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몸에 좋은 약이 쓰다
반철룡이 적비연을 노려보았다.
“원하는 게 뭐냐?”
자신을 바로 죽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뭔가 바라는 게 있다는 뜻.
적비연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바라는 건 없소. 단지 그쪽이 먼저 폭력적으로 나오니까 대응했을 뿐.”
말을 마친 적비연이 검을 거두더니 허리춤에 다시 패용했다.
반철룡이 눈썹을 잔뜩 구기고는 그런 적비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리둥절하기는 사절단과 미계수도 마찬가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일 듯이 칼을 휘두르다가 갑자기 왜 검을 갈무리하는 거지?
그런 의문을 풀어주기라도 하듯 적비연이 턱짓으로 여추백을 가리켰다.
“거의 끝난 것 같소.”
그 말에 반철룡이 반사적으로 여추백을 돌아보았다.
다른 사람들 역시 여추백에게 시선을 던졌다.
엎어진 채로 꿈쩍도 하지 않던 여추백이 어느 순간 ‘허업!’ 하는 소리와 함께 숨을 들이마시는 게 아닌가?
반철룡이 눈자위를 꿈틀거리고는 불렀다.
“부대주! 괜찮은가?”
“후우, 후우. 네, 괜찮습니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겨우 대답한 여추백이 한차례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벌떡 일어났다.
“이게 무슨 짓이냐? 내가 먹은 게 뭐냐?”
죽었다고만 생각한 그가 갑자기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니 모두가 놀란 표정이었다.
태연하게 대꾸하는 적비연만 예외였다.
“몸에 좋은 거래도.”
“몸에 좋기는 개뿔! 대체 무슨 독이기에 오장육부가 진탕이 되어서는……! 음?”
말을 쏟아내던 여추백이 자신의 배를 문지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철룡이 긴장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왜 그러나?”
“대주…… 그게 좀…….”
“뭔가?”
“개운한데요?”
“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반철룡에게 여추백이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말했다.
“몸이 가벼워졌습니다. 어라? 내상이…….”
“내상?”
“아, 그게…….”
여추백이 머뭇거리자, 적비연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천목산에서 녹림채와 싸울 때 그는 내상을 입었었소. 심각할 정도의 치명상은 아니지만 그리 가볍지도 않은 내상이었지.”
“그걸 어떻게……?”
말을 꺼내던 여추백이 곧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아, 의술에 조예가 깊다고 했었지. 그렇다고 해도 대주마저 눈치채지 못한 걸 파악하다니 확실히 눈썰미가 대단하구나.’
그가 생각하는 동안 반철룡이 이맛살을 찌푸리고는 물었다.
“하면…… 그 내상이 치료되기라도 했단 거요?”
“그렇소.”
“어째서? 혹시 아까 건네준 그 영단이……?”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벽력적가 산하의 천상단에서 만든 우의청기주(優醫晴氣珠)라는 영단이오. 내상을 입었을 때 복용하면 일각 이내로 탁혈을 토해내고 기를 맑게 해주는 효능이 있소. 물론 치명적인 내상에는 효과가 미미하지만.”
반철룡이 여추백을 휙 돌아보았다.
마치 적비연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여추백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기의 흐름이 원활해졌습니다. 내상이 거의 회복된 것 같습니다.”
“왜 내상 입은 사실을 말하지 않았던 거냐!”
반철룡이 따지듯 소리치자, 여추백이 입술만 꾹 깨물었다.
이번에도 적비연이 입을 열었다.
“아마 자존심 때문이었을 거요. 안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 비호 임무를 맡았는데, 녹림의 무인을 상대하다가 내상을 입었으니 밝히기 꺼려졌을 테지. 지키고 싶지 않은 자들을 지키다가 다쳤으니 짜증도 났을 테고. 그래서 더욱 우리에게 까칠하게 대한 거고. 그렇지 않소?”
“…….”
여추백이 굳은 표정으로 말을 뱉지 못했다.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정말 자신의 속을 돋보기로 들여다본 것처럼 잘 알고 있었다.
적비연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너무 나무랄 것 없소. 그가 다쳤다는 걸 말하지 않은 건 비록 자존심 때문만은 아니었을 테니.”
“그건 무슨 소리요?”
반철룡의 말에 적비연이 대꾸했다.
“비호대의 부대주가 다쳤다면 우리가 불안해할 거라고 생각했을 거요. 또한 흑룡대의 사기도 고려했을 테고. 내 생각에는 그에 대한 배려가 컸다고 보오.”
그러자 듣고만 있던 극마가 헛웃음을 지었다.
-하! 저놈이 그럴 위인으로 보이더냐?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놈이?
‘사실이 어떻든 상관없어. 쥐새끼도 너무 궁지로 몰면 고양이를 무는 법이야. 하지만…….’
-하지만 뭐냐?
‘그런 쥐새끼에게 먹을 걸 던져주면 고양이 옆이라도 머물려고 하는 법이지.’
-호오, 과연?
‘뭐, 일단 보자고.’
적비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부대주께 우의청기주를 드린 이유는 그에 대한 보답이었소. 뭐, 상황이 상황인지라 약간의 오해가 있었던 것 같소만.”
적비연이 어깨를 으쓱이자, 머쓱해진 반철룡이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그런 연유가 있는 줄도 모르고 내가 경거망동했소. 대협께서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길 바라오.”
“이해하오. 그리고…….”
적비연의 시선이 이번에는 멍하니 선 여추백에게 향했다.
“과연 여 부대주님은 강단이 있으시구려. 부대주님의 그 소신 있는 선택에 감복했소. 이 하 아무개도 한 수 배웠소.”
“그런…….”
적비연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마 나였다면 끝내 의심하느라 먹지 못했을 거요. 언행일치하는 모습에 진심으로 감복했소.”
결국 여추백이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니다.
자신은 끝까지 믿지 않았다.
이들이 자신에게 선의를 베풀 거라는 건 처음부터 믿지 않았다.
그저 상황을 믿었을 뿐이다.
이 상황에서 이들이 암계를 쓰진 못할 거라고.
한데 막상 몸에 이상이 생기자 제일 먼저 그들을 의심했다.
그런데 치료약이었다고?
게다가 이 정도로 효과가 빠르다면 한두 푼 하는 약은 아닐 게다.
쿵!
마침내 여추백이 무릎을 꿇더니 포권하며 소리쳤다.
“불초 여 아무개가 큰 실례를 저질렀소! 부디 하 대협께서는 이 모자란 소인을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길 바라오!”
“어찌 이러시오?”
적비연이 짐짓 당황한 척하자 여추백이 두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대협을 믿지 못했소! 만약 대협을 진심으로 믿었다면 몸에 이상이 생겼을 때도 그 믿음이 흔들리지 말았어야 했소! 옹졸한 모습을 보여서 부끄럽기 짝이 없소이다!”
“별말씀을 다 하시오. 누구라도 그 상황에서는 그럴 것이오. 이제 일어나 주시오. 내가 짓궂은 점도 있었소.”
그제야 여추백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오늘 받은 은혜는 언젠가 반드시 갚겠소.”
“은혜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은 성의일 뿐이오.”
“목숨을 구하는 것만이 은덕은 아니지 않소? 사람을 위하는 마음에 크고 작음이 어디 있겠소?”
“정 그리 생각해 주신다니 감사할 따름이오.”
적비연도 마주 포권하며 말했다.
한편 단휘는 눈을 멀뚱멀뚱 뜨고는 생각했다.
‘사파 무인들은 걸핏하면 피만 보려고 한다더니…… 다 그런 건 아닌 모양이네.’
이렇게 보면 정파 무인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오히려 시원시원하게 인정하는 모습이 정파보다도 더 호쾌하다.
‘하긴. 그간 만검세가 놈들이 저지른 짓을 생각하면 사파 뺨치긴 했지.’
그래, 결국 진정한 정과 사는 무공 종류가 아니라, 사람의 됨됨이에 따라 나뉘는 것이리라.
그렇다고는 해도…….
[우의청기주는 또 언제 챙긴 겁니까? 제발 좀 사전에 저한테라도 얘기 좀 해달라고요.]
단휘가 전음을 보내자 적비연이 답했다.
[먼 길 떠나는데 비상약은 당연히 챙기는 것 아니냐? 그 정도 준비도 안 했던 거냐?]
[그, 그건…… 끄응.]
[남 탓만 하지 말고 네 준비성을 탓해.]
[그, 그래도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잖아요. 제발 사전에 귀띔이라도 해주세요.]
[그러기에는 느닷없이 일어난 일이잖냐?]
[느닷없다고 하기엔 가주님이 노린 것처럼 보이는데요?]
[눈치챘냐?]
[어휴, 말을 말죠. 그냥 제가 적응하겠습니다.]
[잘 생각했다.]
적비연이 씨익 웃어 보였다.
한편 그런 적비연을 어딘지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는 한 여인이 있었으니…….
‘어쩜. 볼수록 매력이네.’
임송화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머물렀다.
* * *
무림맹 사절단이 탄 배는 밤공기를 가르며 시원하게 나아갔다.
뱃머리에 앉아서 바람을 느끼던 예홍은 문득 등 뒤에서 느껴진 기척에 몸을 돌렸다.
‘가주님……?’
하지만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오는 사람은 적비연이 아니라 임송화였다.
“어? 방금 너 실망스러운 표정이었지?”
“무슨 소린지.”
예홍이 시큰둥하게 대꾸하자 임송화가 호들갑을 떨었다.
“내가 봤어! 정확히 봤다구. 기척을 느껴서 돌아볼 땐 저 달덩이처럼 밝은 표정이었는데, 나란 걸 확인하자마자 완전 세상 다 끝난 표정이었다니까.”
“기분 탓이다.”
“풋. 어련하시겠어?”
예홍이 찌릿 노려보았지만, 임송화는 반응도 하지 않은 채 달을 올려다보았다.
“밝은 밤이네.”
“…….”
“무슨 생각 하고 있었니?”
“물고기 밥이 되는…….”
“아아, 그만! 질문 취소.”
“변덕이 심하군.”
“그건 변덕이 아니라……! 휴, 됐다. 그만하자. 어쨌든 네 생각 따위는 궁금하지 않아.”
“그렇겠지. 아무도 내 생각 따위는 관심 없을 테니까. 나 같은 건 그냥 이대로 물에 빠져…….”
“그만! 내가 잘못했어. 그만 들을래.”
임송화가 기겁을 하며 손을 저었다.
정말이지 다루기 힘든 성격이다.
왜 이렇게 혼자만 뚝 떨어져서 지내는지 확실히 이해가 된다.
그래도 해결할 건 해결해야겠지!
마음을 굳힌 임송화가 심호흡을 하고는 예홍을 돌아보았다.
그런 임송화를 예홍이 빤히 마주 보다가 물었다.
“드디어 날 죽이기로 결심한 건가?”
“전혀! 이야기가 왜 그렇게 되는데?”
“뭔가 결심한 표정으로 날 노려보기에.”
“도대체 어떻게 자라면 너처럼 부정의 화신이 될 수 있는 거야?”
순간 예홍의 눈빛이 처연해졌다.
그녀가 일렁이는 강물을 보며 대꾸했다.
“별건 없지. 그냥…… 지옥을 살면 되니까.”
아…… 역시 괜히 물었다.
그래,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꺼내자.
‘이런 애와 오랫동안 같이 있다간 나도 모르게 자결해 버릴지도 몰라.’
생각을 굳힌 임송화가 다부진 표정으로 물었다.
“너, 하 대협 좋아해?”
흠칫.
‘역시……?’
질문을 던진 임송화의 가슴이 쿵쾅거렸다.
아주 잠깐 움찔거린 예홍은 예의 그 시큰둥한 표정으로 임송화를 돌아보았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말 그대로야. 사절단 대표로 함께 온 만검세가주 하천웅 대협을 좋아하냐고.”
“그걸 왜 묻지? 그분을 죽일 생각인가?”
“아니! 이야기가 왜 그렇게 되냐고!”
“새삼스럽게 묻기에.”
아, 이건 도대체 어떤 논리로 이해해야 하는 거지?
예홍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사절단 대표님은 좋아한다. 하지만 만검세가주 하천웅은 좋아하지 않는다.”
‘음? 무슨 소리지?’
뜻은 간단했다.
적비연은 좋아하지만, 하천웅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의미.
하지만 이런 내막을 알 리 없는 임송화는 그녀 나름대로 곡해했다.
‘공적으로는 좋아하지만 사적으로는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인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녀가 짐짓 밝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 말 정말이지?”
“그렇다.”
“좋아. 그럼 내가 그 사람 좋아해도 되는 거지? 인간적으로.”
그제야 예홍이 돌아보았다.
“뭐?”
“나, 하 대협이 마음에 들었거든. 물론 이건 비밀이야. 그리고…… 음?”
뭔가 서늘한 기운을 느낀 임송화가 천천히 옆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예홍이 살기를 무럭무럭 피워 올리며 퀭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냥…… 같이 죽자.”
“너, 너, 왜 그래? 야! 멈춰!”
당황한 임송화가 벌떡 일어나 선실 쪽으로 물러났다.
한편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으니…….
배에서 십여 장 떨어진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고 있는 여인.
풀어헤쳐진 머리카락이 강물에 떠 있었고, 섬뜩할 정도로 험악하게 일그러진 표정은 흡사 귀신을 보는 듯했다.
그녀는 바로 동소유였다.
“오늘 밤…… 오라버니의 한을 풀어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