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선을 막 넘네?
흑천련주의 삼 제자인 수라혈검 종권악의 검은 수라검(修羅劍)이라는 명칭을 지닌 보검이었다.
현철을 섞어서 만든 검이었는데 어지간한 압력에는 깨지는 일이 없는 명검이다.
하지만 적비연의 검은 평범했다.
무림맹 병기고에 들렀지만 마음을 확 잡아끄는 검을 찾지 못한 탓이기도 했다.
적당히 괜찮은 검도 있었으나 만에 하나 죽은 다음 환생하게 되면 계속 지니고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딱히 욕심을 내지도 않았다.
하지만 역시 두 사람의 공력 대결로 이어지니 검의 강도가 꽤나 중요해진 셈.
결국 적비연의 검이 상대의 검을 이기지 못해 균열이 가면서 깨지고 만 것이다.
종권악은 적비연의 검이 깨져 나가는 순간 확신했다.
‘끝이다!’
이왕이면 이대로 검을 뻗어내면서 상대의 어깨까지 찌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으리라.
쉬이이잇!
종권악의 검봉이 적비연의 왼쪽 어깨를 향해 매섭게 쇄도했다.
콰악!
‘됐다! 음……?’
내심 쾌재를 외치던 종권악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피범벅이 되었어야 할 적비연의 어깨는 멀쩡했고, 대신 왼손으로 검신을 움켜잡은 것이 아닌가?
‘맨손으로……?’
선뜻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종권악의 심중이 흔들렸다.
한편 귀수갑을 착용한 적비연은 순간적으로 왼손에 공력을 실었다.
후우웅!
‘크읏! 이놈이 또 내공으로……!’
종권악이 이를 악다물고 급하게 공력을 끌어올렸다.
정말이지 내공 하나만큼은 무시무시한 상대였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방어에 이미 마음이 흔들렸던 종권악이었다.
적비연이 찔러 들어온 힘을 역이용해서 잡아당기니 종권악의 균형이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제길, 이대로면 질 수도……!’
이윽고 종권악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발이 떨어지려는 순간,
콰당!
거친 소리와 함께 웅장한 흑천궁 정문이 활짝 열리는 것이 아닌가?
곧이어 내공 실린 음성이 터져 나왔다.
“멈추시오!”
모습을 드러내며 소리친 사람은 철접선(鐵摺扇)을 손에 든 중년인이었는데 언뜻 학자풍의 외모를 하고 있었다.
휘리릭!
순간 흑천궁에서 두 명의 무인이 튀어나오더니 적비연과 종권악을 향해 각각 일 장을 뻗어냈다.
퍼펑!
갑작스러운 장력에 떠밀린 적비연이 뒷걸음질을 치다가 겨우 멈췄다.
종권악도 마찬가지.
이에 사절단원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고는 경계했다.
차차앙!
“이게 무슨 짓이에요!”
임송화가 소리쳐 묻자 철접선을 든 중년인이 계단 위에서 포권하며 답했다.
“본 련을 방문한 사절단에게 무례를 사과드리겠소. 그저 쓸데없는 소모전을 예방하기 위해 부득불 나선 것을 양해해주시오.”
“쓸데없는 소모전을 먼저 걸어온 게 누군데요?”
그러자 철접선 사내가 종권악을 한 번 내려다보고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소. 삼 공자, 이런 식으로 무작정 나서면 곤란합니다.”
“하하, 죄송합니다.”
종권악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사과했다.
마침 활짝 열린 정문 안쪽에서 웅혼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놈은 항상 제멋대로구나.”
육합전성!
사방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크게 외친 소리가 아니었음에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위압감이 실려 있었다.
척!
종권악이 순간 한쪽 무릎을 꿇고는 포권했다.
“제자가 주제넘게 나선 것을 사죄드립니다, 사부님.”
사부님?
사절단이 그제야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서로를 보았다.
종권악의 반응으로만 미루어 본다면 육합전성을 흘려낸 이 목소리의 주인이 바로 흑천련주이리라.
마침 목소리가 짐짓 엄한 투로 일러왔다.
“누가 너더러 본 련의 손님을 응접하라 일렀느냐?”
“죄송합니다. 독단적인 행동이었습니다. 벌을 내리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자 철접선 사내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추후 얘기할 일입니다. 공자께서는 우선 손님들을 안내해 주시지요.”
“알겠소.”
대답을 한 종권악이 몸을 일으키더니 사절단을 돌아보았다.
“가시지요. 본 련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지금까지 다소 거만하게 굴던 언행은 찾아보기 힘든 태도였다.
단휘가 툴툴거리듯 전음을 보냈다.
[정말 아쉽네요. 조금만 더 했으면 가주님이 이겼을 텐데요. 그럼 대체 돈이 얼마야?]
[어차피 이 승부는 정해져 있었어.]
[예?]
[일인당 천만 냥이라는 거금을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받아들였다. 왜 그랬을 것 같아?]
[글쎄요. 자만이 아니었을까요?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적비연이 계단을 오르며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자만으로 그리 큰 금액을 걸 수는 없지. 오천만 냥이라면 흑천련의 재정을 휘청거리게 만들 수 있을 만큼 거금이야. 한데 한낱 삼 제자가 그런 거금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는 없어. 아무리 자신만만해도 만약의 경우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 액수란 말이지.]
[하면…….]
적비연이 흑천궁 안쪽을 빤히 노려보았다.
[알고 있었던 거다.]
[예?]
[흑천련주는 알고도 지켜만 본 거다. 아니, 어쩌면 이미 저들끼리 입을 맞췄는지도 모른다.]
[그럼 애초에 이 모든 걸 꾸몄단 말입니까?]
적비연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삼 제자를 이용해서 자신들을 한 번 시험해 보겠다는 심산이었을 거다.
그게 아니면 아예 기를 꺾어놓겠다는 생각이었거나.
련주가 직접 나서기에는 애매했을 테니, 제멋대로인 성격이라고 소문 난 삼 제자를 이용했을 거고.
그리고 이런 상황을 구상한 건 아마도…….
‘흑천련의 총군사 요당(搖當)일 테지.’
적비연의 시선이 철접선을 든 중년인에게 향했다.
철접선을 본 순간 알아보았다.
그가 바로 흑천련이 자랑하는 총군사 천뇌선(天腦仙) 요당이라는 것을.
“아…….”
계단을 완전히 오른 단휘가 저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흑천궁은 정말로 웅장했다.
전각의 규모로만 보면 무림맹의 맹주전보다 두 배 이상은 될 듯했다.
게다가 흑천궁 안에는 붉은 융단이 깔려 있었고, 그 좌우로 원궁전당각의 주인들이 빼곡하게 도열해 있었다.
‘엄청난 사기다……!’
단휘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걸음을 내디뎠다.
흑천궁 안으로 단 한 걸음을 내디뎠을 뿐인데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처럼 떨려왔다.
쿵……!
다시 한 걸음.
쿵……!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사방에서 쏘아오는 사기 때문에 피부가 따가울 지경이다.
옆에서 나란히 걷는 예홍은 연신 부정적인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드디어 호랑이 굴에 들어왔어. 우린 다 죽었어. 정신만 차려도 산다는 건 다 거짓말이야. 제 발로 죽을 장소를 찾아온 거야. 내 무덤치곤 넓은 곳이네. 여기서 가주님과 함께 순장되는 건가? 고통 없이 죽을 방법을…….”
중얼중얼.
하지만 단휘도 그녀의 목소리를 전부 귀담아들을 수는 없었다.
연신 눈알을 좌우로 굴리며 흉흉한 사기를 뿜어내는 사파 무인들을 구경하기에 바빴으니까.
어떤 이는 홀로 뚝 떨어져 있었는데, 그 주위로 보랏빛 기운이 기분 나쁘게 번져 나갔고, 얼굴을 비롯해서 드러난 살갗에는 온갖 벌레들이 기어 다니고 있었다.
아마도 독충으로 독공을 익힌 독인(毒人)이리라.
꿀꺽.
그렇게 융단을 따라 한참을 걸어가니 주렴 너머로 단상이 보였다.
그리고 그 단상 태사의에 앉은 그림자가 얼핏 보였다.
‘저자가…… 흑천련주……!’
너무 긴장한 탓일까?
단휘는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멍한 표정으로 서 있을 뿐인데, 마침 적비연이 한 걸음 나서더니 포권을 하며 말했다.
“흑천련주를 뵙게 되어 영광이오.”
“흐음. 자네는?”
주렴 너머의 그림자가 묵직한 목소리를 꺼냈다.
역시나 사방에서 목소리가 울리는 육합전성이었다.
“본 사절단의 대표이자 만검세가주 하천웅이라고 하오.”
“화산의 제자 현청이라고 합니다.”
“낙양…….”
임송화가 말을 하려는데 주렴 너머의 그림자가 손을 들어 올리더니 말했다.
“무림맹 사절단이 본좌를 찾아온 이유는 무엇인가?”
말을 끊어 기분이 나쁠 만도 하지만 사절단 중 누구도 따지지 못했다.
그만큼 흑천련주의 목소리에는 어딘지 대항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물론 수백 년의 경험치를 쌓은 적비연에게는 예외였다.
“얼마 전 본 맹에서 주최한 천하용봉대회를 알 것이오. 한데 용봉대회 중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었소.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는 걸 좋아하시니,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소. 귀련이 보낸 암살자는 맹주님을 살해하는 데 실패했고 그 자리에서 죽었소. 하나 본 맹 또한 막심한 피해를 입었소. 이에 본 맹은 귀련에 엄중한 책임을 묻는 바요.”
“…….”
장내가 조용해졌다.
대신 사방에서 쏟아져 나오던 사기는 이제 살기로 변했다.
단휘는 전신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나는 것을 느꼈다.
만약 이곳에서 저들이 마음 한 번 잘못 먹었다간 틀림없이 죽으리라.
‘하아, 가주님. 가주님은 죽어도 다시 환생하지만 저희들은 아니라고요. 어쩌자고 그리 당돌하십니까?’
정말이지 울고 싶은 기분.
막상 상상하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분위기다.
그래도 공식 사절단인 만큼 연회도 베풀고, 하다못해 술자리라도 가지면서 부드럽게 이야기가 풀릴 줄 알았건만.
이건 뭐 목 내놓고 막말을 던지는 것과 무슨 차이란 말인가?
마침내 주렴 너머의 그림자가 목소리를 흘렸다.
“후후후. 당돌하군. 만검세가주라고 했나?”
“그렇소.”
“어린 나이에 가주가 되었군.”
“그것이 다 귀련 때문이오. 내 아버지는 당신들이 보낸 살수에게 살해당하셨소.”
“흐음. 그럼에도 남의 일을 얘기하듯 냉정하군.”
뭐, 실제로 남의 일이기도 하니까.
적비연이 속내를 감추고는 단휘에게 다가가 상자를 건네받았다.
쿠웅!
그가 상자를 소리 나게 내려두고는 덮개를 열었다.
그러자 암살자 둘의 수급이 훤히 드러났다.
잘려 나간 머리통을 본 흑천련 수뇌인사들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적비연을 노려보았다.
적비연이 주렴 너머의 그림자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이것이 당신들이 행한 비열한 짓의 증거요. 어찌 책임을 지시겠소?”
생각보다 강하게 말을 뱉자 단휘가 불안한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했다.
‘하아, 가주님. 대체 어쩌자고 그리 밀어붙이십니까? 이러다가 사달이 날 것만 같다고요. 더구나 옆에서 끝없이 중얼거리는 얘 때문에 미쳐 버릴 것 같아요.’
“우린 끝이야. 다 죽었어. 다 죽었어. 다 죽었어. 다 죽었어…….”
예홍은 아까부터 바닥만 쳐다보며 주술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주렴 너머에서 싸늘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후후후. 그래서 자네는 본좌가 어떤 식으로 책임져 주길 바라나? 전해 듣기론 무림맹이 자네에게 협상의 전권을 위임했다고 하니 들어나 보지.”
“내 아버지가 살해당하셨소. 하면 련주께서도 그에 준하는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겠소?”
“그에 준하는 대가? 본좌의 아비 목숨이라도 원하는가? 하나…….”
“꼭 아버지일 필요는 없지.”
“하면?”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 하지 않소이까? 아비도 자식도 없다면 하나 남은 것이 있지 않소?”
“…….”
적비연이 손을 들어 한쪽 곁에 서 있는 삼 제자, 종권악을 가리켰다.
“마침 저기 삼 제자가 있으니 이 자리에서 저자의 목을 받아간다면 본 맹은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