈치챈 것인지 적비연이 전음을 보냈다.

[참아라. 대의를 위해서는 작은 일에 참을 줄 알아야 한다. 한순간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서 큰일을 그르치면 후회로 끝나지 않는다.]

[대의가 무엇입니까?]

[글쎄. 나도 몰라.]

적비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라고요?]

단휘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적비연을 돌아보았다.

뭐라도 그럴싸한 대답이라도 나오길 바랐다.

그럼 대충 수긍하는 척이라도 했을 거다.

그게 아니면 한 번 더 따져볼 생각이었다.

물론 적비연에게 따진다고 이 부당한 상황이 해결되진 않겠지만, 일종의 투덜거림이었다.

그래야만 속이라도 편할 것 같아서.

한데 모른다니.

눈을 멀뚱멀뚱 뜬 단휘를 보고는 적비연이 전음으로 말했다.

[그런 큰 뜻. 나도 잘 모르겠다. 수백 년의 삶을 겪다 보니 더 모르겠다. 다만…….]

[다만?]

[지금 이게 작은 일이라는 건 알겠다.]

[아…….]

묘하게 설득되는 말에 단휘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대의가 뭔지는 몰라도 일단 이 일이 우리 인생사에서 작은 일부라는 건 사실이다.

여기서 자신이 발끈해 봐야 해결될 건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일행이 곤란에 빠지고 만다.

그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 저 황씨 영감에게 돈도 더 주지 않았던가?

사절단은 황씨 영감에게 대략의 사정을 말한 후 뱃삯을 세 배 가까이 지불했다.

그렇잖아도 비싼 뱃삯을!

‘뭐, 추후 전부 무림맹에 청구할 돈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그러지 않았다면 애초에 황씨 영감이 무혈현에서 사절단 모두 하선시켰을지도 몰랐다.

만에 하나 선상에서 난동이라도 벌어지면 손실이 배가 되기 때문이다.

현재 배에 탄 선객은 대략 서른 명.

대부분 정사지간의 표국 사람들이거나 봇짐장수와 같은 상인들이었다.

다행히 황씨 영감과 동추추의 이야기는 잘 되어가는 듯했다.

한참이나 껄껄 웃던 동추추가 황씨 영감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는 돌아섰다.

“좋소. 그럼 고생하시오. 언제 시간 되면 술이나 한잔합시다.”

“좋습지요. 제가 좋은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하하, 아니오. 그땐 내가 한잔 사겠소.”

“아이고, 그럼 영광이지요.”

어차피 말뿐인 인사라는 것을 아는 황씨 영감이 굽실거리며 대꾸했다.

동추추는 손을 한 번 들어 보이고는 몸을 돌렸다.

그가 막 난간 위로 올라서려고 할 때였다.

사고는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이놈! 동추추! 드디어 만났구나!”

갑자기 느닷없는 고함 소리가 들리더니 젊은 표사 한 명이 후다닥 뛰어가는 것이 아닌가?

모두가 깜짝 놀라 시선을 옮기는 사이, 젊은 표사는 동추추의 등을 향해 검을 내지르고 있었다.

정말이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동추추는 초절정고수였다.

그에 반해 젊은 표사는 일류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검봉이 동추추의 등을 찌르기 전,

휘리릭!

동추추가 팽이처럼 몸을 회전하더니 품으로 파고드는 검신을 도신으로 쳐냈다.

스까앙!

“큿!”

검을 놓친 젊은 표사가 중심을 잃고 밀려났다.

그러는 사이 허공으로 튕겨진 검이 한참을 회전하더니 갑판 바닥에 푹 꽂혔다.

그와 동시에 동추추의 도신도 젊은 표사의 가슴을 갈랐다.

촤아악!

“끄아악!”

가슴이 한 자 이상이나 갈라진 젊은 표사가 신음을 흘리며 울컥 피를 토해냈다.

이 모든 일이 눈 깜빡할 사이에 일어났다.

너무나 갑자기 벌어진 일이라 선상의 모든 이들이 입을 딱 벌린 채 어쩔 줄을 몰랐다.

특히 젊은 표사가 속한 표국 사람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표정으로만 보면 그들 역시 이 일을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적비연이 미간을 잔뜩 찡그리고 생각하는데, 극마가 툴툴 웃었다.

-클클. 원래 강호의 은원은 거미줄보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법. 보아하니 저 젊은 표사 놈이 제 복수를 위해서 표국에 들어왔다가 오늘 원수를 만난 모양이군. 한데 복수는커녕 제 목숨도 잃게 생겼군.

적비연도 극마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다만 왜 하필 지금이냐는 것이다.

재수가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동추추가 얼음처럼 차가운 눈초리로 젊은 표사를 노려보았다.

“너, 뭐냐?”

“동추추……! 아버지의 원한을 갚…… 쿠웨엑!”

말을 뱉던 표사가 한차례 피를 토해냈다.

동추추가 여전히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놈이 복수라도 하려고 한 건가?”

그가 발로 찢어진 가슴을 꾹 누르자 표사가 자지러질 듯 비명을 내질렀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현청이 성큼 나서려는데,

[나서지 마시오!]

[하 대협! 하지만……!]

[지금 나서봐야 해결될 건 없소. 어차피 저 정도의 상처라면 살기 어렵소. 참으시오.]

[끄음. 알겠습니다.]

현청이 마지못해 대꾸하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한참이나 꺽꺽거리며 신음을 흘리던 젊은 표사는 이윽고 입에 거품을 물더니 눈을 허옇게 까뒤집은 채 절명하고 말았다.

“이거 치워라.”

“존명!”

동추추의 말에 수하 두 명이 젊은 표사의 시체를 배 난간 밖으로 던져 버렸다.

동추추가 선내를 뱀 같은 눈길로 훑었다.

그가 젊은 표사가 소속되었던 표국 사람들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들은 장수표국(藏守鏢局) 소속이었다.

동추추가 앞에 멈춰 서자 표두로 보이는 자가 그 자리에서 무릎을 털썩 꿇으며 포권했다.

“장수표국을 대표해서 대협께 사죄드립니다! 오늘 일은 상부에 보고하여 서운하지 않도록 배상하겠습니다!”

“병 주고 약 주겠다는 건가?”

“죄송합니다! 단언컨대 오늘 일은 그 표사의 독단적인 행동이었습니다. 하나 표사 관리에 소홀한 점에 책임을 느끼는 바, 반드시 배상토록 하겠습니다!”

빠악!

“커억!”

동추추가 주먹으로 표두의 머리를 날렸다.

한참이나 굴러간 표두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는 엉금엉금 기어왔다.

동추추가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계산 제대로 해야 할 거다. 그리고 그 의지는 지금 보여야 할 것이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표두가 품에서 묵직한 돈주머니를 꺼내 내밀었다.

동추추의 수하가 얼른 다가와 그것을 챙겼다.

마침 노선장이 동추추에게 다가오며 손을 맞비볐다.

“이거 참,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 송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뭐라고 사죄를 드려야 할지…….”

“영감이 사죄할 일은 아니오. 다만 기분이 몹시 나쁘군.”

동추추가 선객들을 하나하나 훑으면서 말을 이었다.

“이 중 또 누가 내 모가지를 노리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감히 누가 동 대협을 위협하겠습니까? 아까 그 녀석 혼자 미쳐서 설쳐대다가 대가를 치른 것이지요. 이제 그만 노여움을 푸시고…….”

“영감은 목숨을 위협받고도 그리 쉽게 기분을 풀 수 있나?”

“그건…….”

노선장이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동추추가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이제 선객들은 괜히 죄라도 지은 사람들처럼 잔뜩 긴장한 채 동추추의 눈치만 살폈다.

동추추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선객들을 하나하나 뜯어보다시피 살폈다.

마침내 그가 적비연 일행 앞으로 다가왔다.

단휘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확실히 동추추의 기도는 남달랐다.

그냥 마주 서 있는 것만으로도 오싹한 사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화가 난 동추추가 기운을 갈무리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동추추가 적비연 일행을 한차례 훑어보더니 단휘의 등에 맨 상자를 보고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보아하니 상인은 아닌 것 같고, 무인인 듯한데. 그 상자에는 뭐가 들었나?”

적비연 일행 모두 바짝 긴장했다.

단휘가 든 목곽 상자에는 만소걸과 장문탁의 수급이 들어 있었다.

특별히 약품 처리를 해서 썩지 않도록 보관되어 있었다.

만약 목곽 상자를 열어서 그 둘의 머리통이 떡하니 나오는 날엔 무림맹 사절단이라는 게 들통날 수밖에 없으리라.

단휘가 어렵사리 대답했다.

“사형의 유골이오.”

“유골?”

동추추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단휘를 보았다.

단휘는 마른침을 삼켰다.

‘제발 그냥 좀 넘어가라.’

하지만 단휘의 간절한 바람은 이번에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열어봐.”

“뭐요?”

“내 말 안 들리나? 열어보라고.”

“어찌 이러시는 거요? 사형을 욕보일 생각이오?”

“누가 욕보인다고 했나? 그냥 좀 보자고 했을 뿐.”

“그럴 순 없소!”

그러자 동추추의 눈이 다시 한번 매섭게 빛났다.

“내가 이곳으로 오기 전에 한 가지 소식을 들었지. 무림맹 사절단이 흑천련으로 향한다고. 거기에는 본채의 원수인 벽력적가와 만검세가 나부랭이들이 섞였다더군. 인원수는 정확히 다섯 명. 이거 우연의 일치가 아닌가?”

동추추가 차갑게 미소 지으면서 사절단을 훑어보았다.

그러자 그의 수하들이 일제히 주변을 포위하며 검을 뽑아 들었다.

차차차앙!

그들 모두 대주급 이상이었기에 숨 막힐 듯한 살기가 쏟아졌다.

동추추가 희미하게 입매를 말아 올리고는 물었다.

“왜? 혹시 그 상자에 흑천련 살수의 머리통이라도 들었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