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물고기 받고 거머리
동소유의 뺨이 씰룩였다.
채찍을 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입술을 어찌나 세게 깨물었는지 피가 흐르다 못해 살이 뜯겨져 나갈 것만 같았다.
“비키라고 했다.”
그녀의 전신에서 미친 듯이 살기가 피어올랐다.
눈앞에서 오라버니가 죽는 모습을 보았다.
저 가증스러운 것들에게!
한데 방해꾼이 나타났다.
흑천련?
흑천련이 아니라 용왕이 나타나도 이 분을 삭일 수는 없었다.
반철룡이 한 걸음 더 나서며 엄중히 경고했다.
“다시 한번 말하겠소. 이제부터는 흑천련의 권역이오. 그대의 은원을 따지기 전에 본 련의 손님이외다.”
“얼어 죽을……! 손님은 개뿔!”
타닷!
동소유가 바닥을 차고는 바람처럼 달려왔다.
그녀의 목표는 적비연이었다.
취리리릿!
검은 채찍이 뱀처럼 뻗어나가는데,
타타앙!
이번에도 반철룡과 여추백이 동시에 나서며 채찍을 쳐냈다.
곧이어 반철룡과 여추백이 몸을 회전하더니 마치 합을 맞춘 것처럼 일 장을 각각 뻗어냈다.
휘릭, 퍼퍼엉!
“크읏!”
두 사람의 합공으로 양어깨를 얻어맞은 동소유가 뒤로 대여섯 장이나 물러났다.
가까스로 멈춰 선 그녀가 이를 빠득 갈았다.
“이것들이! 안 비켜?”
사실 그녀의 무공 수위는 두 사람을 상회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적비연만을 노리고 들어간 공격이었고, 둘이 합공을 한 것이었기에 반격이 가능했다.
게다가 지금은 흑룡대 수십 명이 그녀를 견제하는 중이기도 했고.
하지만 동소유가 작정하고 달려든다면 흑룡대주 반철룡도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었다.
“비키지 않겠다면 네놈들도 전부 찢어죽이지!”
동소유가 귀신처럼 소리치며 다시 달려들려고 할 때였다.
“단주님! 고정하십시오!”
뒤늦게 도착한 부단주 장무령이 앞을 막아서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움찔거린 동소유가 악에 받친 듯 소리쳤다.
“말리지 마라!”
그러자 이번엔 반철룡이 사자후를 터뜨렸다.
“정녕 혈칙마저 어길 셈인가!”
“이익!”
그 말에 동소유가 채찍을 쥔 채 바르르 떨었다.
정말이지 분노가 치밀어 올라서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단주님……!”
장무령이 다시 한번 동소유를 진정시켰다.
반철룡이 싸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동 단주, 장강의 법도는 여기에서 통용되지 않소. 자중해 주시오.”
“저놈이 내 오라버니를 죽였다! 그것도 내 눈앞에서!”
“안타까운 일이나 은원은 다음에 따지시오. 장강의 법도가 통할 곳에서.”
“크읏.”
동소유가 신음을 흘리면서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장무령은 이러다가 단주가 사고라도 칠까 봐 안절부절못했다.
한 번 눈이 뒤집히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를 그녀였다.
마침내 그녀가 머리를 쥐어뜯다시피 절규했다.
“아아아아악!”
광인처럼 소리치던 그녀가 핏빛으로 물든 눈동자로 적비연을 노려보았다.
“내가 왜 장강의 거머리로 불리는지 알게 될 것이다! 네놈이 어디에 있든 끝까지 찾아내 전신을 갈가리 찢어발길 것이다!”
정말이지 한 서린 외침에 주변 사람들마저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었다.
물론 적비연 곁에 유유히 떠 있는 극마만 빼고.
-와, 쟤 엄청 색기 넘치네. 매력 있다.
‘네 주인 죽이겠다는 년이다.’
-그러니까 더 매력…… 이 아니라, 아무튼 마음에 드는군.
적비연이 내심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몸을 돌렸다.
결국 부둣가에 선 동소유는 그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연신 발작처럼 섬뜩한 비명을 내질러 댔다.
* * *
“고맙소.”
적비연의 말에 반철룡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임무였을 뿐이오.”
한마디로 너희들이 예뻐서 도와준 게 아니라는 뜻.
물론 알고 있다.
정파 무인이라면 이를 가는 흑천련 무인들이 아닌가?
뭐가 예쁘다고 도와주겠나?
다만 그의 말대로 임무였기에 나섰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인사치레는 해야겠다는 생각에 꺼낸 말일 뿐이다.
반철룡은 무림맹 사절단을 동릉현의 어느 객점으로 안내해 주었다.
객점 하나를 통째로 빌린 것인지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대신 백 명에 이르는 흑룡대원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 많은 인원이 객점에 가득한데도 말 한마디 없었다.
어쩌다가 식기가 마찰하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들 모두 식사를 하면서도 무림맹 사절단을 의식하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당연히 호의는 아니었다.
어딘지 모를 멸시와 무시, 혐오와 적대감.
온통 부정적인 감정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연신 힐끔거린다.
게다가 백 명에 이르는 대원들이 사기를 풀풀 휘날리고 있으니, 그 가운데에 앉아서 밥을 먹는 무림맹 사절단은 살갗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먹다가 체하겠습니다.]
단휘가 내심 투덜거리자, 적비연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도 많이 먹어둬라. 항주(杭州)로 가려면 아직 한참이니까.]
흑천련 본단은 절강성 항주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마지막에 틀어진 것만 빼면 그래도 지금까지는 장강을 따라 비교적 수월하게 이동한 것이다.
이제부터 갈 길은 조금 더 시간이 걸리리라.
그래도 단휘는 불평을 멈추지 않았다.
[이래서야 대접을 받기보다는 감시받는 기분이네요.]
[그걸 이제 알았어?]
적비연이 대충 대꾸하고는 반철룡을 돌아보았다.
“언제 출발하오?”
“마차가 준비되는 대로 떠날 거요. 늦어도 내일 오전이면 출발할 거요.”
“마차는 필요 없소. 말 한 필씩만 준비해 주시오.”
“최대한 편히 모시라는 맹주님의 명이 있었소.”
“우리는 말이 더 편하오.”
적비연이 일행들을 훑어보았다.
일행들이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의 뜻을 나타냈다.
사실 마차에 타게 되면 오히려 감시 받는 기분이 더 심해질 것이다.
좁은 공간에 갇혀 있으면 시시 때때로 변하는 상황을 파악하기도 어렵고.
‘뭐, 그걸 노린 것이겠지만.’
결국 반철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정 원한다면 그러겠소.”
“고맙소.”
그때 옆에서 듣고만 있던 여추백이 어딘지 빈정거리는 투로 물었다.
“그나저나 동추추는 어찌 사로잡았소? 그의 무공이 그리 가볍지 않을 진데.”
“운이 좋았소.”
“아, 운. 하긴 그 운이 따르지 않았다면 이곳에 없었겠지.”
여추백의 노골적인 말에 예홍이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하지만 사절단 누구도 뭐라고 반박하진 않았다.
흑룡대는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안내자 역할을 할 뿐이었다.
언제 어느 때든 적이 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런 자들에게 예의를 기대하는 것도 우스운 일.
여추백이 물을 한 잔 들이켜고는 말했다.
“그래도 조심하시오. 아직 끝나지 않았을 테니까.”
“무슨 말입니까?”
단휘가 묻자, 여추백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답했다.
“운이 좋아 동추추는 죽였지만, 더 큰 적을 만들지 않았소이까?”
동소유를 말하는 것이리라.
여추백은 어딘지 즐겁다는 듯 싱글싱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여자가 괜히 장강의 거머리가 아니오. 한 번 달라붙으면 끝까지 떨어지질 않거든.”
“장강을 벗어났는데도요?”
임송화가 물었다.
여추백이 피식 웃었다.
“그 여자에 대해서 잘 모르시나 보군. 장강에서도 제일 성질 더러운 연놈들이 바로 그 동씨 남매요. 아무튼 조심하는 게 좋을 거요.”
“그럼 그쪽도 조심해야겠군요.”
“내가 왜?”
“우릴 지켜야 할 임무가 있다면서요?”
“후후. 소저.”
여추백이 상체를 숙이더니 임송화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임송화가 꼼짝도 하지 않고 빤히 마주보았다.
“상황에 따라 임무에 최선을 다하지 않을 때도 있는 법이오.”
“그 말 그대로 당신들 주인에게 들려주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네요.”
“호오?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있을까?”
“지켜야 할 자의 입을 찢겠다고요?”
“내가 지키려고 하기도 전에 어디선가 찢어져 왔을지도 모르지.”
“아쉽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지.”
임송화가 딱딱한 표정으로 대꾸하면서 내공을 끌어올렸다.
동시에 여추백도 사기를 끌어올리자, 탁자 위에 놓인 수저가 다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탕!
순간 반철룡이 물 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그제야 여추백이 공력을 풀어내고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대주.”
“경거망동하지 마라.”
“명심하겠습니다.”
그 모습을 본 임송화가 희미하게 비웃음을 짓자, 반철룡이 그녀를 보며 경고했다.
“여 부대주의 말은 사실이오. 동소유가 작정하고 달려들면 우리만으로는 막아내기 힘들 거요. 조심해서 나쁠 건 없소.”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새겨두겠소. 그 전에 우선 눈 좀 붙입시다.”
“이 층 객실을 쓰시오.”
반철룡이 열쇠를 던져주자 적비연이 그것을 받아 들고는 몸을 돌렸다.
사절단이 모두 오르고 나자 여추백이 혀를 내둘렀다.
“과연 배짱 하나는 두둑하군요. 여기까지 와서 두 다리 뻗고 잘 생각부터 하다니.”
“운이든 실력이든 동추추를 죽인 자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죄송합니다.”
한편 적비연은 단휘, 현청과 방안에 들어오자마자 침상에 벌러덩 누웠다.
“자, 한숨 잡시다.”
“정말 자도 되는 겁니까? 이런 곳에서…….”
“이런 곳이 어떤 곳인데?”
“사파 영역 한복판이죠.”
“괜찮아. 잠을 푹 자둬야 여차하면 싸울 수라도 있지. 일단 눈 좀 붙이라고.”
말을 마친 적비연은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정말이지 엄청난 적응력이었다.
사실 위험한 순간이 감지되면 극마가 깨울 것이기에 가능한 행동이기도 했지만.
* * *
“불가.”
수황 무자강의 입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시종 감정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표정이었다.
동추추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있던 동소유가 벌떡 일어났다.
“총채주님!”
하지만 무자강은 대답 대신 묵묵히 동소유를 바라보기만 했다.
동소유가 악에 받친 듯 소리쳤다.
“오라버니가…… 수혼단주가 죽었습니다! 제가 보는 앞에서!”
“한심한 노릇이지.”
“크읏……!”
어찌 저리 냉정할 수 있단 말인가?
수하가 죽었는데!
하지만 우습게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황의 그런 모습에 반했던 동소유였다.
비록 지금은 그 모습이 소름 끼치도록 냉정하게 다가왔지만.
동소유가 주먹을 쥐고는 바르르 떨었다.
“복수를 허락해 주십시오!”
“불가. 물고기가 이미 장강을 떠났다.”
“수혼단주의 복수를 허락하실 수 없다면, 오라버니의 복수를 하겠습니다!”
지금껏 무표정했던 무자강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는 있겠지?”
당연히 알고 있다.
사적인 복수를 감행하기 위해 장강을 벗어난다는 뜻.
그 말인 즉슨, 수로채에서 탈퇴하겠다는 소리다.
빈말이 아니라, 동소유는 그렇게 해서라도 동추추의 복수를 할 작정이었다.
이미 그녀의 두 눈은 복수에 대한 열망으로만 가득했다.
“제가 장강을 떠나서 일을 저지른다면 흑천련과 본채가 갈등할 이유도 없을 테지요!”
“꽤나 감정적이군.”
“제게 하나밖에 없는 피붙이였습니다!”
“각오는…….”
무자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취리릿!
동소유의 채찍이 왼쪽 팔을 얽어매더니,
촤아아악!
눈 깜빡할 사이에 왼팔이 떨어져 나갔다.
스스로 왼팔을 잘라낸 것이다.
옆에 있던 부단주가 말릴 새도 없었다.
수로채를 벗어나는 대가였다.
장강의 법도이기도 했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핏기를 잃은 얼굴로 말을 꺼낸 동소유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녀가 떠나고 나자, 무자강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성질 더러운 남매군. 무령.”
“예!”
“투왕(鬪王)에게 연락해라.”
“하오면……?”
무자강이 눈을 가늘게 떴다.
“집 나간 새끼라고 마냥 미워할 수야 있나?”
“존명!”
장무령이 고개를 깊이 숙이더니 어디론가 몸을 날렸다.
무자강이 떨어져 나간 동소유의 팔을 보며 혀를 찼다.
“성질머리 좀 죽일 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