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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무적-95화 (96/301)

95. 초면인데 오랜만이네

“안 됩니다! 제발 저들에게 절 넘기지 말아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귀공자가 눈물까지 글썽이며 매달렸다.

하지만 반철룡은 냉정했다.

[사사로운 정 때문에 대의를 그르치지 마시오.]

[뭐, 나도 그러고 싶소만 이미…….]

현청이 나서고 있었다.

“불가! 도가에 몸을 담은 한 사람으로서 눈앞에서 목숨을 구걸하는 자에게 어찌 모질게 대할 수 있겠습니까? 귀채는 이쯤에서 물러나 주시길 바랍니다. 더 이상의 살상은 빈도 역시 원치 않습니다.”

“흥! 그럴 수는 없다! 굳이 그렇게 나오겠다면 이 자리가 누구의 무덤이 될지 끝까지 가려보자!”

채주의 말에 녹림채 무인들이 저마다 살기를 다시금 피워 올렸다.

스스스스!

그들의 살기만으로 나뭇잎이 흔들리며 떠는 소리를 내질러댔다.

“막통!”

“예, 채주!”

“신호탄을 쏴라.”

“알겠습니다!”

막통이라 불린 자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려고 할 때였다.

“그렇다면 값을 치르겠소!”

반철룡이었다.

그는 사태가 이 지경까지 된 게 영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얼빠진 청년만 저들에게 넘겨주어도 만사가 해결될 문제 아닌가?

한데 왜 굳이 어려운 길을 가는 건가?

‘하여튼 앞뒤 꽉 막힌 정파 놈들이란. 같잖은 위선에 치가 떨리는군.’

하지만 어쩌랴.

련주의 명이다.

어쨌거나 이들이 흑천련 본단에 도착할 때까지는 비호해야만 한다.

그러니 아까운 돈이라도 일단 쏟아부을 수밖에.

적어도 녹림채와 척을 지는 것보단 나을 테니.

지금 흑천련은 사파 하나라도 규합하는 게 중요한 시점이다.

한편 반철룡의 말에 채주가 눈살을 슬쩍 구기고는 물었다.

“값을 치른다?”

“그렇소. 저자의 값을 치르겠소.”

“흐음. 그렇다면 얘기가 좀 달라지지. 얼마를 줄 생각이지?”

“삼천 냥 드리겠소.”

반철룡이 큰마음 먹고 부른 금액이었다.

삼천 냥이면 어지간한 무인들이 일 년 내내 쉬지 않고 임무를 했을 때 벌 수 있을까 말까한 돈이다.

당장 전표로 건넬 수 있는 최고한도이기도 했다.

하지만 채주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뭐? 삼천 냥? 삼천 냐앙? 풋! 크하하하!”

채주가 앙천대소를 터뜨리자 다른 수하들이 키들거리며 웃었다.

잠시 후 채주가 웃음을 뚝 그치고는 버럭 소리쳤다.

“뭐가 웃긴다고 처웃어!”

그러자 수하들이 웃음을 뚝 그쳤다.

채주가 번뜩이는 눈으로 반철룡을 노려보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군. 저놈이 누군지 아는가?”

“누구요?”

“안휘성에서 온 유화상단(柳花商團)의 소단주다!”

“유화상단……? 처음 듣는 곳인데…….”

“흥! 네놈이 처음 듣는 곳일지라도 우리는 익숙한 이름이다! 가진 게 돈 밖에 없는 유화상단의 소단주를 고작 삼천 냥에 넘기겠다고?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지!”

“하면 얼마나 원하시오?”

“유화상단의 소단주 몸값이면 십만 냥은 받아야지!”

“십, 십만 냥이라고 하셨소?”

“그렇다! 삼십만 냥을 부르려다가 참았다!”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러자 귀공자가 자신의 옷에 달린 장신구를 주섬주섬 뜯어내며 챙기더니 목걸이에 귀고리까지 꺼내 들었다.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내어드리겠습니다. 제발 절 놓아주십시오. 돈 되는 건 모두 드리겠습니다.”

“그것들이 십만 냥이냐?”

“그,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전부 합하면 오천 냥은 족히 될 겁니다.”

“흥! 그것만 먹고 떨어져라?”

“하, 하지만 저 때문에 이분들이 십만 냥이나 되는 돈을 갑자기 내어드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 큰돈을 가지고 다니는 무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네놈이 우리에게 와야지. 자, 이리 되었으니 네 발로 기어와라.”

“어, 어찌 그런……!”

이제 유화상단 소단주는 완전히 울어 버릴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보다 못한 현청이 불쑥 나서려고 할 때였다.

적비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러면 어떻소? 공자.”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십만 냥을 내어드리리다. 대신 항주에 도착하면 공자께서 그 돈을 내게 갚아주시오.”

“정, 정말입니까?”

“그렇소. 혹시 어렵겠소?”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유화상단과 제 명예를 걸고 약조드리겠습니다! 반드시 갚아드리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대협!”

“좋소.”

적비연이 대답을 마치고는 품에서 전표 하나를 꺼내더니 휙 집어 던졌다.

그 모습이 마치 십만 냥이라는 거액이 아니라 한두 푼 하는 노리개를 던지는 것만 같았다.

얼떨결에 받은 녹림채 무인이 두 눈을 비비고는 전표를 살펴보았다.

그가 다시 옆에 있는 다른 무인에게 전표를 내밀었다.

아마도 그가 전표의 진위여부를 가리는 눈이 탁월한 모양이었다.

마침내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채주를 돌아보았다.

“십, 십만 냥짜리 전표가 맞습니다, 채주.”

“호오. 그래?”

채주의 입매가 슬쩍 올라갔다.

이리 쉽게 전표를 던질 줄은 그도 몰랐다.

괜히 아쉽다는 생각이 들 때,

“설마 이제 와서 말을 바꾸는 건 아닐 테지! 약속을 지키시오!”

현청이 불쾌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채주가 손을 휘휘 저었다.

“아아, 물론이지. 약조는 지켜야지. 대신 다시는 천목산에 발을 들일 생각일랑 마라. 그때는 십만 냥으로 넘어가지 않을 테니.”

“그때는 빈도도 십만 냥을 고분고분 내고 넘어가지 않을 거요!”

“흥, 그러시든지.”

채주가 피식 웃고는 몸을 돌렸다.

“가자.”

“예, 채주!”

채주의 뒤를 따라 녹림의 무인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자 가까스로 안심을 한 귀공자가 적비연에게 머리를 쿵 찧으며 소리쳤다.

“감사합니다, 대협! 대협의 하해와 같은 은혜덕분에 제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이 은혜 죽어서도 잊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적비연의 귀에 임송화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그런데 십만 냥이라니. 아무리 맹에서 내준 돈이라지만 그리 막 사용해도 될까요?]

[사람을 구하는 일 아니오. 게다가 항주에 도착하면 꼭 갚는다고 하니.]

[흐응. 그렇군요.]

임송화가 묘한 눈초리로 적비연을 바라보았다.

참 알다가도 모를 남자다.

어쩔 때는 이런 일에 절대 나서지 않을 것처럼 냉정해 보이는데, 지금은 또 저리 사람 좋게 굴다니.

그러는 사이 단휘가 유화상단 소단주를 부축해서 일으켜 주었다.

“대체 어찌 된 겁니까?”

그러자 유화상단 소단주가 포권을 취하며 답했다.

“먼저 제 소개부터 하겠습니다. 저는 유화상단 소단주 왕지극(王至極)이라고 합니다. 이번에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물자를 싣고 항주로 가던 길에 그만 도적을 만나서…….”

말을 뱉던 왕지극이 눈시울을 붉히면서 울먹였다.

“가솔들은 모두 천목산을 돌아가자고 했지요. 한데 강호초출인 제가 너무 의욕만 앞서 버렸습니다. 제가 굳이 천목산을 넘어가자고 주장하는 바람에 가솔들이 전부 전멸을…….”

“저런.”

듣고만 있던 현청이 다가와 왕지극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읏!”

왕지극이 통증을 느꼈는지 신음을 흘리자 현청이 당황하며 사과했다.

“아, 죄송합니다. 다치신 걸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가벼운 상처입니다.”

“혹시 살아남은 자는 없습니까?”

“예, 안타깝게도…… 모두 저를 지키려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왕지극의 표정에 다시 그늘이 졌다.

“일단 가보죠.”

임송화가 서둘러서 걸음을 옮겼다.

일행들이 언덕을 넘어가자 과연 상단 행렬이 포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말을 잃은 마차는 박살이 났고, 수레와 상자들도 처참하게 부서져서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사람들은 모두 급소에 치명상을 입고 절명한 상태였다.

왕지극이 비틀거리며 신음을 흘렸다.

“아아…….”

단휘가 얼른 그를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아, 예. 이 지경이 된 걸 보니…….”

“너무 죄책감 가지지 마십시오. 이들을 이렇게 만든 건 그 나쁜 놈들이지 않습니까? 공자께서도 피해자입니다.”

“위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마음이 편치만은 않군요.”

왕지극이 내내 침울한 표정으로 처참한 현장을 둘러보았다.

반철룡이 다가오며 말했다.

“어차피 살아남은 자는 없소. 그럼 가던 길을 갑시다. 공자도 항주까지 간다고 했으니 함께 갑시다.”

“예,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주에 도착하는 대로 은공께 빌린 돈은 반드시 갚겠습니다.”

왕지극이 다시 한번 적비연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적비연이 손을 들어 보이고는 말했다.

“알겠소. 그보다 몸을 좀 봅시다. 많이 다치신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버틸 수 있을 정돕니다.”

그러자 단휘가 다시 나섰다.

“그러지 말고 하 대협께 맡겨보시지요. 의술에도 조예가 깊은 분입니다.”

“아…… 그럼 이따가 저녁쯤 신세를 지겠습니다. 당장은 저도 죽은 가솔들 앞에서 치료하기가 부끄럽군요.”

“그럼 그러시오.”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갔다.

* * *

녹림 총채에 모처럼 시원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크하하하하! 계수 그 녀석은 정말이지 물건입니다. 아니, 어쩜 그놈이 생각한 대로 척척 돌아가는지!”

그는 바로 조금 전까지 적비연 일행과 대치했던 녹림의 천서채주(天西寨主) 조규(朝規)였다.

“그래서 내가 그놈을 예뻐하는 것 아니냐?”

태사의에 앉은 투왕 추야성이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조규가 연신 웃음기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투황, 자그마치 십만 냥입니다. 핫핫! 게다가 그 천호상단(天戶商團)을 약탈해서 거둔 수익까지 합하면 십이만오천 냥입니다. 계수 그 녀석이 천호상단을 그렇게 이용해 먹을 줄이야.”

“해서 그놈은 사절단과 합류했고?”

“예, 지금쯤 왕지극이라는 놈이 되어서는 사람들 혼을 쏙 빼놓고 있을 테지요. 녀석의 말대로 사절단에서 십만 냥을 내놓겠다고 했을 때는 저도 표정 관리가 안 되어서 힘들더라고요. 크크크!”

“이래서 내가 그놈을 미워할 수가 없다니까.”

“투황께서도 참. 그런 놈을 왜 미워합니까? 마누라보다 낫겠구먼!”

“너도 그놈을 옆에 둬보면 안다.”

“크하하! 그나저나 미계수 그 녀석은 인피면구를 써도 잘생긴 건 어쩔 수가 없더군요.”

“그놈이 잘생긴 인피면구만 쓰려고 해서 그런 거다.”

“뭐, 아무렴 어떻습니까? 일만 잘하면 장땡이지요!”

“그건 그렇지. 클클. 이걸로 수왕에게도 체면치레를 하고 본채의 수익도 챙겼군.”

녹림 총채에서 다시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 * *

“이 정도면 충분하겠소. 다행히 상처가 깊지는 않소. 그래도 당분간은 운기조식을 하면서 상처를 빨리 회복하는 게 좋겠소.”

적비연의 말에 비교적 탄탄한 상체를 드러내고 있던 왕지극이 상의를 걸쳐 입었다.

“감사합니다! 의술에 조예가 깊으시다더니 정말 훌륭하시군요.”

“뭐 다행히 상처가 깊지 않아서 내가 한 건 별로 없소.”

“아닙니다. 이만해도 큰 안심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오.”

희미하게 웃어 보이는 적비연에게 극마가 미간을 잔뜩 구기고는 물었다.

-네놈이 웬 일이냐? 안 하던 짓을 다 베풀고. 이런 쓸데없는 호의를 베푸는 건 또 처음 보는군.

‘호의가 아니지. 필요에 의한 거지.’

-필요?

‘좀 알아보고 싶었거든.’

-뭘 말이냐?

적비연이 저만치 걸어가는 왕지극의 뒷모습을 보며 싸늘한 웃음을 그렸다.

‘오랜만에 보는군. 미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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