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87화 (88/301)

87. 장강의 수귀(水鬼)들

노선장의 눈빛에 후회가 스며들었다.

니미럴!

이럴 줄 알았다.

어쩐지 저들을 태울 때부터 뒷골이 서늘하다 싶었다.

이 나이가 들면 육감을 믿어야 하는데.

아직도 철부지처럼 눈앞에 내미는 돈을 보고 욕심을 부렸다.

그래도 운이 좋다면, 아니, 설사 운이 나쁘더라도 요령껏 잘 대처한다면 이런 사달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

그래도 장강에서 배를 몬 게 장장 삼십 년이 넘지 않았던가?

거짓말 좀 보태서 물 냄새만 맡아도 오늘 일어날 일은 훤히 내다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방심하고 말았다.

하필이면…… 하필이면 동추추를 만날 줄이야.

수혼단주 동추추는 수로십팔채에서도 유독 성격이 지랄 맞기로 소문 난 자였다.

오죽하면 장강의 미친 물고기라고 불릴까?

만약 무림맹 사절단의 정체가 발각되면 선상에서 한바탕 혈풍이 불리라.

그땐 배가 온전하길 기대하기 어려우리라.

지금껏 살면서 무인들이 선상에서 싸우는 걸 열 번도 넘게 봤다.

난간이 부서지고 갑판이 주저앉고, 선실은 엉망진창이 되고 만다.

그만하면 그래도 다행이다.

재수가 없으면 배가 침몰할 수도 있다.

니미럴, 니미럴, 니미럴…….

노선장이 연신 욕지거리를 곱씹는 동안 선객들은 모두 단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하고 있어? 열어보라니까.”

동추추의 목소리가 몸서리쳐지도록 차갑게만 느껴졌다.

단휘는 어쩔 줄을 몰랐다.

‘어쩌지? 어떻게 해야 하지?’

그렇다고 목석처럼 서 있다간 손도 써보기 전에 놈들이 살수를 뻗어올 것이다.

아주 천천히 어깨에서 상자를 내렸다.

모두의 시선이 상자를 따라 이동했다.

지금이라도 선공을 해야 하나?

만약 상자에 든 머리통이 공개되었다간 싸움을 면치 못하리라.

그리고 장강 복판에서 벌어지는 싸움의 결과는…….

‘필패다.’

정말이지 미칠 노릇이다.

상대는 초절정고수.

설혹 이 자리에 무림맹주가 있었다고 해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

“빨리 열어!”

동추추가 버럭 고함을 내지르자 단휘가 저도 모르게 움찔 떨었다.

마침내 보자기를 완전히 풀어 버린 단휘가 덮개로 손을 가져갔다.

에라, 모르겠다!

단휘가 덮개를 열려는 순간이었다.

“그만하시오.”

묵직한 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모두의 시선이 목소리의 주인에게 향했다.

말을 뱉은 사람은 바로 적비연이었다.

동추추가 눈살을 찌푸렸다.

“뭐라?”

“상자 안에는 사형의 유골이 들어 있소. 우린 사형의 고향으로 돌아가 장례를 치를 예정이오. 그러니 더 이상 사형을 욕보이는 짓은 삼가주시오.”

동추추의 입매가 치켜 올라갔다.

이를 지켜보던 노선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끝났구나. 오히려 저 미친 물고기의 성질을 건드려 버렸어.’

그는 내심 포기했다.

대신 어떻게 하면 손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라면 차라리 무림맹 사절단이 일격에 전멸해 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테니.

‘하지만 저들도 그냥 당하지만은 않을 테고. 여기저기 난장이 되어서 부서지겠구먼.’

한편 동추추가 적비연에게 저벅저벅 다가갔다.

“다시 말해봐라. 뭐라고 했나?”

“더 이상 사형을 욕보이는 짓은 삼가달라고 했소.”

“뒈진 사형과 의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다니. 용기가 가상하군. 이왕 의리를 지킬 거면 이곳에서 함께 사형의 뒤를 따르는 게 어떻겠나? 장례는 내가 잘 치러주지.”

동추추가 살기를 쏘아냈다.

후우우웅!

살이 따갑도록 뜨거운 기운이 적비연의 전신을 덮쳐왔다.

과연 초절정 삼 단에 이른 고수다웠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

그때 적비연의 입에서 이해하기 힘든 말이 튀어나왔다.

“장강의 금어(禁漁)를 낚을 생각이오?”

“뭣이?”

이번에는 동추추가 흠칫거리더니 낯빛이 딱딱하게 굳었다.

조금 전 적비연이 내뱉은 말은 명백한 암어의 일종이었다.

적비연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고는 전음을 보냈다.

[자하(紫霞)에 물든 장강의 금리어(金鲤鱼)를 낚을 자가 누구요?]

“……!”

동추추가 주춤거리며 한 걸음 물러났다.

그 묘한 반응에 노선장의 눈빛에도 이채가 서렸다.

‘뭐지? 동 단주가 왜……?’

그뿐만 아니라 선객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금방 산 사람이라도 잡아먹을 것처럼 굴던 동추추가 갑자기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영 이상했다.

무림맹 사절단도 마찬가지.

‘방금 가주님이 전음을 보낸 것 같았는데…….’

전음이라고 해도 결국 아주 작은 소리를 기에 실어 보내는 것이기에 입술이 움직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단휘는 적비연이 동추추에게 전음을 보낸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다음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동추추가 느닷없이 포권을 하며 고개를 숙이는 게 아닌가?

척!

“실례가 많았소. 부디 서운한 마음 거두시길.”

“아니오. 충분히 그러 실만한 상황이었소.”

조금 전 표사가 목숨을 노렸던 일을 두고 한 말이었다.

동추추가 답례했다.

“이해해 주셔서 고맙소. 그럼 편안한 여정이 되시길.”

“고맙소.”

동추추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가자!”

“존명!”

수혼단원들이 일제히 대답하면서 동추추의 뒤를 따랐다.

난간으로 올라선 동추추가 멈칫하고는 적비연을 한 번 돌아보았다.

적비연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목례를 해보이자, 그가 곧 몸을 날려 작은 배로 옮겨 탔다.

그의 수하들 역시 가벼운 몸놀림으로 작은 배로 옮겨갔다.

그렇게 작은 배가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진 후에야 선객들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무림맹 사절단도 마찬가지.

다리에 힘이 풀린 단휘가 비틀거리며 말했다.

“정말 십년감수하는 줄 알았습니다. 도대체 저들이 왜 그냥 돌아간 겁니까?”

“암어를 말했거든.”

“그게 무슨 암어인데요?”

“강동칠괴의 암어.”

적비연의 말에 그제야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단휘와 예홍이 이해하는 것과 달리 임송화와 현청은 강동칠괴로부터 암어를 알아낸 것이라고만 이해했다.

적비연이 설명을 덧붙였다.

“수로십팔채에게 통하는 암어는 총 세 단계가 있지. 그중에서도 방금 내가 말한 것은 가장 등급이 높은 암어다. 이 암어를 사용하면 총채주가 아니고서는 함부로 대할 수 없다.”

“그렇군요. 강동칠괴가 사용한 암어군요?”

“그래. 일전에 강동칠괴가 수로십팔채의 총채주에게 의뢰를 받으면서 돈 대신 암어를 요구했거든.”

그러자 듣고만 있던 현청이 감탄을 연발했다.

“과연! 정말 대단하십니다! 강동칠괴를 하 대협이 전멸시켰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그런 암어까지 알아내셨을 줄이야.”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현청이었지만 적비연은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어쨌거나 이걸로 시간은 벌었다.

하지만 오래가진 못할 것이다.

-어째서냐?

‘최고 등급의 암어는 무조건 총채주에게 보고하게 되어 있거든. 만약 총채주가 알려준 암어가 공용이 아니라 강동칠괴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이라면…….’

-네놈들의 정체가 들통날 수도 있겠군.

‘그렇지.’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절단을 둘러보았다.

“아직 방심할 수는 없소. 이 암어가 총채주에게 보고되면 수로십팔채가 어찌 나올지 알 수 없소.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지 마시오.”

“알겠습니다.”

“그럴게요.”

현청과 임송화가 동시에 대답했다.

적비연은 노선장에게 다가갔다.

“좀 서둘러 주셔야겠소.”

“누구보다 내가 간절하네.”

노선장이 약간은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 * *

장강 복판에 커다란 배 한 척이 섬처럼 떠 있었다.

배가 어찌나 큰지 얼핏 보면 정말 섬인 줄 착각할 정도였다.

선미에는 흰색 피풍의를 두른 거한이 서 있었는데, 기다란 은발 머리카락이 강바람에 사정없이 흩날렸다.

그가 바로 장강의 주인으로도 불리는 수황 무자강이었다.

이목구비가 유난히 또렷한 그는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바람을 음미하듯 침음을 흘렸다.

“흐음. 두 시진 후면 소나기가 내리겠군.”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

소나기도 뿌릴 구름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하지만 선내에 있던 무인들은 모두 무자강의 말을 완전히 믿었다.

물비린내만 맡아도 그날 날씨를 모두 꿰뚫는 무자강이었다.

어느 순간 그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서쪽을 돌아보았다.

“동 단주인가?”

그 말을 뱉은 지 한참이 지나서야 저만치 수면 위로 배 한 척이 모습을 드러냈다.

배가 비교적 근거리에 다다랐을 무렵, 한 인영이 배에서 뛰어내리는가 싶더니 수상비를 펼치며 빠르게 달려왔다.

그야말로 입이 척 벌어질 정도로 대단한 경신법이었다.

순식간에 커다란 배에 다다른 인영이 몸을 날리더니 갑판 위에 착지했다.

쿵!

갑판에 내려서자마자 무릎을 꿇은 자는 바로 수혼단주 동추추였다.

무자강이 감정이라고는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인가?”

“최상급 암어 사용을 보고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최상급 암어?”

“자하 금리어를 언급했습니다.”

무자강이 눈살을 슬쩍 구겼다.

“자하 금리어?”

“그렇습니다, 총채주님!”

무자강이 예의 그 무감한 표정으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죽은 강동칠괴가 살아 돌아왔을 리는 없을 테고.”

“……!”

그 순간 동추추는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어쩐지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상대가 하필 다섯 명인 것도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더 서둘러 복귀해서 보고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강동칠괴에게 내어준 암어였다니!

그렇다면 더욱더 그들의 정체가 무림맹 사절단으로 좁혀지는 게 아닌가?

조금 더 의심했어야 했다.

“하면 역시……?”

동추추가 굳은 표정으로 올려다보자, 무자강이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수혼단주, 간만에 실망스럽군.”

“죄송합니다! 한 번 더 기회를 주시면 제가 반드시 처리하겠습니다!”

“각오는?”

“보고도 알아보지 못한 눈을 버려 각오를 다지겠습니다!”

팍!

순간 누가 말릴 겨를도 없이 동추추가 손으로 자신의 한쪽 눈을 푹 찔렀다.

거침없이 눈알을 뽑아낸 동추추가 이를 악물고는 혈을 점해 지혈했다.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무자강이 나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하나는 제대로 보길 바라지. 가서 처리하도록.”

“존명!”

* * *

“거의 다 왔군.”

적비연이 저만치 암벽을 보며 말했다.

저 암벽을 끼고 돌아서면 먼발치에 동릉현의 부두가 보일 터였다.

수로십팔채와 다시 마주칠까 봐 내내 마음 졸였던 단휘도 그제야 한시름 놓았는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땅을 밟고 싶어질 줄은 몰랐습니다.”

“부두에 내리면 흑천련 쪽에서 마중 나와 있을 테니 별탈은 없을 거다.”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지만 아직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된다.

예홍의 말대로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므로.

암벽을 끼고 돌아도 한참은 더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배가 천천히 암벽을 돌아갔다.

적비연을 비롯한 모두가 마지막으로 긴장을 다지고는 선두를 바라보았다.

마침내 배가 완전히 돌아섰을 때,

“아……!”

단휘의 표정에 낭패감이 서렸다.

“이럴 줄 알았어. 우린 이제 다 죽었네.”

예홍이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검을 뽑아 들었다.

놀랍게도 수십 척의 배가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배마다 수로십팔채를 상징하는 검청색 깃발이 꽂혀 있었다.

순간,

뿌우우!

뿔 나팔 소리가 울리더니 수십 척의 배가 사절단이 탄 배를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

“제길, 십 리 정도를 남겨두고 이 지경이 되다니!”

단휘가 검을 뽑아 들고는 이를 뿌득 갈았다.

마침 선두로 다가오는 배 위에 동추추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내공을 실은 음성으로 소리쳤다.

“감히 나를 잘도 속였겠다! 살아서 장강을 벗어날 생각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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