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94화 (95/301)

94. 하나가 가니 또 하나가

장무령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진, 진짜로 총채주께서 하신 말씀이십니다. 믿, 믿어주십시오! 저는 그저 시킨 대로만 전했을 뿐입니다!”

“닥쳐라! 아까부터 네놈 표정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내 당장 네놈의 모가지를 비틀어…….”

추야성이 단상을 내려오려는데, 지금껏 태사의 옆에 서서 조용히 있던 사내가 웃으며 제지했다.

“고정하시죠, 투황.”

그는 딱 ‘기생오라비’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곱상하게 생긴 사내였는데, 언뜻 화려한 옷차림으로 보나 부드러운 인상으로 보나 녹림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외모였다.

추야성은 그의 말에 마지못한 듯 의자에 앉아서는 씨근거렸다.

“흥! 내 넓은 아량으로 한 번은 봐주는 줄 알아라!”

“감, 감사합니다. 하나 진짜로 총채주님께서 시킨 대로 전했을 뿐인데…….”

“혹시 그놈이 네 모가지도 걸라고 시키지 않더냐?”

“그, 그런 말씀은 없었사옵니다.”

장무령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간신히 대답했다.

추야성은 그런 장무령을 탐탁찮은 시선으로 응시하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계수야.”

“예, 투황.”

조금 전 추야성을 말렸던 미공자 미계수(米稽秀)가 생글생글 웃으며 대꾸했다.

추야성이 그를 힐끔거리고는 툭 던지듯 말했다.

“가봐라.”

“투황, 그 말씀은…….”

“그 암코양이가 팔모가지를 걸었다잖냐? 넌 손모가지라도 걸 수 있어?”

“제가 왜요?”

따악!

순간 추야성이 솥뚜껑만 한 손으로 미계수의 뒤통수를 냅다 후려쳤다.

그 모습을 지켜본 장무령은 눈알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아얏! 왜 때리십니까?”

“깡다구가 없어, 깡다구가. 저쪽 집안은 팔모가지를 걸고도 복수하겠다는데. 네놈은 그깟 손모가지 하나 못 걸어?”

“그럼 제 손모가지 걸고 녹림채 나갈까요?”

휙!

추야성이 다시 솥뚜껑만 한 손으로 미계수의 뒤통수를 후려쳤지만, 이번에는 미계수가 조금 더 빨랐다.

그가 이미 한 걸음 물러나서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걸핏하면 폭력. 그러니 수하들이 잔뜩 겁먹고 가까이 다가가질 않죠.”

“무릇 군주란 두려움으로 통치하는 법이다.”

“어디서 그런 개똥 같은 철학을 주워 들은 겁니까?”

“너 이 자식이 정말!”

“하하, 농담입니다. 그래도 좀 부드러운 통치력을 발휘해 보세요. 저쪽 집안은 저리도 부드럽지 않습니까?”

“흥! 그건 네놈이 수왕 그놈을 몰라서 그렇다! 그놈이 얼마나 성질머리가 더러운데.”

“흐음.”

미계수가 침음을 흘리고는 목함에 든 팔을 힐끗 보더니 어딘지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뭐,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하여튼 네놈은 꼭 대들 때만 깡다구가 있지.”

“그거라도 있으니 다행 아닙니까?”

“시끄럽다! 잔말 말고 가서 거들어라. 수왕이 이렇게 고개 숙이고 부탁하는데 들어줘야 하지 않겠냐?”

“고개 숙인 적은 없는 것 같은데요?”

“계수야.”

“예, 투황.”

“이리 와.”

“싫어요.”

“말 안 들을래?”

“또 때릴 거잖아요.”

“흥, 눈치는 빨라가지고.”

추야성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무튼 가봐라. 솔직히 너도 가고 싶었잖느냐?”

그러자 멈칫거린 미계수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제가 왜요?”

“내가 네놈을 모를 줄 알아? 일전에 네놈이 저 암코양이랑 쿵짝쿵짝 어울릴 때부터 알아봤다.”

“쿵짝쿵짝은 무슨. 도통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

“흥! 네놈만 눈치가 빠른 줄 알지? 아무튼 그건 그렇고. 너!”

추야성이 대뜸 장무령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예? 아, 예!”

추야성이 그를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이걸로 더 이상 수로채와 은원관계는 말끔히 정리된 것이다! 더 이상 선대의 은원을 운운하는 건 용납하지 않는다!”

“일없다, 새끼야.”

“뭐, 뭣?”

“라고…… 전하라고…….”

“이 개새끼가 진짜!”

“투황, 참으시라고요!”

“비켜! 나와! 내가 오늘 저 새끼 모가지를 비틀지 않으면 사람 새끼가 아니다!”

성난 황소처럼 길길이 날뛰는 투왕을 보며 장무령은 그저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진짜…… 시킨 대로 전한 건데…… 흑…….’

* * *

확실히 반철룡의 말대로 무림맹 사절단이 사파 권역에서 이동하는 일은 쉽지만은 않았다.

십 리가 멀다 하고 암기나 화살이 날아들었고, 대뜸 비무를 요청한다면서 앞을 가로막는 일도 예사였다.

그때마다 흑룡대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며 사절단을 비호했다.

비무를 신청한 사람들은 대부분 반철룡이 직접 설득해서 돌려보내곤 했는데, 그들 대부분은 련주의 방침이라는 말에 어쩔 수 없이 수긍하곤 했다.

그렇게 절강성으로 들어선 무림맹 사절단이 이제 천목산에 다다랐을 때였다.

반철룡이 무림맹 사절단을 향해 각별히 주의를 주었다.

“이제부터는 천목산 영역이오.”

“천목산 영역은 또 다릅니까?”

단휘의 질문에 반철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목산은 녹림채의 총채가 있는 곳이오. 그런 만큼 흑천련에서도 천목산은 건드리지 않소. 바꿔 말하자면 천목산에 들어서는 순간…….”

“녹림채가 공격해 와도 막을 명분이 사라진다는 뜻이지.”

적비연이 잇는 말에 반철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반철룡이 적비연을 물끄러미 보았다.

‘정말 이상하군. 마치 본 련의 영역에 수십 번은 드나들었던 사람처럼 잘 파악하고 있잖아?’

비단 이번뿐만이 아니었다.

적비연은 이곳으로 오는 동안 지형지물을 꽤나 자세히 알고 있는 듯했다.

‘둘 중 하나다. 본 련의 정보가 많이 새어 나갔거나, 이미 본 련의 영역에 수 없이 드나들었거나.’

하지만 자신이 아는 한 만검세가의 이 공자였던 하천웅은 장사를 벗어난 일이 거의 없었다.

그렇다면 역시 정보 유출일까?

아무리 그래도 단지 들은 정보만 가지고 이렇게 빨리 적응할 수 있는 건가?

가보지도 않은 길을 말로만 듣고 척척 찾아내는 것뿐만 아니라, 특징 있는 전각의 대략적인 위치와 유명한 식당이나 요리 종류까지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뭐, 그것이 딱히 흑천련의 기밀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기에 굳이 신경 쓸 건 아니었지만…….

‘참 묘한 사내야.’

생각을 삼킨 반철룡이 천목산을 가리키며 말했다.

“보다시피 산세가 워낙 험하니 넘어가지는 않을 거요. 그랬다간 녹림의 표적이 되기도 쉬울 테니. 그렇다고 돌아가기에는 너무 비효율적이니 기슭을 따라 최대한 빨리 둘러서 가겠소. 천목산만 지나면 강이 나타나니 배를 타고 이동하면 한결 편해질 거요.”

“그럽시다.”

적비연의 대답에 일행들이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숲길을 따라 한참을 이동했을 때였다.

마침 저만치 앞쪽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림맹 사절단과 흑룡대가 멈칫하고는 상황을 주시했다.

반철룡이 얼른 적비연에게 다가왔다.

“아무래도 문제가 있는 것 같소. 다른 길로 돌아가는 게 어떻겠소?”

“여기서 다른 길이면 한참을 둘러가야 하지 않소?”

역시 적비연은 천목산의 지리마저도 잘 알고 있었다.

반철룡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소. 하지만 녹림채와 맞닥뜨리는 것보다는 나을 듯한데.”

“이미 늦은 것 같소만.”

“음?”

그제야 이상한 낌새를 챈 반철룡이 미간을 찡그리고는 전방을 돌아보았다.

병장기 소리가 멈췄다.

더 이상 비명도 들리지 않았다.

대신 누군가 이쪽으로 달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저만치 나지막한 언덕을 넘어 한 사내가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제법 잘생긴 청년이었는데, 깔끔한 옷차림에 단정한 외모로 볼 때 돈 많은 집의 귀공자쯤으로 여겨졌다.

다만 가슴이 피로 흥건했고, 머리카락도 피에 젖어 뺨에 진득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그가 적비연 일행을 발견하더니 반색을 하며 소리쳤다.

“아아! 살려주세요! 도와주십시오! 산, 산적 놈들이……!”

쿠당탕탕!

어찌나 급하게 뛰었는지 발을 헛디딘 사내가 비탈길을 따라 굴러 떨어졌다.

겨우 몸을 일으킨 그가 가장 앞에 선 적비연에게 다다르자 털썩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대협! 저 좀 도와주십시오! 산적들이 나타나서 본가의 수송 물자를 전부 약탈하고 제 목숨마저 노리고 있습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언덕 위쪽에 한 무리의 무인들이 칼을 들고 나타났다.

“노옴! 어딜 도망가느냐?”

“음? 네놈들은 누구냐!”

흉흉한 기세를 뿜어내는 무인들이 적비연 일행을 보고는 경계를 했다.

곧이어 그들이 경공을 펼쳐 날아와 귀공자를 사이에 두고는 대치했다.

그들이 녹림의 무인이라는 것을 알아본 반철룡이 적비연에게 전음을 날렸다.

[모른 척하는 게 좋겠소. 괜히 엮였다간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릴 수도 있소.]

[뭐, 같은 생각이지만 이미…….]

적비연이 전음을 보내는 사이에 벌써 무리 앞에 나서는 자가 있었으니,

“이놈들! 남의 재물을 약탈하면서 오히려 큰소리를 치다니! 하늘이 두렵지도 않은가?”

현청이 검을 뽑아 들고는 쩌렁쩌렁 소리쳤다.

누가 화산파의 도인 아니랄까 봐 꼿꼿하게 선 자세에서는 정의를 지키겠다는 모종의 위엄마저 풍겼다.

하지만 그런 올곧은 소리가 산적들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 됐다! 네놈들이 가진 것도 전부 내놓아라!”

적들이 살기를 드러내면서 한꺼번에 덮쳐들기 시작했다.

“이, 이런! 정의의 이름으로 너희들을 용서하지 않겠노라!”

채채챙! 챙챙!

순간 현청이 검을 섞으며 적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반철룡이 사자후를 터뜨렸다.

“흑천련 흑룡대주 반철룡이다! 본좌를 방해한다면 흑천련의 이름으로 용서하지 않겠다!”

“크하핫! 웃기는 놈들이구나! 정의의 이름과 흑천련의 이름이라니! 오히려 투지가 불타는구나!”

적들이 아랑곳하지 않고 덤벼들었다.

반철룡이 적비연을 돌아보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렇다니까.”

말을 마친 그가 바닥을 차고는 뛰쳐나갔다.

곧 어지러운 칼부림이 이어졌다.

흑룡대원들뿐만 아니라 단휘와 예홍, 임송화까지 어우러져 난잡한 싸움이 일어났다.

‘과연 이젠 산적 나부랭이라고 부를 수가 없는 수준이군.’

게다가 머릿수도 많다.

얼핏 보아도 백 명은 넘을 것 같다.

타앗!

적비연이 바닥을 차고는 무리 중 가장 강해 보이는 중년인에게 날아가 일검을 내질렀다.

만검세가의 절초인 만검합일초식이었다.

쒸에에엣!

쩌엉!

가까스로 적비연의 공격을 막은 적의 수장이 포탄처럼 튕겨 나가더니 나무 기둥에 처박히며 쓰러졌다.

쿠당탕!

“커억!”

내상을 입은 것인지 그가 울컥 피를 토하자 주변의 부하들이 화들짝 놀라며 돌아보았다.

“채주님!”

아마도 그가 삼십육채의 주인 중 한 명인 듯했다.

채주라 불린 중년인이 표정을 일그러뜨리고는 겨우 몸을 일으켰다.

아직은 앳되어 보이는 적비연의 외모에 비해 막강한 내공을 느끼고는 적지 않게 놀란 모양이었다.

적비연이 한 걸음 나서며 포권했다.

“우리는 무림맹에서 온 공식 사절단이오. 귀채의 영역에 무장을 한 채 발을 들인 점은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소. 만약 이쯤에서 귀채가 배려해 주어 통행을 허락한다면 말썽 부리지 않고 조용히 지나갈 것이오. 부디 양해를 부탁드리오.”

그러자 극마가 눈살을 찌푸렸다.

-왜 이렇게 정중하냐? 이번에도 모가지를 날려 버리지?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전에도 말했다시피 적을 일부러 많이 만들 필요는 없지. 이미 수로채도 이를 갈고 있는데 녹림채까지 건드리면 곤란해져.’

-그렇군.

한편 채주는 침음을 흘리고는 적비연을 노려보았다.

“크음.”

그러더니 그가 다 잡은 먹이를 쳐다보듯 귀공자를 힐끔거렸다.

“하면 저놈은 우리가 가져간다. 죽이든 살리든 우리 마음대로 하지. 그건 불만이 없을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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