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96화 (97/301)

96. 몸에 좋은 약이 쓰다

적비연이 던져준 십만 냥이 꽤나 효과가 있었던 건지 천목산을 완전히 돌아 나오는 동안 녹림의 무인들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이윽고 무림맹 사절단이 림안현(臨安縣)의 부둣가에 다다랐을 때 단휘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어쨌거나 다행이네요. 정말이지 그동안 잠시도 긴장을 놓지 못했어요.”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어디에서 암수가 날아들지 몰라서 내심 경계를 풀지 못했습니다.”

현청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두 사람 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랬다.

오히려 천목산에서는 비교적 편했다.

녹림채만 주의하면 될 일이었기에.

하지만 천목산을 벗어나 이곳 부둣가까지 올 때는 다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느닷없이 화살이 날아들거나 암기가 날아들어도 이상하지 않았으니.

여추백이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흥, 이제 본 련에서 구해둔 배를 타고 이동할 것이니 그만 주눅 들어도 될 거요. 사내들이 그리 새가슴이어서 어찌 큰일을 하겠소?”

단휘가 발끈했지만 현청이 말리는 바람에 언쟁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무림맹 사절단은 흑룡대의 안내에 따라 제법 큰 배에 올라탔다.

뱃머리에는 흑천련을 상징하는 검은 깃발이 내걸려 있었다.

단휘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살다 살다 흑천련 깃발을 보고 안심할 날이 올 줄은 몰랐네요.”

“동감입니다.”

현청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 깃발이 내걸린 이상 아무리 제멋대로인 사파 무리일지라도 조심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런데 또 옆을 지나는 여추백이 싸늘한 웃음을 그리며 빈정거렸다.

“명문정파의 후기지수들은 다들 그리 겁이 많은 거요?”

“저……!”

단휘가 다시 발끈했지만 이번에도 현청이 말렸다.

사절단이 선실로 들어서니 산해진미가 한 상 가득 차려져 있었다.

선주로 보이는 자가 굽실거리며 다가왔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차린 건 없으나 모쪼록 맛있게 드셔주시기 바랍니다.”

정말이지 입이 딱 벌어질 만큼 먹음직스러운 요리가 가득했다.

“와아. 그간 고생한 보람이 있군요!”

아닌 게 아니라 지금껏 서둘러 이동한 터라 배가 몹시 고픈 상태였다.

적비연도 침이 절로 넘어갔다.

자리에 앉은 단휘가 제일 먼저 구운 오리 다리를 덥석 집어 입으로 가져가려고 할 때였다.

쒸이익, 푹!

한 줄기 미풍이 날아들더니 오리 다리가 검에 꿰뚫린 채 매달려 있는 게 아닌가?

“으헉!”

깜짝 놀란 단휘가 기겁을 하면서 돌아보니, 검을 내지른 사람은 다름 아닌 예홍이었다.

그녀가 검을 거두는 것과 동시에 오리 다리를 입에 넣고는 맛을 보았다.

단휘가 버럭 소리쳤다.

“야! 너 도대체 뭐하는……!”

“독은 없군요. 이제 드셔도 될 것 같습니다, 가주님.”

“그, 그래. 고마워.”

적비연이 어색한 미소를 짓고는 수저를 들었다.

예홍이 만검세가주에게 ‘가주님’이라고 불렀지만 딱히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저 하천웅의 지위를 부른 것이라 여긴 것이다.

그리고 사절단 대표를 호위하려는 마음에 나선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

다만 여기까지 와서 음식에 독이 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게 의외이긴 했다.

이는 반철룡으로서도 마찬가지.

그가 다소 기분 나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본 련의 공식 손님이기에 최대한 예를 갖추고 있소. 만약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여러분은 이곳까지 발을 들이지도 못했을 거요.”

“미안하오. 이 친구가 워낙 조심성이 많은 성격이라.”

적비연이 미소로 대꾸하자 여추백이 코웃음을 쳤다.

“흥! 조심성도 지나치면 실례가 되는 걸 모르나 보군! 하여튼 위선자들이 생각할 만한 행동이라니까.”

멈칫거린 적비연이 여추백을 빤히 보았다.

“그럼 입장 바꿔 봅시다.”

“뭐요?”

“당신들은 본 맹의 영역에 들어왔을 때 우리가 내어주는 음식을 아무런 의심 없이 먹을 수 있겠소?”

여추백이 턱을 치켜들며 대꾸했다.

“먹을 수 있소.”

“정말이오?”

“그렇소.”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그렇소.”

“그 결과에도 책임질 수 있소?”

“그렇소.”

적비연이 여추백을 빤히 노려보았다.

그 눈빛에는 언뜻 가소로움과 함께 약간의 살의마저 느껴졌다.

‘그리 노려봐야 어쩌겠느냐? 내가 먹을 수 있다는데.’

다음 순간 적비연이 품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잘됐군. 그럼 이것도 드셔보시오.”

탁자 위에 놓인 조그마한 목함을 본 여추백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뭐요?”

“몸에 좋은 거요.”

여추백이 덮개를 열자 짙은 약향이 풍겼다.

한데 그 향이 썩 기분 좋게 느껴지진 않았다.

보통 몸에 좋은 영단은 그 향만 맡아도 머리가 맑아지고 기분이 한결 좋아지게 마련이다.

한데 이건…….

‘뭔가 고약한 냄새로군.’

어딘지 찝찝한 기분.

여추백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적비연을 보았다.

“갑자기 이걸 먹으라고…….”

“왜? 못 드시겠소?”

“누가 그렇다고 했소?”

“그럼?”

“너무 갑작스러워서 한 말이지.”

“그럼 드시오. 그간 본 사절단을 위해 애써주셨으니 사례하는 뜻으로 드리는 거요.”

“끄음.”

“어서 드시오.”

적비연이 묘한 웃음을 지으며 여추백을 보았다.

분위기가 묘하게 돌아가자 선실에는 이상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반철룡이 입을 열었다.

“하 대협, 성의는 고맙소만 본대는 그저 임무에 충실했을…….”

적비연이 손을 들어 그의 말을 제지했다.

“나는 여 부대주께 사례하고 있소. 반 대주는 부디 내 성의를 짓밟지 말아주시오.”

말을 마친 적비연이 여추백을 보며 한쪽 입매를 틀어 올렸다.

여추백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저 표정! 저놈의 저 표정이 불안하단 말이지!’

그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갑자기 이런 걸 내놓을 줄은 정말 몰랐다.

게다가 조금 전 자신을 바라보던 표정에서는 언뜻 살의마저 느껴지지 않던가?

적비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도 드시지 않고? 혹시 망설이고 계시오?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할 테니까?”

“무, 무슨 소리를!”

“그럼 드시라고.”

적비연이 마치 씹어뱉듯이 말했다.

다시금 팽팽한 긴장감이 이어졌다.

강호에서는 말 한마디에 목숨줄이 오락가락한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여추백이 심호흡을 했다.

이쯤 되자 임송화도 불안해졌는지 넌지시 물었다.

“하 대협, 정말 괜찮은 거죠?”

“물론이오.”

“전 하도 하 대협이 엉뚱한 행동을 해서 이번에도 괜히 불안하네요.”

임송화는 진심으로 한 말이었지만, 여추백은 내심 코웃음을 쳤다.

‘흥! 날 겁주려는 속셈이구나. 하지만 속지 않는다!’

마음을 굳힌 여추백이 포권했다.

“하 대협께서 날 이리도 챙겨주시니 고마움에 몸 둘 바를 모르겠소! 하면 하 대협의 선물을 감사히 받도록 하겠소!”

말을 마친 그가 목함에 든 영단을 한입에 털어 넣고는 우걱우걱 씹어 삼켰다.

자, 어떠냐? 먹었다!

여추백이 씨익 웃었다.

“어떻소? 나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먹었소! 이만하면 내가 위선만 떠는 당신들과는 다르다는 걸 인정…… 큽!”

순간 여추백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더니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부대주님!”

“부대주!”

선주와 흑룡대원들이 화들짝 놀라 그에게 다가갔다.

반철룡 역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추백의 눈알이 시뻘겋게 충혈되고 있었다.

“크읍……! 이건 무슨……! 쿠웨에엑!”

겨우 말을 꺼내던 여추백이 한 움큼의 피를 토해내는 게 아닌가?

찰나,

차차차차앙!

흑룡대원들이 사방을 에워싸더니 저마다 칼을 뽑아 들고는 살기를 끌어올렸다.

현청이 놀라서 소리치며 검을 뽑아 들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누가 할 소리를! 대체 부대주가 먹은 게 무엇이오?”

반철룡이 버럭 소리쳤다.

임송화와 단휘, 예홍도 각각 검을 뽑아 들고는 사방을 경계했다.

일촉즉발의 상황.

이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왕지극, 아니, 미계수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생각에 잠겼다.

‘뭐지? 정말 독인가? 그럼 이 사람 진짜 대책 없는 인간이잖아?’

그가 옆에 선 적비연을 올려다보았다.

도대체 사파 영역 한복판에서 어쩌자고 저런 짓을 벌인단 말인가?

하긴 그만큼 무모하니 동추추도 죽인 것이겠지만.

어쨌거나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부대주! 괜찮은가!”

반철룡이 적비연을 겨눈 채로 다시 소리쳐 불렀다.

하지만 얼굴이 하얗게 질린 여추백은 입 가득 핏물을 머금고는 적비연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이 새끼……! 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하지만 적비연의 표정은 냉담하기 그지없었다.

“왜? 후회되시오? 그러게 좀 더 신중했어야지.”

“노옴! 내가 먹은 게 무엇이냐고 물었……! 크읍! 쿠웨에엑!”

여추백이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더니 다시 한번 피를 토해냈다.

검붉은 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자, 반철룡이 험악한 표정으로 외쳤다.

“이놈들! 이게 무슨 짓이냐! 본대가 그리도 예로 대했거늘! 대체 부대주에게 뭘 먹인 것이냐!”

“먹이긴 누가 먹였다고 그러시오? 본인이 직접 먹은 거요.”

“그걸 말이라고…….”

“무엇을 먹었든 본인이 책임진다고 하지 않았소?”

“뭐이?”

“그럼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소? 왜? 이제 와서 또 말을 바꾸시려고?”

이를 지켜본 미계수는 입을 척 벌렸다.

‘와아, 투황보다 막나가는 사람은 또 처음 보네. 혹시 흑천련주를 만나기에 앞서 흑룡대 전체를 인질로 잡으려는 속셈인가?’

한편 바닥에 엎드린 채 부들부들 떨던 여추백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대주…… 그놈…… 조심…….”

말을 마저 잇지도 못한 여추백이 그 자리에서 털썩 엎어지더니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부대주! 추백아!”

반철룡이 거듭 소리쳤지만 여추백은 미동조차 없었다.

결국 반철룡이 일갈을 터뜨리며 바닥을 박찼다.

“죽여 버리겠다!”

까앙!

검과 검이 맞부딪치면서 불꽃이 일어났다.

적비연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읊조렸다.

“자중하시오. 배가 부서지겠소.”

“닥쳐라!”

반철룡이 그대로 몸을 회전하며 검을 횡으로 그었다.

순간 적비연이 뒤로 성큼 물러나더니 탁자를 발끝으로 툭 걷어찼다.

콰자장!

반철룡의 검에 탁자가 갈라지면서 그 위에 마련된 음식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노옴!”

반철룡이 보법을 밟으며 다가오더니 기합성과 함께 적비연을 검으로 내리쳤다.

쩌어엉!

다시 한번 검과 검이 부딪치면서 폭음 같은 금속성이 터져 나왔다.

검을 맞댄 반철룡의 두 눈이 꿈틀거렸다.

‘뭔 내공이 이리도……!’

자신은 두 손으로 내려찍고 있는데, 적비연은 그것을 한 손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곧이어 적비연이 몸을 슬쩍 틀더니 일순 공력을 발출하면서 검을 휘둘렀다.

스까앙!

휘리리릭, 푹!

튕겨 나간 검이 여추백의 머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바닥에 꽂혔다.

척!

어느새 적비연의 검봉이 반철룡의 목젖에 와 닿아 있었다.

“대, 대주!”

흑룡대원들이 저마다 경악해서 외쳤다.

‘이렇게 된 이상……!’

반철룡이 어금니 안쪽에서 뭔가를 꺼내 깨물려는데,

꾸욱.

적비연이 손에 힘을 싣자 검봉이 목을 파고들면서 피가 맺혔다.

적비연이 싸늘한 시선으로 읊조렸다.

“죽고 싶지 않으면 경거망동하지 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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