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98화 (99/301)

98. 오해야, 오해!

밤이 깊은 시각.

적비연은 배 후미 쪽의 갑판으로 나왔다.

썰렁한 밤바람이 강줄기를 타고 불어왔다.

‘그럼 슬슬 또 시작해 볼까?’

적비연은 갑판 한쪽에 정좌를 하고 앉은 다음 두 눈을 꼭 감았다.

제일 먼저 체내의 공력을 일주천해 보았다.

모든 기의 흐름이 원활했다.

대주천을 마친 적비연은 소주천을 시도했다.

전신 세맥으로 기운이 뻗어 나가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확실히 구천혈마공을 익힌 후로는 모든 기의 흐름이 시원시원하게 느껴진다.

힘이 생긴 거다.

뿐만 아니라 선천지기를 소모하고 나서 회복도 빨라졌다.

‘신기하군.’

-뭐가 말이냐?

‘정기와 사기는 내 기억상 오랜 기간 처음부터 차근차근 익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섞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마기는 이제 처음 익힌 건데 몸에서 무리 없이 받아들이고 있어. 보통은 공력의 성질이 극명하게 갈려서 충돌을 일으킬 만도 할 텐데.’

-흥! 설마 그게 주인의 재능이라고 생각하느냐?

‘뭐, 내가 타고난 재능이 있는 편이긴 하지만 그 때문은 아니겠지. 혹시 너 때문인가?

그러자 극마가 팔짱을 끼면서 으스대듯 말했다.

-당연한 걸 묻고 있군. 주인이 본좌를 소환했을 때부터 주인과 본좌는 이미 혼이 연계된 것이다. 주인 몸속의 마기가 제멋대로 설치지 않는 건 그 혼이 연계된 본좌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지.

‘과연. 개똥도 약에 쓸 수 있다더니.

-뭐야? 그럼 본좌가 개똥이라는 거냐?

‘뭐 비유적 표현이야.’

-그렇군. 아니, 잠깐. 그러니까 그게 그 말이잖냐! 본좌가 개똥이라는 거잖아!

‘흐음. 조금씩 똑똑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이, 이 주인이……! 감히 날 뭐로 보고……!

극마가 열불이 터지는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적비연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적비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갑판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괜히 힘 빼지 말고 구천혈마검이나 수련해봐.’

-흥! 주인 놈이 하라고 해서 하는 게 아니라, 본좌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다.

잔뜩 골이 난 극마가 갑판 가운데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샤아아아!

한 줄기 미풍이 부는가 싶더니 극마의 손끝에 검 모양으로 유형의 기운이 맺혔다.

검을 들고 선 극마의 모습에서는 더 이상 장난기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가 허공을 가만히 응시하더니 이내 초식을 펼치기 시작했다.

스스슥! 사삿! 팟, 촤아앗!

검붉은 기운이 어느 때는 빗줄기처럼 빠르고 매섭게, 또 어느 때는 강줄기처럼 무겁고 힘 있게, 또 어느 순간에는 성난 파도처럼 패도적이면서도 변화무쌍하게 펼쳐졌다.

구천혈마검 일초식부터 사초식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딱 정해진 초식만을 그대로 펼치는 게 아니라, 중간 중간 변초와 허초를 마구 섞어갔다.

마치 보이지 않는 상대와 실전을 펼치는 것만 같았다.

이를 지켜보는 적비연은 실제로 상대의 움직임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만큼 극마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애매한 부분 없이 확실하고 완벽했던 탓이다.

‘과연…… 마선의 경지에 오를 만도 하네.’

수련이 이어질수록 적비연은 피가 끓는 것을 느꼈다.

단순히 극마의 수련 모습을 보고 마음이 동한 탓만은 아니다.

실제로 혼이 연계되어 있기 때문인지 극마가 저렇듯 수련을 하게 되면 적비연은 검법에 대한 묘리를 자연스럽게 체득할 수 있었다.

비록 수련하는 건 극마였지만, 적비연 본인이 검술을 펼치는 것과 거의 흡사한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이다.

적비연은 일전에 은하란이 해준 말을 떠올렸다.

“극마는 가주님과 보이지 않는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시면 돼요. 그 고리를 따라 기운을 공유하고 있죠. 그래서 가주님이 마공 수련을 하면 그만큼 극마는 강해지고, 극마가 수련을 하게 되면 그만큼 가주님도 강해질 수 있답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

한데 이제는 확실히 느껴진다.

특히 이렇게 극마의 수련을 집중해서 보고 있을 때는 그 효과가 매우 뛰어나다.

한편 적비연이 온 정신을 집중해서 극마의 수련을 지켜보고 있을 때, 선실 쪽에서 몸을 숨기고 남몰래 지켜보는 자가 있었다.

그는 바로 왕지극으로 위장한 미계수였다.

‘흐음. 잠도 안 자고 뭐 하는 거지?’

모두가 잠든 시간 적비연이 선실을 나가는 것을 목격한 그는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따라 나와 보았다.

한데 선미 갑판 쪽에 정좌를 하고 앉은 적비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운기행공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한데 그것도 아닌 것 같다.

두 눈을 부릅뜬 적비연은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면서 뭔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도무지 뭘 보는지 알 수가 없다.

시커먼 허공만 본다.

‘심상수련 중인가?’

하지만 저런 심상수련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보통 심상수련을 하게 되면 두 눈을 감은 채로 한다.

최대한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서다.

한데 적비연은 두 눈을 부릅뜨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진짜로 움직이는 뭔가를 보듯이 눈동자가 연신 움직인다.

심지어 고개까지 돌리면서 무언가를 본다.

그때마다 미계수도 그 시선을 좇아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뭘 하는지 알 수가 없군.’

그런 적비연을 남몰래 지켜보는 또 한 명이 있었다.

선미 난간에서 얼굴을 두 눈까지만 드러낸 여인.

바로 동소유였다.

그녀의 얼굴은 선미에 잔뜩 쌓아둔 잡동사니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그녀 역시 적비연을 보면서 미계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뭘 하는 거지?’

갑판 한쪽에 주저앉아서 꼼짝도 하지 않다니.

그렇다고 내공 수련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귀신이라도 보는 것처럼 눈알만 연신 돌려댄다.

그 모습이 워낙 기이해서 선뜻 공격하기가 어려웠다.

혹시나 함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흥! 뭐하는 건진 몰라도 아직까지 날 찾지 못한 건 분명해.’

내심 확신한 동소유는 암살하기에 가장 좋은 순간을 노렸다.

한편 적비연에게만 보이는 극마는 구천혈마검을 펼치다가 이내 멈추고는 돌아섰다.

-자꾸 지켜보는 게 신경 쓰이는데.

적비연을 두고 한 말이 아니다.

그 뜻을 알아들은 적비연이 피식 웃었다.

‘알았다. 처리하지.’

이 정도면 충분히 도움이 됐다.

심상수련이야 언제든 또 하면 될 테니까.

적비연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은신해서 지켜보던 동소유가 움찔거렸다.

‘기회?’

그런데 적비연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숨어서 보지 말고 그만 나오시오.”

“……!”

동소유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 커졌다.

‘놈이 눈치를 챘어? 어떻게?’

그녀가 채찍 손잡이를 콱 움켜쥐었다.

다시 적비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 나올 거면 내가 가리오?”

‘제길!’

이렇게 된 이상 정면승부였다.

정면승부로도 충분히 이길 자신은 있었다.

게다가 이곳은 강이 아니던가?

오라버니처럼 방심만 하지 않는다면 놈의 목숨을 끊어버릴 수 있으리라.

다만 다른 자들의 방해가 신경 쓰일 뿐.

‘그래, 차라리 저놈 혼자 있을 때 최대한 빨리 처리하자!’

마음을 굳힌 동소유가 막 튀어나가려고 할 때였다.

“하하. 이거 들켜 버렸네요. 죄송합니다. 숨어서 볼 생각은 아니었는데, 워낙 뭔가 집중하고 계신 것 같아서 방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선실에서 잘생긴 남자 한 명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걸어 나오는 게 아닌가?

호흡이 흐트러진 동소유가 얼른 몸을 낮추고는 지켜보았다.

‘저 남자에게 한 소리였나?’

적비연이 피식 웃으며 미계수를 보았다.

“그럴 것 같았소.”

“그런데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고 계셨습니까?”

“내가 죽인 동추추라는 자에 대해서 생각했소.”

순간 동소유가 흠칫거리고는 적비연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되었다.

미계수가 의외라는 듯 물었다.

“설마 동추추라면…… 장강의 미친 물고기…….”

“그렇소.”

“허어! 동추추가 대협의 손에 죽었단 말입니까? 그게 사실입니까?”

“뭐, 그렇소. 운이 좋았소. 다만 그 여동생이 날 죽이겠다고 쫓아오는 중이오.”

숨어서 보던 동소유가 이를 빠득 갈았다.

‘흥! 이미 네놈 목을 내 채찍으로 옭아매는 중이다!’

한편 미계수는 짐짓 놀란 척 말을 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근심이 크시겠습니다.”

“그보다 상처는 어떻소?”

“아, 살펴봐 주신 덕분에 한결 나아졌습니다.”

“어디 한번 봅시다.”

“정말 괜찮습니다. 너무 잘 봐주셔서…….”

“응급처치였을 뿐이오. 상처는 경과가 중요하오.”

“음……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적비연의 단호한 표정에 미계수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돌아서서 웃옷을 벗었다.

탄탄한 상체가 드러났다.

두 사람이 등을 보이고 돌아서자 동소유의 눈빛이 반짝였다.

‘기회다!’

그녀가 은신술을 펼친 채로 서서히 공력을 끌어올렸다.

때가 되면 은신술을 푸는 것과 동시에 적비연을 향해 일격을 날리리라.

단 한 번으로 끝낸다.

그리고 놈의 목을 가지고 돌아가 장강에 던져 오라버니의 넋을 달랠 작정이었다.

미계수의 등을 살핀 적비연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여전하군.”

“예?”

“이 점.”

“무슨……?”

미계수가 미간을 모으고는 돌아보려는데, 적비연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날개 뼈 아래에 나란히 위치한 점 세 개. 흔히 볼 수 있는 건 아니지.”

그제야 미계수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휙 돌아섰다. 아니, 돌아서려고 했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의 움직임보다 적비연의 세침이 더 빨리 요혈에 꽂힌 탓이었다.

푸푸푸푹!

“이게 무슨……?”

당황한 미계수에게 적비연이 싸늘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이쯤 되면 시치미 떼지 말고 정체를 밝히는 게 낫지 않을까?”

적비연의 말에 극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날개 뼈 점까지 알고 있다니. 설마 주인은…… 그런 취향이었냐?

‘무슨 소리야? 칠괴의 기억으로 알고 있는 것일 뿐.’

-허어, 그럼 칠괴 녀석이 남색을…….

‘그만해라. 같이 목욕을 한 적이 있을 뿐이라고.’

-목욕이라…… 날개 뼈의 점과 목욕이라…….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극마가 슬그머니 적비연에게서 멀어졌다.

적비연이 내심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는 사이 미계수는 시치미를 뗐다.

“정체라니 무슨 말인지……?”

“뭐, 말할 생각이 들도록 만들 수밖에 없나?”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미계수가 반문하는 사이, 선미에서는 동소유가 기습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끝냈다.

‘지금이다!’

그녀가 일순 공력을 발출했다.

타앗!

그녀가 바람처럼 몸을 날리면서 적비연의 뒷목을 향해 채찍을 휘둘렀다.

기합성을 내지르지도 않았고, 채찍 특유의 뱀 울음소리도 일어나지 않았다.

‘됐어!’

이걸로 놈은 왜 죽는지도 모른 채 목이 날아갈 것이다.

좀 더 고통스럽게 죽이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일단 확실하게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채찍이 적비연에게 닿기도 전에,

휙!

“허억!”

적비연이 갑자기 돌아서더니 미계수를 앞으로 불쑥 내미는 것이 아닌가?

동소유의 눈이 커졌다.

‘이게 무슨……?’

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흥! 두 놈 다 모가지를 날려주마!’

찰나지간 적비연이 미계수의 요혈에 박힌 세침 하나를 뽑아냈다.

그와 동시에,

차아앙!

미계수가 검을 뽑아 들면서 채찍을 쳐냈다.

그야말로 빛살처럼 빠른 발검술이었다.

조금만 늦었다면 튕겨 날아가는 것은 채찍이 아니라 미계수의 목이 되었으리라.

촤르르르륵!

채찍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더니 다시 춤을 추며 날아왔다.

“죽인다!”

등골이 오싹한 외침에 이어 채찍의 기운이 전신을 난도질하는 듯하다.

아직 적비연에게 어깨가 잡힌 미계수는 이번만큼은 도저히 채찍을 피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제길! 이대로는 진짜 죽는다!’

결국 미계수가 두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잠깐! 소저, 나요! 녹림의 미계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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