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이게 바로 진짜!
-처음부터 노린 거냐?
극마가 조금 감탄한 듯 물었다.
하지만 적비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물에 빠지고 나니 생각이 났어.’
애초에 물에 빠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장강의 수귀를 상대로 수중 싸움이라니.
선상 싸움에서도 불리한데, 물에서 먹고 자는 수로채 무인을 상대로 수중 싸움을 하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냥 배 난간 밖으로 던져 버리고 몸을 빼낼 작정이었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목적은 동릉항에 내려서는 것이었다.
굳이 동추추와 결판을 낼 이유는 없었다.
한데 역시 상대는 강했다.
던지는 대로 날아가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손목을 낚아채고는 같이 물속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물에 빠지는 순간 꼼짝없이 죽겠구나 생각했다.
잠깐 손을 섞으면서도 적비연은 절망감을 느꼈다.
동추추의 손놀림이 너무 빨랐다.
물의 저항을 전혀 받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수귀라는 별명이 아깝지 않았다.
그런데 한 가지, 그만의 독특한 기운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강맹한 기운은 분명히 느껴지는데 그 성질까지 파악하기는 어렵다고나 할까?
그때 깨달았다.
아, 물속에서는 공력의 성질까지 구분하는 게 어렵구나.
그렇다면?
마공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공기를 통해 바로 전달되는 것이 아닌 만큼 물의 방해로 인해 그 성질이 가려진다면?
적어도 여기서는 마공을 쓰더라도 물 밖에서 싸우는 자들이 느끼지 못하리라!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적비연이 곧장 구천혈마공을 운기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동추추는 그에 대한 반응으로 어리둥절한 상황이고.
-그나저나 귀수갑 효과는 봤군.
‘그런 셈이지.’
사실 귀수갑을 임송화에게 줄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임무 도중에라도 생각이 바뀔지 몰라서 조건을 달았다.
모든 임무가 끝나면 귀수갑을 건네주겠다고.
그 전까지는 사절단 대표인 자신이 맡겠다고.
결국 반대하는 사람이 없어서 적비연이 착용한 것이다.
‘뭐, 이렇게 써먹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나저나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
별 탈 없어야 할 텐데.
-흥! 적들을 섬멸하는 것도 아니고, 제 한 몸 사려서 달아나기만 하면 되는 게 뭐 어렵다고 걱정이냐?
극마가 핀잔을 주었다.
일견 맞는 말이기도 했다.
사절단원 모두가 절정 후단에 이른 만큼 제 한 몸 지키는 정도야 어쩌면 가능할 지도 모른다.
다만 선상이라는 게 좀 걸린다.
땅에서 싸우는 것이라면 어떻게든 달아날 수 있겠지만, 장강 복판에서는 얘기가 달라지니까.
소형 배라도 한 척 구할 수 있다면 모를까?
그때 무언가가 물속으로 풍덩 빠져들었다.
흠칫거리고 물러나니 수로채 무인 한 명이 부상을 입은 채 가라앉고 있었다.
곧이어 칼자루가 물에 빠지면서 가라앉는 것을 보고는 얼른 낚아챘다.
구천혈마검을 사용하려면 검이 필요했다.
검이 아니라 도라는 점이 아쉬웠지만, 지금 이거라도 구한 게 어딘가?
한편 동추추는 적비연의 달라진 기세에 눈을 가늘게 뜨고는 운기를 조절했다.
‘마기라니. 착각이겠지. 하지만 정말 마기라면…… 저놈 정체가 뭐지?’
뭐, 부딪쳐 보면 알 일이다.
착각인지 아닌지.
그리고 착각이 아니라면 제압해서 추궁해보면 될 것이고.
생각을 마친 동추추가 금리도천파(金鯉倒千波)를 펼쳐 순식간에 적비연에게 나아갔다.
원래 금리도천파는 다수의 무인들이 사용하는, 비교적 흔한 경공술이다.
몸을 뒤틀며 튀어오르는 잉어의 움직임을 본 떠 만든 경공술인데, 동추추는 그 기술을 실제로 물속에서 사용한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나 물속에서 사용한다고 동추추처럼 움직일 수 있는 건 아니다.
이미 금리도천파는 지상에서 사용하는 무공으로 갈고닦아진 상태다.
다만 수로채 무인들은 이를 수중에서 최대의 효과를 거둘 수 있도록 변형했다.
그 이름처럼이나 동추추의 몸이 잉어라도 된 듯 물살을 헤집으며 빠르게 나아갔다.
쉬르르르릇!
동추추가 도기를 뿜어내며 칼을 횡으로 베어왔다.
수로채 무인이 아니라면 물속에서 움직임이 느릴 수밖에 없다.
충분히 벨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타앙!
적비연이 손을 들어 그대로 도신을 잡았다.
아뿔싸, 이놈 귀수갑을 차고 있다고 했지!
워낙 희귀한 물건이다 보니 미처 생각을 하지 못하고 평소처럼 공격해 버렸다.
‘그렇다고 한들…… 물속에서는 움직임이 둔해져 제대로 반격을 하긴 어려울……?’
다음 순간 동추추의 눈동자가 커졌다.
놀랍게도 적비연 곧장 반격을 해왔다.
적비연이 든 도가 사선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크읏!’
당황한 동추추가 얼른 몸을 뒤틀면서 물러났다.
하지만 도신이 적비연의 손에 꽉 잡힌 상태여서 물러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칼을 놓아 버리고는 물러났다.
쉬르르르!
물살을 가르며 적비연의 칼이 그대로 강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적비연은 그 칼을 놓아 버리고는 동추추의 칼을 고쳐잡았다.
졸지에 칼을 빼앗긴 동추추가 이를 빠득 갈았다.
‘이 애송이 새끼가……!’
화가 잔뜩 난 동추추가 곧바로 발을 곧게 펴자 발끝에서 내공이 발출하면서 빠른 속도로 나아갔다.
순식간에 적비연 코앞까지 다다른 그가 금나술을 펼쳐 적비연의 팔을 얽어맸다.
하지만 적비연 역시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팔을 빼냈다.
그러자 동추추가 몸을 회전하며 발을 내질렀다.
퍼억!
동추추의 발이 적비연의 복부에 정확히 꽂혔다.
“크읍!”
적비연의 입에서 공기방울이 뿜어져 나왔다.
확실히 동추추는 수중에서 내공을 효율적으로 운용할 줄 알았다.
적비연이 얼른 입을 다물고는 동추추의 발목을 낚아챘다.
순간 구천혈마공을 끌어올리자, 그의 두 손이 벌겋게 물들어갔다.
‘안 돼!’
깜짝 놀란 동추추가 얼른 발을 빼내면서 수도를 내질렀다.
쉬르르릇!
팍!
팔꿈치에 수도를 맞은 적비연이 반사적으로 칼을 놓쳤다.
동추추가 얼른 칼을 낚아채고는 그대로 적비연의 단전을 향해 베어갔다.
-조심해라! 베인다!
‘칫, 검이 없으니까 구천혈마공도 한계가 크네.’
-그래서 내가 기를 쓰고 구천혈마검법을 익히려고 한 게지.
그러는 사이 동추추의 칼은 적비연의 옆구리로 날아들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옆구리를 베일 수밖에 없는 상황.
한데 천운이 따랐다.
갑자기 또 한 명이 물속으로 풍덩 빠지면서 동추추의 머리를 짓누른 것이다.
그 찰나를 이용해서 적비연이 동추추를 발로 걷어차고는 뒤로 물러났다.
마침 극마가 이제 막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수로채 무인을 보고는 말했다.
-검이다! 운이 좋군!
‘그러게.’
사실 수로채 무인들은 검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주로 찌르기 용도인 검은 자로 잰 듯 정확한 기술을 요한다.
하지만 선상에서 이루어지는 백병전은 변수가 많다.
그런 만큼 움직임이 커져도 적을 베기가 수월한 도가 효율적인 것이다.
그래서 수로채 무인들은 검보다는 도를 선호한다.
한데 드물게 검을 사용하는 무인이 물에 빠진 것이다.
적비연이 검을 낚아채려고 하자, 무인이 몸을 뒤틀며 저항했다.
하지만 이미 오른쪽 어깨에 상당한 부상을 입은 상태.
아마 사절단 중 한 명에게 당한 것이리라.
적비연이 한 손으로는 검신을 움켜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장력을 발출했다.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수로채 무인이 뒤로 날아가며 동추추를 덮쳤다.
촤아아악!
동추추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수로채 무인을 절반으로 갈라 버렸다.
그 바람에 시뻘건 핏물이 자욱하게 퍼졌다.
‘아무리 그래도 수하를 저렇게 망설임없이 갈라 버리다니.’
적비연으로서는 나름 충격적인 모습이었지만, 극마는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어차피 그 정도 부상이면 뒈질 목숨이다. 방해가 된다면 빨리 치워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지.
‘하여튼 마공을 익힌 놈이나, 사공을 익힌 놈들은 인정머리가 없다니까.’
-편견이다. 그리고 네놈도 마공을 익혔고, 지금 사용하고 있지 않느냐?
마땅히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은 적비연은 그저 동추추만 노려보았다.
‘어쨌거나 이제 검이 생겼으니 구천혈마검의 위력 좀 볼까?’
-아무리 구천혈마검이라도 너는 고작 사성 수준이다. 게다가 여긴 물속이야. 여전히 저놈이 더 유리하다는 건 변함이 없다.
‘알고 있어. 문제 하나 내볼까?’
-이 지경에?
‘익숙한 자와 익숙하지 않은 자가 싸울 때, 변수가 많을수록 유리한 건 누굴까?
-그야 당연히 익숙하지 않은 자가 유리하지.
‘그래, 그래서 괜찮은 방법이 떠올랐다.’
-무슨……?
적비연은 대답 대신 돌연 몸을 돌리더니 강바닥 아래로 헤엄치기 시작했다.
마공을 한껏 발출하니 그 속도가 굉장히 빨랐다.
동추추는 적비연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도망칠 생각인가?’
자신을 상대로 정면승부를 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봐줄 수 있지만, 그래도 역시 어리석은 짓이다.
물속에서 자신보다 빠를 수는 없을 테니까!
동추추가 다시 한번 금리도천파의 술법으로 빠르게 하강했다.
거의 강바닥에 이르게 되자 수압이 강하게 느껴졌다.
적비연은 강바닥에 발을 붙이고는 천천히 기수식을 취했다.
동추추가 맞은편에 내려서서는 눈을 가늘게 떴다.
‘도망이 아니었나? 확실히 머리는 좋은 놈이구나.’
수로채 무인이라도 대게 수면 가까운 곳에서 싸운다.
이렇게 강바닥까지 내려와서 싸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 정도 수압이 되면 확실히 수로채 무인들도 조금 적응하기 어려워진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적비연의 선택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나를 너무 우습게 보는군! 본좌가 여느 수로채 무인들과 같은 수준으로 보이더냐!’
동추추가 빠른 속도로 나아갔다.
강바닥에 가라앉은 흙모래가 풀썩풀썩 일어나면서 안개처럼 퍼졌다.
-온다!
적비연은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숨이 차오르고 있다.
오래 버틸 수는 없다.
그나마 구천혈마공 때문에 지금껏 버틴 거다.
이왕이면 일수에 끝내야 한다.
싸움이 더 길어지면 칼에 맞아 죽기 전에 물에 빠져 죽을 판이니까.
동추추가 마침 지척에 다다랐을 때,
-주인, 지금이다!
극마가 신호를 보냈다.
동시에 적비연이 구천혈마검의 제일초식, 구천일관시(九天一貫矢)를 펼쳤다.
쉬르쉬르릇!
적비연의 검이 마치 물고기라도 된 듯 아래위로 굽이치며 빠르게 나아갔다.
생각보다 빠른 검공에 동추추가 두 눈을 부릅떴다.
‘과연 숨겨둔 한 수가 있었다는 건가?’
웬만한 수로채 무인이었다면 이번 공격을 피하지 못해 치명상을 입었으리라.
하지만 자신은 웬만한 무인이 아니다.
동추추가 발끝으로 강바닥을 툭 찍어 차면서 몸을 팽이처럼 회전했다.
휘르르릇!
그를 중심으로 물길이 크게 휘돌기 시작했다.
마치 그 물의 흐름이 호신강기라도 된 것처럼 동추추의 몸을 에워싸고 있었다.
적비연의 검이 물의 흐름을 이겨내지 못하고 동추추의 몸을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찰나지간 동추추가 빠르게 칼을 내려쳤다.
쉬르르르릇!
물살을 가르는 도신이 그대로 적비연의 머리를 찍으려는 순간,
척!
적비연이 손으로 도신을 낚아챘다.
하지만 동추추는 당황하지 않았다.
‘흥! 이미 눈치챘다!’
그가 그대로 칼을 놓는 것과 동시에 다른 한 손으로 품에서 단도를 뽑아 들었다.
‘이 정도 근거리에서는 절대 피할 수 없을 거다!’
동추추가 그대로 단도를 휘둘렀다.
촤아악!
적비연의 소매가 길게 찢어져 나갔다.
동추추는 물의 흐름을 이용해서 그대로 적비연의 목을 향해 재차 단도를 내질렀다.
이걸로 끝이었다. 아니, 끝이어야만 했다.
그런데…….
‘……!’
동추추의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적비연의 입매가 씨익 올라갔다.
적비연의 찢어진 소매에서 드러난 장치.
손목에 두르고 있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암기 발사 장치가 분명했다.
적비연이 무림맹 무기고에서 고른 것이었다.
‘이게 진짜 숨겨둔 한 수였다!’
일순 적비연이 손목에 공력을 주입하자,
피슈슈슈슉!
수십 개의 세침이 동추추를 향해 날아가 전신에 박혔다.
“크업!”
동추추의 입에서 공기방울이 마구 터져 나왔다.
이를 본 극마가 입매를 이죽거렸다.
-역시 주인은 참 약았다니까. 뭐, 그 점이 마음에 들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