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101화 (102/301)

101. 선을 막 넘네?

“이게 무슨 짓인지? 흑천련에서는 사절단을 이런 식으로 대하는 것이 예인가?”

적비연의 입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종권악이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나는 그대들에게 용무를 물었고, 그대들은 대답을 하지 않으니 정당한 수순을 밟는 것일 뿐이외다.”

“말했다시피 우리는 무림맹을 대표해서…….”

“바로 그게 문제요. 무림맹을 대표한다는 자들이 장로나 임원급도 아니고 이제 갓 용봉으로 뽑힌 후기지수라니. 이는 귀맹에서 본 련을 무시한 처사가 아니겠소?”

임송화가 발끈해서 나섰다.

“흥! 듣다 보니 어이가 없네요! 당신들은 감히 본 맹의 행사를 방해한 것도 모자라 암살까지 시도했으면서 고작 그런 이유로 예를 따진단 말인가요? 다시 말하지만 우린 맹을 대표해서 온 사절단이에요. 그럴 자격이 충분하고요.”

“흐음. 자격이라…… 하면 나도 똑같이 말하고 싶군.”

“뭐라고요?”

“나 역시 본 련의 후기지수 한 사람으로서 귀맹의 후기지수를 맞이할 자격이 있단 말이오.”

“이 사람이 정말……! 지금 우린 단순히 후기지수가 아니라 맹을 대표한 사절단……!”

“좋소. 그럼 그 자격을 한번 보여주실 수 있겠소?”

적비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이 자리에서 비무라도 하잔 말인가?”

“하하. 아무리 그래도 공식 사절단에게 다짜고짜 비무를 청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겠지요. 그런 흉흉한 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오.”

“하면 어떻게 검증하겠단 말인지?”

“검증이라는 까다로운 단어보다는 가볍게 유흥을 즐긴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소만.”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혹시 ‘첨결(尖決)’이라는 놀이에 대해 들어보셨소?”

사절단원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서로를 보았다.

첨결?

처음 듣는 단어였다.

종권악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했다.

“뭐, 처음 듣겠지. 첨결은 강동 지역에서 유행하는…….”

“비무 방식의 일종이지.”

적비연이 말을 잇자 종권악이 미간을 모으고는 고개를 돌렸다.

“알고 계셨소?”

“놀이라고는 하지만 결국 서로의 무공을 가늠하기 위한 수단.”

“호오, 과연 첨결에 대해 꽤 자세히 알고 있는 것 같소만.”

적비연이 어리둥절해하는 사절단을 위해 대략적인 설명을 이어 붙였다.

“두 사람이 일 장 간격을 두고 마주 선다. 그다음 동시에 서로를 향해 검이나 도 또는 권장을 뻗는 방식. 이때 한 보 이상 움직인 사람이 패한다.”

짝짝짝.

종권악이 손뼉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오. 형장께서는 이 놀이를 즐겨보신 적이 있소?”

적비연이 고개를 저었다.

물론 반은 진실이지만 반은 거짓말이었다.

칠괴의 기억에 의하면 첨결을 종종 즐겼으니까.

첨결은 일종의 담력 시험이기도 했다.

두 사람이 겨우 한 장 정도를 벌리고 마주 서게 되면 그 투기가 피부로 와 닿을 정도로 가까운 셈이다.

그 상태에서 서로에게 무기를 뻗는다는 것은 얼핏 목숨을 건 맞대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

속도도 중요하지만 내공도 중요하다.

또한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는 응용력도 중요하다.

임송화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어이가 없군요. 우리가 왜 그런 장난에 응해야 하죠?”

그러자 종권악의 표정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싸늘하게 식었다.

“말하지 않았소? 당신들이 정말 무림맹을 대표할 만한 자격이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다고.”

“우린 이미 맹주님이……!”

“그건 그쪽 사정이고. 우린 우리만의 기준이 있으니까.”

종권악이 팔짱을 낀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만약 첨결에 응하지 않는다면 길을 열어줄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임송화가 다시 따지려는데 적비연이 불쑥 대꾸했다.

“그리 원한다면 하지. 첨결.”

사절단 모두가 적비연을 돌아보았다.

적비연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을 이었다.

“저리도 원하니 한 수 가르쳐 줍시다.”

그러자 현청이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 대협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빈도도 찬성입니다.”

종권악이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잘 생각하셨소. 하면 누가 나서시겠소?”

“제가 해보겠습니다.”

포권하며 앞으로 나선 사람은 뜻밖에도 현청이었다.

내내 조용한 그였지만 그래도 화산파의 수제자였다.

흑천련주의 제자가 이리도 자극을 해오니 그로서도 호승심이 생긴 것이리라.

적비연도 딱히 말리지 않았다.

종권악이 턱짓을 했다.

“봉상(奉相).”

“예, 공자님.”

봉상이라 불린 사내가 앞으로 성큼 나섰다.

그가 현청을 상대할 작정인 듯했다.

봉상이 현청에게 포권했다.

“혈귀대주(血鬼隊主) 봉상이라고 하오. 한 수 가르침을 부탁드리겠소.”

“화산의 현청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 통성명을 하고 나자 종권악이 말했다.

“그럼 이제 각자가 편한 자세를 취해주시오. 단, 이후부터는 단 일보라도 움직이는 자가 패하는 거요.”

말이 끝나자 현청과 봉상이 각자 기수식을 취했다.

현청은 검을 검집에 갈무리한 상태로 자세를 잡았고, 봉상은 도를 꺼내 들어 살짝 내민 상태로 자세를 취했다.

적비연이 현청에게 전음을 보냈다.

[혈귀대주 봉상은 도법의 달인이오. 특히 패도적인…….]

[말씀은 감사하지만 어떠한 정보 없이 제 힘으로 한 번 상대해 보고 싶습니다.]

현청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적비연을 보았다.

‘흐음. 순하디순한 도사인 줄만 알았더니…….’

-순하긴 개뿔. 예로부터 화산은 독하디독한 말코들의 집합소였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건가?’

적비연이 피식 웃고는 전음을 보냈다.

[무운을 빌겠소.]

[감사합니다.]

현청이 부드럽게 웃어 보이자, 봉상이 소리쳤다.

“그럼 시작하겠소!”

“좋습니다.”

현청의 대답을 끝으로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누구도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어느 한 사람이든 손에 힘을 싣는 순간, 그것이 신호가 될 터.

그때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과 같다.

칼의 길이만 따진다면 봉상이 다소 유리하다.

하지만 검기나 도기를 사용하게 되면 길이는 무관하게 된다.

누가 먼저 칼을 뽑아 상대를 찌르게 될 것인가?

아니면 상대의 힘을 역이용해서 균형을 무너뜨리는 방법도 있다.

그러기에 누구도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다.

한편 봉상은 현청을 보면서 내심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화산의 후기지수라더니. 명불허전이로군. 빈틈이 없구나.’

서호의 잔잔한 수면처럼 두 사람 사이에는 고른 호흡만이 이어지고 있었다.

찰나,

쉬이이잇!

먼저 움직인 쪽은 현청이었다.

‘움직엿?’

봉상이 깜짝 놀라서 반사적으로 도를 휘둘렀다.

분명 어떠한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

호흡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한데 현청이 먼저 검을 뽑은 것이다.

쉬까아앙!

“크읏!”

손아귀가 찢어져 나갈 것만 같은 통증에 봉상이 칼을 놓치고 말았다.

휘리리릭, 푹!

튕겨 나간 봉상의 칼이 저만치 정원 바닥에 거꾸로 꽂혔다.

봉상은 굳은 듯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느새 자신의 발은 한 걸음 물러나 있었다.

‘이런……!’

변명할 수 없는 패배.

현청이 포권했다.

“봉 대협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한, 한 수 배웠소.”

봉상은 여전히 충격이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포권을 취하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호오, 저 말코가 한 건 해냈구나. 상대의 흐름이 일정하니 본인의 흐름에만 집중한 게 승패의 열쇠가 된 셈이군.

극마의 말대로였다.

현청도 처음에는 봉상의 기류에만 모든 신경을 쏟았다.

하지만 상대에게서 빈틈을 발견할 수 없게 되자, 오로지 자신의 기운을 최상의 상태로 가다듬는 것에만 신경 썼다.

그리고 빈틈을 노리기보다는 본능이 원하는 순간 공격을 감행했다.

단순한 원리처럼 보이지만 이것이야말로 어려운 경지다.

대게는 긴장감 속에서 의지가 동해도 몸이 따라가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혹은 그 반대이거나.

어쨌거나 첫 대결이 비교적 싱겁게 끝나자 종권악이 입매를 틀어 올리더니 앞으로 나섰다.

“과연 명불허전이오. 매화수검이라는 별호가 어울릴 만한 발검술이었소.”

“과찬이십니다.”

“이번에는 나와 첨결을 해보는 건 어떻소?”

그 말에 흑천련의 무인들이 수군거렸다.

그들도 종권악이 이렇게 일찍 나설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현청이 대답하려는데 적비연이 먼저 한 걸음 나섰다.

“그럼 이번엔 나하고 붙읍시다.”

종권악이 멈칫하고는 적비연을 돌아보았다.

적비연이 희미하게 웃었다.

‘네 속셈을 모를 줄 알고? 직접 나서서 현청에게 부상을 입힐 생각이었을 테지.’

사절단에게 모욕감을 주는 것과 동시에 확실히 기를 죽이겠다는 심산이었으리라.

생각하는 짓이 괘씸하지만 상관없다.

상대가 그렇게 나온다면 이쪽은 이쪽대로 그걸 이용하면 그만일 테니.

종권악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뭐, 좋소. 단, 그냥 하면 심심하니 내기를 해보는 건 어떻소?”

“내기라면 어떤?”

“만약 내가 이기면 당신들 중 한 명은 목숨을 내놓는 거요.”

“……!”

실로 과감한 발언에 사절단 모두 흠칫거렸다.

그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종권악이 웃음을 터뜨리더니 손을 저었다.

“하하하! 농이었소. 뭘 그리 놀라시오? 만약 내가 이기면 당신들의 신병을 본 련이 일 년간 확보하겠소. 어떻소?”

앞선 농담이 워낙 질이 나빴기에 상대적으로 약해 보이긴 했지만, 역시 무리한 내용이긴 했다.

말이 좋아서 신병 확보지 일 년간 흑천련의 뇌옥에 가둬둔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것 아닌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좋소.”

“하 대협!”

불쑥 나섰던 임송화가 화들짝 놀라 적비연을 불렀다.

하지만 적비연은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은 채 대꾸했다.

“대신 내가 이긴다면 뭘 내놓으시겠소?”

“글쎄. 뭐든 말해보시오.”

“혈귀대 전원의 목숨.”

“……!”

이번엔 종권악뿐만 아니라 사절단 역시 놀라서 적비연을 돌아보았다.

적비연이 피식 웃었다.

“뭘 그리 놀라시오? 농이었소. 무림맹 사절단원의 목숨을 농으로 걸었으니, 나도 그 정도는 해야 균형이 맞지 않을까 싶어서. 아니, 좀 더 질렀어야 했나?”

종권악의 눈썹이 꿈틀거리더니 이내 파안대소했다.

“크하하! 아주 재미있는 분이로군. 그래, 진짜로 원하는 건 무엇이오?”

“천만 냥.”

“……!”

이번에도 종권악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흠칫거리고는 적비연을 보았다.

하지만 적비연은 태연했다.

“왜? 너무 많소? 감당하기 벅차시오?”

피식.

종권악이 어깨를 으쓱였다.

“좋소. 그렇게 합시다. 천만 냥 정도면 감당할 수 있소.”

“아, 혹시 몰라서 하는 말인데 두당 천만 냥이오.”

“무슨……?”

“본 사절단 일인당 천만 냥씩이라는 뜻이오. 내가 패했을 때 본 사절단원 전원의 신병이 포함되는 것처럼. 그래야 균형이 맞지 않겠소?”

만약 적비연이 이길 경우 오천만 냥이 된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금액.

종권악의 표정이 슬쩍 일그러졌지만 이내 입매가 올라갔다.

“좋소. 그럽시다. 재미있는 내기가 될 것 같군.”

“그럼 시작합시다.”

적비연이 거침없이 가운데로 걸어와서는 자세를 잡았다.

종권악 역시 삼 장 떨어진 곳에 멈춰 서서는 기수식을 취했다.

두 사람 사이에 곧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괜찮을까요? 일 년간 이곳에 갇힐 수도 있는데…….]

임송화의 전음에 현청이 진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미 주사위가 던져졌습니다. 한번 지켜봅시다.]

한편 종권악은 적비연을 보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건방진…… 뭐? 일인당 천만 냥? 얼마나 가당치도 않은 소릴 떠벌렸는지 깨닫게 해주마!’

다음 순간,

파앗!

그가 검집에서 붉은 빛깔의 검신을 뽑아 들었다.

쒸이이잇!

동시에 적비연도 발검을 시도했다.

쒸에에엣!

쩌어엉!

놀랍게도 두 사람의 검 끝이 정확히 마주치면서 고막을 찢을 듯한 소음이 터져 나왔다.

‘크읏! 뭔 내공이 이리도……!’

종권악은 적비연의 공력에 깜짝 놀라면서 더욱 기운을 끌어올렸다.

다음 순간,

쩌적…… 쩍!

충격과 검기를 버티지 못한 적비연의 검신에 균열이 가는가 싶더니,

콰차아앙!

일순 검신이 산산조각 깨져 나가는 게 아닌가?

종권악의 입매가 비틀어졌다.

‘끝났다, 애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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