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수귀(水鬼) 내려온다
삐걱…… 삐걱……!
얇은 판자로 선실을 만든 나룻배 한 척이 수면 위에서 연신 삐걱거렸다.
마치 물 위에서 균형을 잃은 오리처럼 연신 뒤뚱거리는 나룻배에서는 남자의 거친 호흡과 여자의 야릇한 신음성이 새어 나왔다.
“헉, 헉, 헉……!”
“하아, 하아……! 아응……!”
나룻배에서 대략 오십여 장 정도 떨어진 곳에는 또 다른 작은 배가 있었는데, 허리춤에 칼을 찬 무인 두 명이 죽립을 눌러 쓴 채 목석처럼 서 있었다.
그중 한 명이 곁눈질로 먼발치의 나룻배를 힐끔거리자, 옆에 선 무인이 혀를 찼다.
“부디 자네가 허튼 생각 한 게 아니길 바라네.”
“커험. 요즘 통 재미를 보지 못했더니. 쩝.”
“아무리 굶주렸어도 독초에 손을 댈 수는 없는 법이지.”
“알아, 알아.”
대충 대꾸한 무인이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먼 산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저 멀리에서 귀를 간질이듯 날아드는 신음성은 남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하나 동료의 말이 백번 지당했다.
굶었다고 독초에 손을 댔다간 정말 죽는다.
저 나룻배에서 열락의 꽃을 피우는 자가 누군가?
바로 선귀단주(船鬼團主) 동소유(董少柔)다.
장강의 거머리.
그녀가 거머리라고 불리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지금처럼 남성과 관계를 가져 정기를 남김없이 빨아먹기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한 번 노린 먹잇감을 끈질기게 추적하기 때문이었다.
‘그래, 허튼 생각 말고 정신 차리자.’
제 뺨을 소리 나도록 때린 무인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잠시 후 옆에 선 무인이 옆구리를 쿡 찔렀다.
“끝난 것 같군. 가세.”
돌아보니 과연 나룻배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한편 나룻배에서 모습을 드러낸 여인은 한껏 기지개를 켜며 개운한 표정을 지었다.
“하아, 오랜만에 만족스러웠네.”
그녀가 걸친 옷만큼이나 붉은 입술에 유난히 큰 눈동자, 오뚝한 코에 비단결처럼 고운 피부.
누구라도 지나가다가 보았더라면 그 자리에서 넋을 놓고 쳐다볼 정도의 미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어딘지 모를 색기가 전신에서 흘러넘쳤고, 옆단이 길게 찢어진 치마는 뭇 남성들의 욕망을 자극하기에 차고 넘쳤다.
하나 그녀가 바로 조금 전 무인들이 말한 독초이자 장강의 거머리, 동소유였다.
“하아. 물비린내를 맡아 보니 곧 비라도 뿌리겠는걸?”
아직은 맑은 날씨.
하지만 그녀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니 소형 배 한 척이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조금 전 번을 서던 무인 두 명이었다.
동소유가 선실 쪽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치워.”
“존명!”
무인 두 명이 재빨리 몸을 날려 나룻배로 옮겨 타더니 선실 안으로 들어섰다.
먼저 들어섰던 무인이 저도 모르게 흠칫거렸다.
미간이 절로 구겨지는 광경.
선실 안에는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진 남성이 있었는데, 살가죽이 뼈에 달라붙을 지경이었다.
분명 아침만 해도 건장한 사내였음에도.
‘쯧쯧. 운도 없지.’
내심 혀를 찬 무인 둘이 남성의 시체를 꺼내와 몸에 무거운 돌을 매달고는 강에 던져 버렸다.
그때 강 하늘을 가로지르며 전서응이 날아들었다.
푸드득!
전서응이 커다란 날개를 펼치며 나룻배 선실 위에 내려앉자 무인 하나가 얼른 발목에 묶인 서신을 풀어 읽어 내려갔다.
한데 그의 표정이 이내 딱딱하게 굳었다.
이상한 낌새를 챈 동소유가 고운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뭐야?”
“그, 그것이……!”
“가져와.”
무인이 얼른 달려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서신을 받쳐 들었다.
서신을 받아 읽은 동소유의 표정이 흠칫거렸다.
“오라버니가…… 눈을? 무림맹 사절단, 이것들이 감히……!”
그녀의 목소리가 분노로 떨렸다.
이내 전서를 와락 구긴 그녀가 차갑게 일렀다.
“동릉항으로 간다. 최대한 서둘러.”
“존명!”
* * *
수십 척의 배가 노련한 움직임으로 운송 배를 에워싸더니 거침없이 사슬을 던졌다.
콰직! 콰콰콰직!
날카로운 갈고리가 난간에 걸리면서 배와 배가 연결됐다.
곧이어 수로채 무인들이 몸을 날려 사슬을 밟고 건너왔다.
처처처처척!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노선장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럼 그렇지.
동추추를 건드리고 그냥 넘어갈 리가 없지.
망연자실해 있는 그를 향해 적비연이 검을 뽑아 들며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장, 미안하게 됐소. 손실액은 추후 무림맹으로 청구하면 최대한 보상해줄 거요. 사절단 대표로 약속드리지.”
“누구 마음대로?”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뱉으며 나선 사람은 다름 아닌 동추추였다.
그가 뺨을 씰룩였다.
“어이, 영감. 저 찌꺼기들과 한 통속이 되어서 나를 속이면 내가 그냥 넘어갈 거라고 생각했소? 어찌 그리 미련하시오? 그만큼 물밥을 오래 먹었으면 장강의 법도를 깨우칠 때도 됐을 텐데.”
“미, 미안하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걸세. 그렇잖아도 나 역시 후회를…….”
쉬컥!
순간 도기가 솟구치는가 싶더니 노선장의 목이 그대로 허공으로 떠올랐다.
툭, 데굴데굴.
한참을 굴러간 노선장의 머리가 한차례 눈을 끔뻑이더니 이내 움직이지 않았다.
츄아아아!
곧이어 피를 분수처럼 뿜어낸 노선장의 몸이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촤아악!
도신에 묻은 피를 한차례 털어낸 동추추가 싸늘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후회라는 건 아무리 빨라도 항상 늦는 법이야.”
“저 미친……!”
단휘가 참지 못하고 욕지거리를 뱉어냈다.
분노를 느끼기는 현청과 임송화도 마찬가지.
차차앙!
그들 모두 도검을 뽑아 들고는 예기를 뿜어냈다.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군.”
동추추가 입매를 히죽 치켜 올렸다.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 살기가 일어나면서 장삼자락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강렬한 기운이 뿜어지자 주변이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리기까지 했다.
적비연은 차분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로채 무인들이 무려 백 명이 넘는다.
게다가 선상의 싸움이다.
엄살이 아니라 진짜 어렵게 됐다.
당장 동추추만 해도 자신보다 고절한 무공 실력을 가졌다.
선상이 아니라 땅에서 싸워도 승산이 높지 않다.
한데 그의 수하들까지 합하면…….
‘역시 육로를 이용할 걸 그랬나?’
하지만 그랬다간 시간이 훨씬 많이 걸렸을 거다.
게다가 장강에 수로채가 있듯, 흑천련 권역 산길에는 녹림이 도사리고 있다.
어느 쪽이든 재수가 없으면 이렇게 골치 아픈 녀석들과 부딪친다.
그래, 저놈 말마따나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지.
지금은 당장의 대처만 생각하자.
[내가 동추추를 맡을 테니, 그 수하들을 상대해 주시오.]
적비연의 전음에 현청이 흠칫거리며 되물었다.
[저자의 무공이 초절정 삼 단에 이르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대협 혼자서는 아무래도…….]
[다른 방법이 있소?]
[그건…….]
[일단은 그렇게 각자 살아남는 걸로 합시다. 어떻게든 부두에 도착하기만 하면 한시름 덜 거요.]
[흑천련 쪽에서 마중 나오지 않았으면 어쩌죠?]
예홍이 물었다.
과연 그녀는 최악의 상황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적비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 흑천련도 당장은 본 맹과 전면전을 벌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니 괜히 정도문파들을 자극시킬 필요는 없겠지.]
만약 흑천련이 약속을 저버리고 마중을 나오지 않는다면, 아마 정도문파는 똘똘 뭉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뭐, 총군사는 오히려 그걸 바랄지도.’
후기지수 다섯을 잃음으로써 명문정파의 아낌없는 지원을 얻을 수 있다면야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 테니.
원래 무림맹 내부는 흑천련에 대해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번 용봉대회 사건을 기점으로 강경파에 무게가 실리는 분위기였다.
한데 사절단마저 그런 식으로 전멸하게 된다면 무림맹이 움직이기 전에 각 명문들이 먼저 들고 일어날지도 모른다.
확실히 흑천련 입장에서는 고작 후기지수 다섯을 제거하는 대가치고는 수지가 안 맞는다.
뭐, 장강에서 물귀신이 된다면 모를까?
적비연이 동추추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과연 초절정 삼 단에 이른 고수답게 빈틈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적비연이 툭 던지듯 말했다.
“그사이에 눈알 하나는 어디 팔아먹었나 보군.”
정말 궁금하기도 했고, 일부러 격장지계를 펼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적어도 격장지계는 실패한 모양이었다.
동추추가 비릿한 웃음을 짓더니 대꾸했다.
“네들 목숨값으로 넘겼다. 그러니 네놈들 목숨은 내가 거둬가야겠다!”
타앗!
찰나지간 동추추의 신형이 번개처럼 달려 나왔다.
적비연이 기합성처럼 외치며 그대로 검을 올려쳤다.
“그런 걸 호구 됐다고 하는 거다! 애꿎은 눈알만 잃었구나!”
따아앙!
콰직!
“크읏!”
적비연의 발이 갑판을 파고들며 발목까지 묻혔다.
확실히 동추추의 공력이 어마어마했다.
동추추 역시 뜻밖에도 자신의 일격을 막아낸 적비연을 보고는 눈을 부릅떴다.
“아주 하찮은 놈은 아니었나 보군!”
순간 그가 몸을 빠르게 회전하며 도를 횡으로 베어왔다.
그가 뿜어내는 살기가 어찌나 강한지 도신이 닿기도 전에 옆구리가 베이는 느낌이었다.
적비연이 얼른 몸을 틀며 검을 앞세우려는데,
‘제길! 발이……!’
갑판에 파묻힌 발이 빠지지가 않았다.
결국 갑판 바닥을 부수며 빼냈지만 이미 늦은 상황.
‘위험하다!’
겨우 단 두 번의 공격에 옆구리가 갈라질 위기다.
찰나,
슈까아앙!
어디선가 검기가 날아들더니 동추추의 도를 튕겨냈다.
예홍이었다.
그녀에 이어 단휘가 기합성을 내지르며 동추추의 가슴을 향해 검을 뻗었다.
좌우에서는 현청과 임송화가 동시에 덮쳤다.
“하앗!”
하지만 무공의 격차는 무시할 수 없었다.
“흥!”
동추추가 코웃음을 치더니 오른발로 진각을 밟았다.
콰앙!
순간 갑판 바닥의 파편이 솟구치며 튀어 오르자 마치 방패가 된 것처럼 세 사람의 공격을 가로막았다.
콰콰콰콰작!
세 사람이 도검을 부리며 튀어 오른 파편들을 쳐내자 잘게 부서진 나뭇조각들이 사방으로 튕겨 날아갔다.
“헛!”
“큿!”
타다다당!
마침 주변에 있던 선객 몇몇은 그 파편에 부상을 당했고, 수로채 무인들은 능숙하게 피하거나 방어했다.
확실히 선상의 싸움에 익숙한 자들다웠다.
촤아앗!
찰나의 틈에 충분히 거리를 두고 물러난 동추추가 갑판 위에 미끄러지다시피 멈춰 섰다.
적비연이 한시름 놓으면서도 전음을 흘렸다.
[다들 수하들을 맡아달라고 하지 않았소?]
[우리 때문에 살았잖아요.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말자고요.]
임송화가 입술을 비죽 내밀며 대꾸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죠. 가주님과 함께 수장되어서 영광입니다.]
아니, 벌써 단정하지 말라고.
적비연이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하지만 이젠 진짜 각자 살길을 찾는 거요. 다들 어떻게든 동릉항 부두에 내려서시오. 대표로서 내리는 명령이오.”
임송화가 피식 웃었다.
“그럼 부디 살아서들 보자고요!”
“모두들 무운을 빌겠소!”
현청도 대꾸했다.
툭, 투둑. 툭툭……!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치열한 혈투를 알리는 신호처럼.
마침내,
쏴아아아아!
비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동시에,
“쳐라!”
동추추의 명령이 떨어졌다.
“존명!”
순간 천둥 같은 대답과 함께 수로채 무인들이 새까맣게 몰려왔다.
임송화가 검기를 풀풀 일으키며 짜증 섞인 소리를 냈다.
“봐, 내가 이래서 정말 오기 싫었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