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오해야, 오해!
촤아아앗!
채찍이 바닥을 훑으면서 반원을 그렸다.
콰가가가각!
그 바람에 갑판 바닥이 부서지면서 기다란 흉터가 생겼다.
그 흉터는 정확히 미계수의 발끝까지 닿아 있었다.
만약 조금만 더 늦게 방향을 틀었다면 채찍이 그대로 미계수의 몸을 절단 내고 말았으리라.
동소유가 눈매를 씰룩이더니 미계수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표정이 팍 일그러졌다.
“어디서 되지도 않는……!”
파밧!
그녀의 신형이 빛살처럼 날았다.
그녀는 정말 화가 나 있었다.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놈이 나타나서 그 이름을 들먹이다니!
자신도 모르는 자가 자신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려왔다.
그것도 그 이름을 들먹이면서!
“죽엇!”
취리리리릿!
그 어느 때보다도 채찍이 매섭게 뻗어갔다.
마치 붉은 뱀이 혀를 날름거리면서 뻗어오는 것만 같았다.
미계수가 다시 한번 손을 들고 소리쳤다.
“동 소저! 나요! 진짜 내가 미계수요! 그대가 직접 진음신수공(鎭陰身守功)을 전수해 주지 않았소?”
“……!”
그제야 동소유가 손을 살짝 비틀며 반응했다.
그 바람에 매섭게 뻗어가던 채찍이 미계수의 뺨을 얕게 베고는 지나쳤다.
피츗!
허공을 한 번 핥은 채찍은 그대로 동소유에게로 돌아와 팔목에 착 감겼다.
동소유의 눈동자가 떨렸다.
“어떻게 그걸……?”
진음신수공은 동소유가 익힌 흡정미색공(吸精美色功)을 막아낼 수 있는 유일한 운공법이었다.
즉, 동소유가 진음신수공을 익힌 자와 관계를 가졌을 때는 상대의 정기를 흡수할 수 없다.
그녀가 이 진음신수공을 알려준 사람은 강호에서 유일했다.
“당신이 정말로 녹림미검(綠林美劍)?”
동소유의 눈빛에는 아직도 불신이 남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외모도 다른 데다 천목산에 있어야 할 녹림미검 미계수가 왜 이곳에 와 있단 말인가?
미계수가 얼른 말을 붙였다.
“정말이오! 기억나지 않소? 소저가 내게 진음신수공을 알려준 그날 밤, 우리는 므훗한 밤을 보내지 않았소? 그날 달빛에 비친 소저의 몸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소. 그 굴곡진 몸매, 특히 부드러운 가슴과 가느다란 허리, 그리고 새하얀 둔부 왼쪽에는 점 하나가 수줍은 듯…….”
“어이. 계속하다간 오히려 더 죽일 것 같은데?”
보다 못한 적비연이 슬쩍 끼어들었다.
“아……!”
그제야 정신을 차린 미계수가 동소유를 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동소유는 채찍을 콱 틀어쥐고는 당장에라도 일수를 뻗을 것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미, 미안하오, 소저! 다급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그만……!”
말을 마친 미계수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목 언저리의 살갗을 잡아당겼다.
찌이익.
놀랍게도 얇은 살가죽이 떨어져 나오면서 얼굴에서 완전히 벗겨졌다.
인피면구를 벗자 그렇잖아도 잘생긴 얼굴이 달빛을 받아 더욱 깔끔하게 빛나는 듯했다.
“오랜만이오, 동 소저.”
미계수가 쓴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당신 정말로……!”
녹림미검 미계수였다.
동소유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째서 당신이 여기에……?”
“투황께서 보내셨소.”
“투왕이……? 투왕이 왜…….”
“장강에서 집 나간 자식을 좀 돌봐달라고 연통을 보냈더이다.”
“……!”
동소유가 흠칫거렸다.
곧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랬나?
결국 수황이 투왕에게 도움을 청했다는 말인가?
그 자존심 센 수황이?
한편 미계수는 바람결에 흩날리는 동소유의 왼팔을 보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대가를 치르셨구려.”
“법도에 따랐을 뿐.”
“어찌 그러셨소?”
“오라버니는 내게 하나밖에 없는 피붙이였어요.”
“강호에 몸담은 이상 언젠간 닥칠 일이 아니었겠소?”
“그랬겠죠. 하지만 그게 언제든 은원은 따져야 할 일.”
“미안하오. 내가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방해만 됐으니.”
미계수가 쓴웃음을 짓자 동소유가 피식 웃었다.
“됐어요. 어차피 상관없어요.”
“그 말은……?”
“당신은 내게 방해가 안 된단 말이에요.”
“그게…… 무슨 뜻이오?”
이번에는 적비연도 나섰다.
아무래도 상황을 설명해 줘야 할 것 같기에.
“잘 모르나 본데 나는 이자의 요혈 몇 군데에 세침을 박아 넣었다. 한 달에 한 번씩 내게 침을 맞지 않으면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다가 죽는다. 물론 내 신상에 문제가 생긴다면 이자의 목숨도 끝이겠지.”
“그래서?”
“뭐?”
“뭐라고요?”
적비연과 미계수가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되물었다.
동소유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저 인간이 죽는 게 나와 무슨 상관이라는 거지?”
적비연이 눈을 끔뻑이다가 미계수를 보았다.
미계수 역시 멍한 표정으로 적비연을 마주 보았다.
적비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너희…… 둘…… 그렇고 그런 사이 아니었냐?”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아니, 그보다 동 소저! 어찌 그러시오? 설마 아직도 내가 미계수라는 걸…….”
“알아요. 그래서 어쩌라는 거죠? 한때 정분을 나눴다고 동정이라도 품길 바란 건가요?”
이제 미계수는 입을 척 벌리고는 대꾸도 하지 못했다.
저리 냉정하게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지켜보던 극마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뭐냐? 분위기로 보니 저 둘은 별로 친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그럴 리가. 분명 서로 마음이 있었는데…….’
-네가 어떻게 아냐?
‘그야 내가 삼 년 전에 저들의 연서를 전달해 주었으니까.’
-아아. 그런 일이 있었군.
그랬다.
분명 삼 년 전만 해도 두 사람은 죽고 못 사는 사이였다.
수황과 투왕의 사이가 썩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연정을 나눴다.
그래서 그들은 강동칠괴가 오며 가며 들릴 때는 남몰래 연서를 전달해 달라는 부탁을 하곤 했다.
그런데 저렇게 생판 남을 대하듯 하다니.
미계수가 충격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되물었다.
“그럼 우리의 그것이…… 그저 하룻밤 불장난이었던 거요?”
“아니면?”
“허!”
미계수가 허탈한 표정을 짓자 적비연이 미간을 구기고는 물었다.
“너네…… 싸웠냐?”
그러자 미계수와 동소유가 동시에 소리쳤다.
“당신이 뭔 상관이오!”
“당신이 뭔 상관이야!”
적비연이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상관이 없진 않은데.
미계수를 방패로 내세웠는데, 쓸모가 없어졌다면 헛수고를 한 게 아닌가?
미계수는 옆에 적비연이 있다는 것마저 잊고는 물었다.
“대체 무엇에 그리 화가 났소?”
“화라뇨? 난 당신에게 저언혀 화난 게 없는데요? 당신이 어디 가서 뒈지든 말든. 기녀랑 쿵짝쿵짝 떡방아를 찧든 말든. 저어어언혀 상관없어요.”
아니. 누가 봐도 엄청 화난 걸로 보여.
적비연과 미계수는 같은 생각을 하면서 동소유를 보았다.
미계수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소저, 나는 소저가 아니면 안 되오. 대체 뭐가 그리 서운한 건지 말해주시오. 아무래도 오해가 있나 본데…….”
“흥! 오해는 무슨 오해! 그날 나와 자고 나서 곧장 기루를 찾아간 사람이 오해라는 말을…… 치잇! 됐어요. 할 말 없어요.”
동소유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당황한 미계수가 옆을 돌아보니, 적비연이 마치 쓰레기를 보듯 쳐다보고 있었다.
미계수가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아, 그건 정말 오해요! 오해! 그땐 임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잠시 들른 거였소! 내가 미쳤다고 소저와 잠자리를 하고 나서 바로 그런 짓을…… 잠깐, 그럼 설마 내 뒤를 밟았던 거요?”
“네, 그랬어요. 지금 그게 중요한가요?”
“아니, 어찌 그럴 수 있소? 날 못 믿어서 그런 짓을 한 거요?”
“그래요! 결국 당신은 못 믿을 짓을 했잖아요!”
“그게 아니라니까! 나는 임무 때문에 간 거라니까!”
“못 믿어! 안 믿어! 거짓말쟁이!”
이쯤 되자 극마가 빈정거리며 말했다.
-이거 당과라도 빨면서 구경해야 하는 것 아니냐?
‘그러게. 생각보다 흥미진진하네.’
전혀 예상치 못한 진행에 적비연은 지금 상황도 잊은 채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말다툼이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어쨌든 난 당신이 어찌 되든 상관없으니 빠져!”
말을 마친 동소유가 곧장 채찍을 뻗어왔다.
취리리리릿!
붉은 채찍이 마치 장강의 물결처럼 넘실거리며 적비연을 향해 달려들었다.
-피해라!
기습적인 공격에 극마가 소리쳤다.
‘알고 있어!’
적비연이 얼른 벽력활보를 펼쳤다.
파파팟!
순식간에 보법을 밟으며 물러나자 채찍이 아슬아슬한 차이로 허공만 할퀸 다음 돌아갔다.
지켜보던 미계수가 미간을 좁혔다.
‘빠르다!’
하지만 선상이다.
동소유가 작정하고 계속해서 공격을 퍼붓게 되면 결국 목이 날아가는 건 시간문제일 터.
“흥! 쥐새끼 같은!”
동소유가 차갑게 일갈하며 다시 채찍을 뻗어왔다.
취리리리릿!
분명 하나의 채찍임에도 두 개로 나뉘더니 세 개, 네 개까지 나뉘어졌다.
편기(鞭氣)였다.
“헛!”
적비연이 헛바람을 삼키면서 얼른 검을 들어 올렸다.
땅! 투타탕!
채찍 하나는 검에 튕겼고, 다른 세 자루는 몸을 스치며 바닥을 때렸다.
그 바람에 팔뚝과 옆구리의 옷자락이 길게 찢어지고 갑판 바닥이 부서지며 튀어올랐다.
소란이 일어나자 선실에서 무인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웬 놈이냐!”
그들은 채찍을 든 동소유를 보고는 눈을 끔뻑였다.
여추백이 눈살을 잔뜩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장강의 거머리가……?”
설마 장강도 아닌 이곳까지 따라올 줄이야.
여긴 정말 흑천련 앞마당이 아닌가?
“이런 미친……! 수로채는 정녕 본 련과 척을 지겠단……!”
여추백이 소리치는데, 반철룡이 그의 어깨를 잡고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대주님?”
“그녀는 더 이상 수로채가 아니다.”
반철룡이 턱짓으로 나풀거리는 동소유의 왼팔을 가리켰다.
“……!”
한편 적비연은 조금 전 일격을 막아내고는 미간을 좁혔다.
‘어쩌면……?’
분명 강맹한 공격이었지만 어딘지 힘이 빠져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다면 시험을 해봐야겠지!
만약 그녀가 지금 전력을 다한다면 머릿수가 무색해진다.
동추추보다도 강한 여인이다.
게다가 이곳은 선상.
지금 그녀가 나타난 건 흑룡대를 감안해도 충분히 할 만하다는 판단에서일 것이다.
타앗!
적비연이 먼저 몸을 날렸다.
“어딜!”
동소유가 몸을 날리는 것과 동시에 채찍을 후렸다.
취리리리릿!
붉은 편기를 머금은 채찍이 무섭게 날아갔다.
그런데,
퍽!
“우악!”
적비연의 일격을 받은 미계수가 그대로 배 난간 밖으로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첨벙!
동소유가 멈칫하는 사이 적비연이 그대로 검을 내질렀다.
촤자자작!
아슬아슬한 차이로 적비연의 검을 동소유의 채찍이 휘어 감았다.
두 사람의 몸이 바짝 다가섰다.
동소유가 씹어뱉듯이 말했다.
“무슨 짓이냐?”
“방해가 돼서. 어차피 뒈지든 말든 상관없는 자 아니었나?”
“물론.”
“잘됐네. 곧 뒈질 거야. 내가 알기로 저 친구는 자맥질을 할 줄 모르거든.”
“뭐?”
찰나, 적비연이 검을 세차게 휘둘렀다.
차아앙!
튕기듯 물러난 동소유가 난간 위에 착지하고선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미계수가 물에 빠져 연신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동 소…… 꼬로록……! 쿨럭! 살, 살려…… 꼬로록……!”
“저……!”
동소유가 어쩔 줄을 모르는데, 적비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뒈져도 상관없다며? 자, 계속하자고.”
동소유가 이를 빠득 갈고는 적비연을 노려보았다.
“노옴! 두고 보자!”
그녀가 한 서린 외침을 내지르더니 결국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모습을 본 적비연이 씨익 입매를 말아 올렸다.
‘이러나저러나 그 친구 살리겠다면 고분고분해지는 게 좋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