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93화 (94/301)

93. 하나가 가니 또 하나가

동릉현을 떠난 무림맹 사절단은 부지런히 이동해서 녕국현으로 들어섰다.

흑룡대주 반철룡이 예의 그 무뚝뚝한 목소리로 안내했다.

“녕국현을 벗어나면 이제 절강성으로 들어가게 될 거요. 하지만 오늘은 날이 저물어가고 있으니 이곳에서 쉬어야 할 것 같소.”

“그럽시다.”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말을 몰았다.

그렇게 무림맹 사절단이 막 저잣거리로 들어서려고 할 때였다.

쒸에엑!

느닷없이 파공성이 들리더니 화살 한 대가 빠르게 날아드는 것이 아닌가?

적비연이 얼른 몸을 틀어 피하자, 곧이어 두 자루의 화살이 연거푸 날아들었다.

쒸쒸에엑!

파밧!

뒤에서 따르던 예홍이 순간 말 등에서 날아오르더니 기합성과 함께 화살 두 자루를 모두 쳐냈다.

“하앗!”

채챙!

그제야 흑룡대원들이 무림맹 사절단을 에워싸며 주변을 경계했다.

반철룡이 사방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웬 놈들이냐!”

고요.

한차례 공방이 일어났더니 저잣거리에 넘치던 사람들은 언제 물러갔는지 썰물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잠시 후.

스스슥.

좌우 건물 지붕 위에서 암갈색 무복을 차려입은 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모두 흉흉한 사기를 드러내고 있었는데, 무림맹 사절단을 노려보는 눈초리만 보아도 가슴 한편이 서늘해질 정도였다.

타다닷!

뒤이어 골목에서 한 무리의 무인이 튀어나오더니 무림맹 사절단 앞을 막아서며 칼을 뽑아 들었다.

그들을 본 반철룡이 눈썹을 찡그렸다.

“네놈들은 누군데 감히 본 련의 손님을 해하려는가?”

그때, 골목에서 뒷짐을 진 노인이 타박타박 걸어 나왔다.

“날세. 반 대주.”

비교적 작은 체구지만 몸이 탄탄해 보였고, 짙은 눈썹에 태양혈이 툭 불거져 나온 것이 몹시 괴팍해 보이는 인상을 풍겼다.

노인은 그 험악한 표정만큼이나 까칠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오랜만이군, 반 대주.”

반철룡이 그제야 상대를 알아보고는 포권했다.

“혈왕부주(血王府主)님이셨군요. 반철룡이 인사드립니다.”

혈왕부주 좌관(左官).

녕국현에 터를 둔 흑도방파였다.

“예는 접어두고. 저치들을 우리에게 넘겨주게.”

“불가합니다. 아시다시피 무림맹 사절단은 본 련의 손님입니다.”

“흑천련은 본부의 원한을 기억하지 못하는가?”

“후배가 어려서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들은 바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공식 사절단임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흥! 양해는 내가 련주께 구하도록 하지!”

타닷!

순간 좌관이 바닥을 차고는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거의 동시에 흑룡대원들이 앞으로 뛰어가며 그를 막았다.

“어딜!”

좌관이 자신의 키 만한 도를 휘두르며 일갈했다.

타타탕!

“끄억!”

“커억!”

앞을 막아섰던 흑룡대원들이 비명을 터뜨리며 튕겨져 나갔다.

순식간에 눈앞까지 파고든 좌관을 향해 반철룡과 여추백이 동시에 검을 내질렀다.

“하앗!”

“비켜라!”

좌관이 일갈을 터뜨리는 것과 동시에 커다란 도를 횡으로 휘둘렀다.

쩌쩌어엉!

“크웃!”

츠츠츠츳!

겨우 도를 막아낸 반철룡과 여추백이 뒤로 다섯 장이나 밀려났다.

좌관은 거침이 없었다.

그대로 예홍 앞까지 다다른 그가 커다란 도를 들어 올리더니 수직으로 내리쳤다.

“뒈져라!”

쩌어어엉!

도검이 부딪친 순간 좌관은 눈을 부릅떴다.

그의 도를 막은 자는 예홍이 아니었다.

어느새 그 옆으로 나타난 적비연이었다.

‘대체 어느 틈에?’

분명 자신이 반철룡과 여추백을 날려 보낼 때만 해도 적비연은 말 위에 앉아 있었다.

한데 순식간에 예홍 곁에 나타나 검을 뻗어 도를 막은 게 아닌가?

이 순간 좌관뿐만 아니라 지켜보던 모두가 놀란 표정을 금치 못했다.

심지어 극마까지.

-호오, 그새 보법이 발전했군!

‘수중 싸움 도중 깨달은 게 있었지.’

동추추와 사투를 벌이면서 뜻밖에도 보법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

운신이 자유롭지 못한 물속에서 최대한 빠르게 움직이려고 하다 보니 보법의 흐름에 대해 뭔가 얻은 것이다.

그날부터 적비연은 말을 타고 이동하는 동안 내내 머릿속에 떠오른 깨달음을 세밀하게 다듬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그 결과를 실전에서 처음으로 써먹은 것이다.

‘확실히 빠르긴 하군.’

-보법 이름은 뭐냐?

‘벽력활보(霹靂闊步).’

-과연. 벽력검법에 맞춰보려는 건가? 그럼 좀 더 다듬어야겠는데?

‘그럴 생각이야.’

어쨌거나 벽력활보로 이만한 성과를 낸 건 고무적이었다.

스카앙!

적비연이 검을 휘두르자 좌관이 뒤로 훌쩍 물러나며 눈살을 찌푸렸다.

“네놈은?”

“후배, 만검가 하천웅입니다.”

“흥! 네놈이 그 말 많고 탈 많던 하씨 놈이구나! 만검가의 개망나니라더니 칼은 제법 쓰나 보구나!”

“칭찬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이제 겸손을 배울 차례다!”

파밧!

좌관이 순간 경공술을 펼치면서 적비연의 품을 파고들었다.

쒸에에엑!

어느새 코앞까지 다다른 좌관이 커다란 도를 사선으로 휘둘러왔다.

까앙!

청명한 금속성에 이어 좌관의 도가 뒤로 튕겨졌다.

그의 두 눈이 퉁방울처럼 커진 순간, 적비연이 왼손으로는 좌관의 어깨를 잡아 끌어당겼고 오른손으로는 검파로 좌관의 가슴을 쳤다.

탁, 퍼억!

“크읏!”

촤아아앗!

좌관이 뒤로 한참이나 미끄러지며 물러났다.

“부주님!”

뒤에 서 있던 무인들이 얼른 달려와 좌관의 뒤를 받쳐주었다.

가까스로 쓰러지지 않고 버틴 좌관이 이를 빠득 갈고는 적비연을 노려보았다.

“이놈……!”

“본 맹과 은원을 풀고 싶다면 그 당사자를 직접 찾아가심이 옳지 않겠습니까?”

“뭣이?”

“아무것도 모르는 후배에게 화풀이를 해봐야 은원이 풀리진 않을 텐데요.”

“네놈이 뭘 안다고 멋대로 씨불이는……!”

“그러니까 하는 말입니다.”

“뭐라?”

“뭣도 모르는 후배 괜히 괴롭히지 마시고, 은원에 직접 연관된 자를 찾아가시지요. 그럴 용기가 없다고 애꿎은 후학만 괴롭혀서야 체면이 서시겠습니까?”

“저, 저 쳐 죽일……!”

좌관은 이제 입에 거품을 물기 직전이었다.

그가 자신을 부축하는 수하들을 뿌리치며 말했다.

“노옴, 본좌가 오늘 네놈을 죽이지 않으면…….”

“그만두시지요. 몸도 성치 않으신 듯한데.”

“뭣?”

“폐에 염증이 깊습니다. 그걸 억누르느라 내공도 원활하게 사용하시지 못한 듯한데, 그래서야 더 싸워봐야 의미가 없습니다.”

“그걸 네놈이 어찌……?”

‘어찌 알기는? 신의의 기억이 있으니 알지.’

조금 전 좌관의 어깨를 잡아당길 때 그의 혈맥 흐름과 호흡소리로 대충 눈치챘다.

물론 워낙 짧은 순간이라 정확하진 않았다.

하지만 혈색과 목소리만 보아도 몸이 성치 않다는 건 분명했다.

‘뭐, 이렇게 구체적인 건 대충 넘겨짚은 거긴 하지만.’

넘겨짚어서 맞으면 잘된 거고, 틀렸다면 격장지계로 이용할 생각이었다.

한데 다행히 맞은 모양이었다.

“맥문동과 반하, 찹쌀과 인삼 등을 넣고 달인 약을 꾸준히 복용하시지요. 차도가 있으실 겁니다.”

“흥! 이미 그러고 있다!”

“역시 주변에 훌륭한 의원을 두고 계시군요.”

“시끄럽다! 네놈이 아부를 한다고 본좌가 그냥 물러설…….”

스윽.

반철룡이 다시 막아섰다.

“부주님. 더 이상 본대를 곤란하게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좌관이 어금니를 꾹 깨물고는 노려보더니 이내 몸을 휙 돌렸다.

“내 오늘은 물러가지만 다음에 다시 보게 될 날은 네놈들의 목을 내놔야 할 것이다!”

그제야 반철룡과 여추백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한편 재미있는 구경을 하지 못하게 된 극마가 입맛을 쩝쩝 다셨다.

-그냥 콱 죽여 버리지 그랬냐? 후환은 없애 버리는 게 좋다고 하지 않았더냐?

‘그랬다간 모든 사파 무인들이 벌떼처럼 달려들걸? 그 피곤함을 어찌 감당하려고?’

-흐음. 하긴. 오히려 후환을 더 만드는 꼴이 될 수도 있겠군. 그러고 보면 주인도 생각이 꽤 깊단 말이야.

‘네가 단순한 거겠지.’

한편 좌관이 수하들을 거느리고 물러나자, 반철룡이 다가와 사과했다.

“어찌됐건 본 련의 영역에서 일어난 일이니 사과드리겠소. 하지만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자주 있을 거요. 본대가 최선을 다해 비호하겠지만 각자가 각별히 주의해 주시기 바라오.”

“알겠소.”

적비연이 대충 대답하자, 현청이 감탄하며 다가왔다.

“하 대협, 의술에 대한 조예도 깊으시군요. 정말 소제를 여러 번 놀라게 하시는군요.”

“그러게요. 저도 이번엔 좀 놀랐어요.”

임송화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적비연이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뭐, 한때 아상 어르신이 절 손주처럼 여겨주셔서 어깨너머로 많이 배웠소. 하지만 적 가주님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오.”

-하! 그 와중에 또 챙기는구나.

‘그게 진짜 나니까.’

한편 임송화는 예홍에게도 다가가며 말했다.

“순발력이 장난 아니던데? 하 가주님 호위 무사인 줄 알았어. 혹시 너 하 가주님을 좋아…….”

말을 꺼내던 그녀가 예홍의 중얼거림을 듣고는 딱 멈췄다.

“틀렸어…… 우린 다 죽을…… 거야. 결국 여기가…… 우리 무덤…… 이런 식으로 계속 노려지면…… 언젠간 죽는 거야…… 다 끝났어…… 내 삶은 여기까지…….”

그제야 임송화가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역시 친해지기 싫은 부류랄까?’

* * *

호랑이 가죽으로 덮인 태사의에 거구의 사내가 앉아서 서신을 펼쳐 들고 있었다.

팔뚝 하나가 웬만한 사내의 허리통만한 그는 바로 녹림삼십육채(綠林三十六寨)의 주인인 투왕 추야성(秋夜星)이었다.

덩치가 어찌나 큰지 앉은 상태의 키가 웬만한 남성이 서 있는 높이만큼 될 듯했다.

한참을 진지하게 읽던 그가 어느 순간 서신을 와락 구겼다.

“흥! 이놈은 끝까지 날 투왕이라고 부르는군! 어이, 애송이 놈!”

추야성이 버럭 소리 지르자, 그 앞에 엎드려 있던 사내가 어깨를 움찔거리고는 고개를 들었다.

“예?”

그는 바로 선귀단 부단주 장무령이었다.

“가서 전해라! 나는 투황(鬪皇)이고! 네 주인 놈이 수왕(水王)이라고!”

“알, 알겠습니다.”

“알았으면 꺼져.”

“예?”

“내 말이 말 같지 않느냐!”

추야성이 다시 소리치자 광활한 실내가 쩌렁쩌렁 울렸다.

“아, 아닙니다! 하지만 서신에 대한 답을…….”

“흥! 일 없다! 본채가 흑천련과 반목해서 얻을 게 뭐가 있다고 그런 일에 나설까? 가서 호칭이나 제대로 알고 있으라고 전해라!”

“하, 하지만 총채주께서는…….”

“일 없다니까! 가서…….”

“노옴! 선대의 은덕을 잊었는가! 배은망덕한지고!”

갑자기 장무령이 버럭 소리치자 추야성이 이맛살을 구겼다.

“뭐?”

“……라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우리 총채주님께서요.”

선대의 은덕이란 과거 정사대전에서 수로채가 녹림을 도와준 것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원래 녹림십팔채는 호북 녹림산(綠林山)에 거점을 두고 있었지만, 정사대전이 발발하면서 녹림도 그 피해를 모면할 수는 없었다.

이에 전멸 위기까지 내몰렸던 그들을 도운 것은 장강수로십팔채였다.

그들이 녹림을 배에 태워줌으로써 정파 무인들의 추살을 피해 이곳 절강성의 천목산(天目山)까지 올 수 있게 된 것이다.

천목산에 새로운 거점을 마련한 녹림은 다시 세를 불리기 시작해서 지금은 삼십육채까지 두게 되었다.

“끄음. 당시에는 수로채 입장에서도 본채의 힘이 필요했던 것. 어디까지나 필요에 의해서 본 채를 도운 것이니 은덕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애매한 부분이 있지.”

“듣자듣자 하니 아주 개망나니가 따로 없구나! 내 네놈이 그딴 식으로 말할 줄 알았다! 하지만 분명 본 채가 아니었다면 녹림은 진작 전멸했을 것을! 그 사실조차 부정한다면 네놈은 쓰레기 중에서도 개쓰레기다!”

“뭐야? 이 자식이……!”

“……라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분명 투왕, 아니, 투황께서 그리 말씀하실 거라면서…….”

“끄음. 그나저나 수왕도 많이 약해졌군. 집 나간 암코양이까지 챙기려 들다니.”

“흥! 그 언젠간 네놈이 집 나간 개새끼를 챙기려고 할 땐 본 채가 친히 도와주겠다.”

“너, 이 새끼…….”

“……라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분명 투황께서 그리 말씀하실 거라고 짐작하시면서…….”

“끄으음. 웃기지 말라고 해! 내가 키우는 새끼들은 절대 집을 떠나지 않는다! 내 새끼들은 집을 떠날 때 그냥 떠날 수가 없거든. 손모가지를 걸어야만 하지.”

그러자 장무령이 등에 매고 있던 목함을 쿵,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추야성이 미간을 구기는데, 장무령이 목함 덮개를 열었다.

“헉.”

추야성이 헛바람을 삼켰다.

목함 안에는 잘려 나간 팔이 들어 있었다.

장무령이 입매를 비틀어 올리며 말했다.

“손모가지? 훗! 우리 새끼는 팔모가지를 걸고 갔다. 그만큼 강단이 세다는 거다, 이 새끼야.”

결국 추야성이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너 이 새끼! 솔직히 말해! 그거 그 새끼가 말한 게 아니라 지금 네가 나한테 말하는 거지? 어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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