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너구리를 끌어내는 법
단휘가 턱이 빠져라 입을 벌렸다.
정말이지 이 순간만큼 적비연이 원망스러운 적도 없었다.
그렇잖아도 흉흉한 장내 분위기는 이제 살기로 가득 채워져서 숨 쉬는 것마저 힘들 지경이었다.
콰앙!
순간 오른쪽에 도열해 있던 무인 중 하나가 바닥을 장창으로 찍으며 소리쳤다.
“지금 뭐라고 씨불인 것이냐!”
그것을 신호로 여기저기에서 잔뜩 성난 목소리가 마구잡이로 튀어나왔다.
“노오옴! 감히 여기가 어딘 줄 아는가!”
“삼 공자님의 목이라? 하! 네놈 모가지가 무거운 모양이구나!”
“당장 저 녀석을 찢어죽이자!”
“사절단은 뭔 놈의 사절단! 정파 나부랭이들이 언제 우리를 사람 취급이나 했던가!”
“내 네놈들의 피부를 벗긴 다음 바닷물에 담가 사십팔 시간을 절이겠다!”
이쯤 되자 단휘는 거의 악담만으로 혼절할 지경이었다.
비단 그뿐만 아니라 현청과 임송화도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렇게 성난 고함 소리와 욕설이 한참 이어지다가,
“갈!”
순간 내공이 담긴 음성이 터져 나오면서 장내가 조용해졌다.
소리를 내지른 사람은 주렴 옆에 다소곳이 서 있던 총군사 요당이었다.
그가 철접선을 펼쳐 들고는 살랑살랑 부채질을 하며 나직이 말했다.
“련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모두 진정해 주십시오.”
“끄음……!”
흉흉한 살기를 내뿜던 무인들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침음을 흘리며 입을 다물었다.
마침내 주렴 너머의 그림자가 입을 열었다.
“과연 당돌하구나. 하지만 보다시피 본 련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가 어렵겠군.”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거요?”
“책임이라…….”
말끝을 흐린 그림자가 고개를 돌려 요당을 보았다.
요당이 허리를 살짝 숙여 보이더니 한 걸음 나섰다.
“하 대협께서는 무림맹 행사에서 일어난 일이 본 련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어찌 확신하시오?”
“눈앞의 증거를 보고도 모르쇠를 하겠다는 거요?”
“증거? 누군지도 모를 자들의 머리를 들고 와서 던져두면 그게 증거가 된단 말이외까?”
“이미 본 맹에서는 이 모든 일을 주관한 자가 누군지 알고 있소.”
말을 마친 적비연이 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휙 집어 던졌다.
그야말로 거침없는 태도.
두루마리를 낚아챈 요당이 차분한 표정으로 펼쳐 보았다.
과연 두루마리 안에는 교패가 주축이 되어 저지른 일련의 음모들이 적나라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또한 그것을 뒷받침하는 증거들과 증언들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었다.
적비연이 말을 보탰다.
“본 사절단이 출발하기 전, 본 맹은 광동성으로 급보를 보내 신풍문을 철저하게 조사했소. 그 과정에서 그러한 증거와 증언들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졌지. 이래도 귀련의 짓이 아니라고 변명할 생각이오?”
두루마리를 접은 요당이 희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과연. 이런 일이 있었구려. 하지만 교 선생은 지금 여기에 없소.”
“그러니까 교 선생께 책임을 묻는 대신 저 삼 공자의 목을 달라는 거요.”
적비연이 다시 한번 삼 공자를 가리키자, 종권악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자기 목이 무슨 동네에서 쏘다니는 닭 모가지쯤 되는 줄 아는가?
이쯤 되자 분위기만 살피던 종권악이 성큼 나섰다.
“하 대협의 논리가 참으로 괴상하오! 원래 정파인들이 명분 놀이에 빠져서 괴변만 일삼는다는 말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건 정말 더 이상 들어줄 수도 없을 지경이군!”
“삼 공자님. 진정하시지요.”
요당이 슬그머니 나섰지만 종권악은 한 번 치밀어 오른 분노를 좀처럼 다스리지 못했다.
“그렇게 내 모가지가 탐난다면 어디 직접 가져가 보시지!”
적비연이 종권악을 물끄러미 보았다.
한편 이 상황을 지켜보던 단휘는 머리가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
‘아…… 큰일 났다. 협상은커녕 점점 저들을 자극하고 있어.’
요당이 다시 나섰다.
“삼 공자님, 많이 흥분하신 듯합니다. 하 대협도 더 이상 삼 공자님을 자극하는 발언은 삼가주십시오.”
“딱히 자극하려는 의도는 없소만.”
“귀맹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심심한 유감을 표합니다. 하나 본 련의 입장도 있는지라 자체 조사를 한 후에 책임질 것이 있다면 마땅히 책임을 지…….”
“하! 자체 조사라. 한 패거리인 도둑놈들끼리 서로 몸을 뒤져서 훔친 걸 꺼내놓으라고 하면 잘도 내놓겠소.”
그러자 다시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뭐, 뭣이? 도둑놈? 이노오옴!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련주님, 젖비린내 나는 저 애송이 놈을 당장 찢어버릴 수 있도록 명을 내려주십시오!”
“이놈아! 가서 어미젖이나 더 먹고 오너라!”
그러자 적비연이 몸을 돌리더니 마지막으로 소리친 사내에게 차갑게 일렀다.
“내가 아직도 젖 먹을 나이로 보이오? 당신은 약관을 지나서도 어미젖을 빨았나 보군. 맛있었소?”
“저, 저, 저……!”
소리친 사내가 뒷목을 잡고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종권악이 불쑥 나섰다.
“좋다! 네가 내 목을 그리 원한다면 내어주지!”
“공자님!”
장내의 모든 무인들이 종권악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적비연 역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종권악이 말을 이었다.
“단! 그만한 자격이 있다면 말이지만.”
“자격?”
“아까 끝맺지 못한 승부를 지금 보는 게 어떤가?”
“승부라.”
“대신 이번엔 첨결이 아니라 진짜 생사결을 겨뤄보자. 이 자리에서!”
“공자님. 자중하십시오.”
요당이 얼른 나섰다.
하지만 종권악은 제멋대로라는 소문답게 요당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만약 내가 진다면 목을 취하든 말든 알아서 해라. 하지만 당신이 진다면 잘난 사절단이 가지고 돌아갈 것은 내 목이 아니라 당신의 목이 될 것이다.”
적비연이 미간을 좁히더니 장내를 둘러보며 말했다.
“모두 귀가 있으니 들으셨을 거라고 생각하오. 귀련의 삼 공자가 내게 생사결을 제안했소. 그리고 나는 그것을…….”
꿀꺽.
장내의 모든 사람들이 침묵한 채 적비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받아들이겠소.”
순간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혼란스러운 것은 사절단도 마찬가지.
현청이 얼른 전음을 보냈다.
[하 대협,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차라리 교패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교패가 이곳에 없다지 않소?]
[그건 그렇지만 너무 서두르실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하 대협의 형님도 어디에 납치된 것인지 찾아야 하고…….]
[그건 이후의 계획이 있지 않소?]
[그렇지만…….]
그러는 사이 종권악이 성큼성큼 걸어 나와 주렴을 향해 무릎을 꿇고는 포권했다.
“사부님! 불초 제자가 상의 한마디 없이 나선 점 사죄드립니다! 하나 사절단이 제 목을 요구하는 만큼 정당한 승부를 통해서 그 결과를 가리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흐음.”
무거운 침음이 흘러나왔다.
잠시 후 다시 사방에서 웅혼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네 뜻대로 하거라.”
“감사합니다!”
종권악기 몸을 일으키더니 그 자리에서 검을 뽑아 들고는 돌아섰다.
차앙!
“말이 나왔으니 이 자리에서 승부를 가리자.”
“나쁠 것 없지.”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단휘를 보며 손을 내밀었다.
“아……!”
단휘가 허겁지겁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건네주었다.
적비연의 검은 이미 흑천궁 안마당에서 산산조각 났기 때문이다.
상황이 급박하게 진행되자 단휘를 비롯한 사절단들이 좌측으로 물러났다.
이제 융단 위에는 적비연과 종권악만이 검을 서로에게 겨누고 있었다.
팽팽한 긴장감.
첨결을 할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이길 수 있겠죠?]
임송화가 현청에게 넌지시 전음을 흘렸다.
현청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다만…… 조금 전보다는 확실히 불리한 면이 있군요.]
사절단원 중 적비연의 실력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휘와 예홍도 그저 대충 짐작만 할 뿐.
특히 현청과 임송화는 대련조차 해본 적이 없으니 좀처럼 감이 오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곳은 흑천련이다.
흑천련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
흑천궁 중심이다.
사방에서는 사기를 섞은 살기가 적비연을 향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말도 안 되게 불리해진다.’
일단 상대의 기운을 감지하는 것도 어렵게 된다.
사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지는 살기 때문에 기감에 따라 본능적으로 대응하기가 어려워진다.
즉, 상대는 사방팔방에서 쏟아지는 살기에 자신의 기운을 숨길 수 있단 뜻이다.
하지만 적비연은 다르다.
어떻게 움직이더라도 정순한 기운은 표가 날 수밖에 없으리라.
그럼에도…….
‘별로 마음이 불안하진 않네.’
임송화는 이상할 정도로 차분한 자신이 신기하기만 했다.
만약 이 자리에서 사절단 대표가 진다면 미래가 불투명해지는데.
자칫 이곳에서 뼈를 묻어야 할 가능성이 높은데도.
‘마음이 편해.’
이게 믿음이라는 걸까?
매번 엉뚱한 일을 저지르는 남자.
하지만 그때마다 기적에 가까운 결과를 만드는 남자.
‘그래, 이번에도 난 당신을 한번 믿어 보겠어. 지지 마.’
한편 극마는 사방을 둘러보며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것들이 구질구질한 짓을 하는군. 이렇게 강한 살기를 쏘아대다니. 비열하기 짝이 없군!
‘오히려 잘된 건지도 모르지.’
-잘되다니? 네놈은 저 녀석의 기운을 감지하기 어려워질 거다.
‘그건 저쪽도 마찬가지일 거야. 내 몸에 정도의 기운만 흐르는 게 아니니까.’
-아……!
극마가 탄성을 내지를 때였다.
타앗!
먼저 움직인 것은 종권악이었다.
이미 조금 전 적비연과 첨결을 겨뤄본 그였다.
적비연이 만만치 않은 호적수임을 알았기에 선공을 양보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흐아아앗!”
기합성과 함께 그가 검을 수직으로 뻗어나갔다.
적비연은 쇄도해 들어오는 종권악을 두 눈 부릅뜨고 노려보았다.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이려고 한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조금 더……! 조금 더……!’
당장 조급함 때문에 발이 떨어지려고 하지만 참아야 한다.
그리고 검봉이 한 치 앞으로 다가왔을 때,
‘지금이다!’
스르릇.
“……!”
순간 종권악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의 눈에는 적비연의 신형이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어느 순간 적비연은 뻗어오는 검을 빗겨서 발걸음을 옮겼다.
피츗!
검신에 베인 뺨에 가느다란 선혈이 생겨났다.
‘칫! 각이 조금 모자랐나?’
그래도 상처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이다.
그대로 검신을 지나친 적비연이 검을 곧게 내뻗었다.
푸욱!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검파를 통해 뭔가를 찌른 감각이 전해진다.
구천혈마검의 제일초식 구천일관시!
‘통했다.’
마기를 운용하는 대신 결이 비슷한 사기를 운용했다.
종권악의 눈에 적비연이 일순 사라졌다는 착각이 일어난 것은 그의 기운이 사기로 변했기 때문이었다.
정순한 기운이 눈앞에서 사라지고, 사방에서 쏟아지는 사기와 똑같아지니 순간 움직임을 놓쳐 버린 것이다.
마기도 아닌, 사기로 이렇듯 자연스럽게 구천혈마검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끊임없이 심상수련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극마가 구천혈마검을 익히는 동안, 적비연은 주변에 사람이 없으면 심심찮게 사기를 운공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살기 때문에 사절단 역시 적비연이 일순 사기를 이용했다는 건 눈치채지 못했다.
뒤늦게 종권악의 비명이 치솟았다.
“크아아악!”
옆구리가 꿰뚫린 종권악이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장내의 모든 무인들이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단 일 검!
물론 삼 공자가 련주의 다섯 제자 중에서 무공으로 따지면 가장 약하다.
하지만 단 일 검에 당하다니!
촤악!
휘리리릭! 척!
종권악의 옆구리에서 검을 뽑아낸 적비연이 그대로 몸을 회전하더니 검신을 종권악의 목에 갖다 댔다.
“헉, 헉, 헉……!”
거친 숨을 몰아쉬는 종권악은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패할 줄이야!
놀라긴 요당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삼, 삼 공자……!”
하지만 적비연은 기다려 줄 생각이 없었다.
“그럼 삼 공자의 목을 가져가겠소.”
이어 검파에 힘을 싣는 순간,
삐이잉, 따앙!
돌연 흑천궁 입구에서 날아든 바늘이 적비연의 검을 튕겨낸 것이 아닌가?
적비연이 두어 걸음 물러나서는 입구 쪽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누구요?”
남루한 차림에 죽립을 눌러쓰고 빛을 등진 채 걸어오는 사람.
그가 죽립을 슬쩍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나, 교패가 이 자리에 책임을 지러 왔다.”